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등 뒤에 화살을 쏘아선 안된다. 구한말 조선의 지식인들이 느꼈을 국가적 위협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게다. 그중 무엇을 가장 큰 위협으로 보았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달라졌다. 나라를 상속재산쯤으로 여겼던 봉건 왕가의 피붙이들과, 왕실과의 혼인으로 권력과 재력의 로또를 맞은 민씨 일족에겐 재산권 침해가 가장 큰 위협이었을 게다. 나라의 운명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에게 위협은 ‘사람을 하늘로 여기지 않는’ 부패한 관리들이었고, 국권 침탈을 노리는 외세였다.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역사학자 김윤희) 이완용이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을 주도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두 가지였다. 을사늑약 반대론자들에 대해 “가령 저들처럼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들이 나라 안에 있었다면 쟁집(爭執)했어야 하고, 쟁집해도 안되면 들고일어났어야 하고, 들고일어나도 안되면 죽었어야 한다”는 말 화살을 날렸다. “국가로서 독립할 실력이 없이 독립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과 제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른바 준비론의 요체다.
합방 이후 그리 합리적이었던 친일파들의 행적은 ‘준비’나 ‘자강’과 거리가 멀었다. 덴노(天皇)가 던져준 작위를 감지덕지 받아 챙기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독립할 실력을 키우기는커녕 대부분 제 재산을 불리기에 바빴다. 부인할 수 없는 현대사의 질곡이다. 마땅히 쟁집했고, 쟁집해도 안되니 들고 일어났으며, 죽어 쓰러지는 순간까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들었던 동학도들은 저들의 안중에 국민이 아니었다.
난세에 특정 외국에 기대려는 심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 최종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독립 초기 신생국 미국의 엘리트들은 두 부류로 갈렸다. 친프랑스파와 친영국파다. 친불파의 대표적 인물은 주불 대사를 거쳐 초대 국무장관과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이었고, 친영파의 지도자는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각각 제퍼소니언과 해밀토니언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적 가치의 양대 흐름이다. 양 진영에 ‘제휴할 나라’만 다른 게 아니었다. 제퍼슨은 자작농에 기반한 ‘자유의 제국’을 꿈꾸었지만, 해밀턴은 금융과 무역입국을 도모했다. 제퍼슨은 공화당, 해밀턴은 연방당을 이끌었다. 양 진영의 대립은 그리 고상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제퍼슨은 환호했지만 영국을 좇은 해밀토니언들은 급진주의를 경계했다. 해밀턴의 연방당원들은 “제퍼슨이 정권을 잡으면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모두 단두대감”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제퍼소니언들은 해밀토니언을 두고 ‘영국의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고, 해밀토니언들은 ‘프랑스의 도구들’이라고 되받았다. 저잣거리에서 일반 주민들 간에 격돌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감정적 대립도 심했다. 조지 헤링의 <식민지에서 슈퍼파워까지>가 전하는 미국 사회의 대립구도다. 프랑스 공화국 제1집정관 나폴레옹의 거병으로 영·불 전쟁의 전운이 짙어가던 무렵 미국 내에서 먼저 영·불 전쟁을 한 셈이다. 1790년대 초 ‘미국 내 모든 항구에서 영국 선박을 차단해달라’는 프랑스의 주문이 전달되면서 갈등은 증폭됐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영·불 사이에서 중립을 선택하면서 파멸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스페인이 프랑스에 루이지애나를 할애하자 미국의 고민은 깊어갔다. 아메리카 대륙에 거대한 프랑스 영토를 건설하려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알기 때문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돌려놓은 것은 ‘친불파’의 핵심,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은 프랑스에 뉴올리언스와 주변 해안지역의 매입을 제안했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매입 대상은 미시시피강 수계에 걸쳐 있는 루이지애나 영토 전체로 확대됐다. 제퍼슨은 프랑스가 거부한다면 영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복안을 드러내며 영국 카드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이 성사된 것은 그가 오랜 세월 프랑스에 심어놓은 신뢰가 자산이 됐다. 전비가 급한 나폴레옹에게 1500만달러(2017년 GDP 기준 6000억달러)를 쥐여주고 얻은 루이지애나는 미국 본토의 40%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였다. 후일 미국을 슈퍼파워로 만들어준 자산이 됐다.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금융과 무역입국을 꿈꿨던 해밀토니언들은 넓어진 영토에서 번영을 일궈냈다. 위기에 처한 약소국 안에서 양분된 채 정쟁을 일삼았지만, 각기 자신들의 신념과 방식으로 국가의 부(富)와 강(强)을 끌어낸 사례로 꼽고 싶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조국이었지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어쩌다가(accidental) 슈퍼파워’가 된 것은 두 개의 ‘사대주의’가 모두 제 몫을 다한 덕분이다. 특히 프랑스가 제기하는 위협을 ‘친불파’가 해결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말, 국가적 존망의 위기에 처한 베트남의 경우 역사적 숙적이자 위협의 원천인 중국과 교섭하는 역할을 ‘친중파’가 맡았다. 1978년 캄보디아 점령 이후 10년 동안 베트남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웠다. 캄보디아에선 크메르 루주를 비롯한 게릴라들과, 중국 국경에선 중국군과 포격전을 벌였다. 두 