“많은 나라들이 회담 장소로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남북의 경계에 있는 판문점 ‘평화의집’이 제3국보다는 더 표상적(representative)이고, 중요하며, 영속적인 곳이 아닐까? 그냥 한번 물어본 것!”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사상 첫 정상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밝힌 트위터 메시지다.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 관심을 두었던 까닭은 ‘축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람은 (판문점을) 싫어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까닭은 거기에서 무언가 일이 잘되면 엄청난 자축을 해야 할 장소는 제3국이 아니라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은 한반도와 관련해 잠재적으로 무언가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지점에 이처럼 가까이 온 적이 없었다”고도 말했다. 몽골과 베트남, 싱가포르와 함께 판문점이 회담 장소로 거론됐던 즈음이다. 판문점은 싱가포르와 함께 마지막까지 검토됐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판문점’
트럼프가 아니더라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해왔다. 냉전시대에는 베를린과 함께 공산진영과 대치했던 자유진영의 최일선으로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고, 탈냉전 시대에는 세계로부터 고립된 섬이자, 핵무기를 개발하는 위험한 나라에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방문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겨 은퇴 뒤 대통령 도서관에 보관해왔다. 8·18 도끼만행 사건 7년 만인 1983년 11월13일 미8군 야전점퍼를 걸치고 판문점 캠프 리버티벨에 섰던 로널드 레이건은 미 2사단 장병들에게 확고한 전투태세를 주문했다.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북한은 증오와 좌절에 토대를 둔 공산주의 정권”이라면서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생산할 수 있는 것이라곤 폭압과 군사력뿐”이라고 지탄했다. 레이건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후일 판문점 방문을 인생의 가장 잊지 못할 경험의 하나로 꼽았다.
판문점을 찾은 미국 대통령들은 최북단의 미군 초소 오울렛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사진을 남겼다. 북한과 25m 지점이다. 판문점에서 북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빌 클린턴이었다. 클린턴은 1993년 7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중간쯤까지 걸어갔다. 북한군 초병이 불과 15m 앞에 있던 지점이었다. 클린턴은 북한군 병사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저들도 이곳까지 평화롭게 걸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아시아 순방의 마지막 방문 장소로 판문점을 선택했던 것은 미국의 강한 방위공약을 확인시킴으로써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에 따른 한국과 일본 등 우방국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해 한반도 거주민을 긴장시켰던 조지 W 부시는 2002년 2월20일 도라산역 연설에서 자극적인 발언을 삼갔다. 대신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무기들로 우리를 위협하도록 허용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세 달 뒤인 2012년 3월25일, 북한이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를 예고한 가운데 판문점을 찾은 버락 오바마는 처음으로 방탄 안경을 썼다. 오바마는 캠프 보니파스의 미군 장병들에게 “여러분은 자유의 최일선에 있다”면서 “자유와 번영의 관점에서 남북한의 차이는 너무도 분명하다”고 말했다.
■1년 만에 달라진 트럼프의 판문점
트럼프가 오늘 다시 서울을 방문한다. 내친김에 판문점을 방문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계획은 없다고 확인했다. 지난 26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릴 일본 오사카로 떠나기 전 백악관 로즈가든 회견에서 밝힌 내용이다. 트럼프는 그러나 “나는 어쩌면 다른 형식(form)으로 그와 말할 것”이라면서 여운을 남겼다. 판문점을 방문한 미 대통령들은 ‘미군통수권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부분 군복을 걸쳤다. 미군 병사들을 위로, 격려하는 한편 한·미 동맹의 굳건한 태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트럼프가 판문점을 방문한다면 그 역시 군복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유독 주한미군 병사들의 고향 복귀를 여러 차례 다짐해온 트럼프가 내놓을 메시지는 사뭇 결이 다를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희망 섞인 관측은 주로 한반도 남쪽에서 나오지만 트럼프의 방한 전 분위기는 사뭇 다르게 흘러간다.
트럼프 입에서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판문점이 거론된 지 1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때로 울퉁불퉁한 험로를 지나고, 앞이 잘 안 보이는 안갯속이었지만, 그 끝에는 평화의 단서가 잡힐 것이라는 기대가 살아 있다. 그사이 1번의 북·러, 2번의 북·미, 3번의 남북, 4번의 북·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돌고 돌아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행보는 그리 멀리 나가지 못했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한 외무성의 권정근 미국 담당 국장은 지난 27일 담화를 통해 북·미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미국의) 제대로 된 협상자세’와 ‘말이 통하는 사람(실무협상 대표)’을 내세웠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4월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강조한 대로 “미국이 올바른 셈법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고 못 박았다. 남측에 대해선 “우리가 미국에 연락할 것이 있으면 조·미 사이에 이미 가동되는 연락통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고, 협상을 해도 조·미가 마주앉아 하는 것인 만큼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겉으로만 보면, 일개 국장이 대한민국을 능멸한 셈이다. 하지만 아기가 유난히 보채면 잠잘 때가 됐거나, 젖먹을 때가 됐다는 신호이다. 북쪽에서 험한말이 자주 나오면, 그만큼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칙으로 안다. 어쨋든 평양을 방문했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편에 “트럼프 대통령과 가급적 이른 시일에 만나고 싶다”는 말을 건넸던 1년 전과 판이한 변화다.
■돌고 돌아 제자리인 북핵 협상
북·미 협상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그사이 상당 부분 식었다. 관심의 초점도 이동했다. 트럼프의 방한 및 판문점 방문 여부가 아니라 오늘 오전 오사카에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에 관심이 쏠려 있다. 지난 5월 강 대 강 구도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결렬된 미·중 무역분쟁의 후속 협상이기 때문이다. 각국 관측통들은 지난 20일 평양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의 의미 역시 미·중 무역협상의 틀 속에서 읽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과 미국, 중국 정상의 ‘어울리지 않는 3자 댄스’로 표현했다. 하지만 굳이 춤에 비유하자면 북핵 문제는 결국 북·미가 함께 추는 탱고라는 말이 더 정확할게다. 북·미 간 직접 대화를 제외한 다른 모든 움직임은 중재 또는 조력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김 위원장의 전용열차가 아무리 블라디보스토크역이나 베이징역을 돌아다녀도 결국은 워싱턴에서 여정을 마쳐야 한다. 국내 일각에서 기대하는 바, 트럼프의 판문점 방문에서 인상적인 이벤트가 있다면 나쁠 건 없지만, '나홀로 리얼리티쇼'는 문제 해결의 핵심과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김 위원장의 최근 북·러, 북·중 정상회담 역시 각각 양자관계의 정상화 또는 심화라는 소득은 있을지언정 북한의 국가적 명운이 걸린 대미협상에서 결정적인 자산이 될 가능성은 없다. 드러난 성과도 없었다. 지난 4월25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의 한 축을 허물 획기적인 역할을 약속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북·중 정상회담 하루 전인 지난 19일자 노동신문 기고문에서 양국 간 교류와 협조의 대상으로 ‘교육·문화·체육·관광·청년·지방·인민생활 등’을 언급했다. 하지만 북한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경협은 제외했다. 북·중이 ‘좋은 동지와 좋은 이웃’으로 국교수립 70년 동안 우호관계를 확인하는 외교적 수사만이 남발됐다. 중국에 북한의 존재가 혹 없어지면 치아가 시릴 수도 있기에 긴요한 ‘입술’이라면, 미국과의 관계는 곧바로 ‘치아’에 해당한다. 미·중 오사카 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에서 시 주석이 트럼프의 심기를 거스르는 무리수를 둘 가능성은 애초 없었다. 푸틴 대통령과 시 주석은 각각 북한의 ‘합리적인 관심사’인 체제 안전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북한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풀을 뜯어먹더라도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푸틴 대통령)”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 주고받은 북·미 정상의 편지
세계는 북·러, 북·중 정상회담 결과보다는 북·미 정상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북·미관계에서 유일하게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로 “생각나면 아무 때든 서로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있는” 트럼프와의 개인적 관계를 꼽았다. 그가 말한 편지가 최근 오갔다.
트럼프는 지난 11일 김 위원장으로부터 ‘아주 개인적이고 따뜻한 편지’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매우 긍정적인 무언가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 편지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고 부연했다. 이에 화답하듯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 23일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판단 능력과 남다른 용기에 사의를 표한다. (친서의) 흥미로운 내용을 심중히 생각해볼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서로의 편지에 담겼다는 ‘흥미로운 내용’은 27일 현재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북·미 간에 긍정적인 발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을 뿐이다. 그 끝에 이뤄지는 게 트럼프의 방한이고, 판문점 방문 검토 사실이 알려지면서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희망의 근거다.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북한과의 거리를 오울렛 초소의 25m에서 다소나마 줄이는 데에는 빌 클린턴의 방문까지 꼬박 40년이 걸렸다. 오바마는 다시 25m로 후진했다. 트럼프는 얼마나 다가갈까. 어쨌든 판문점을 대북 경고와 한·미 동맹을 과시하는 무대가 아닌, 축제의 장으로 지목한 미 대통령은 트럼프뿐이니 기대해본다. 다만, ‘다른 형식의 대화’가 아닌, 대면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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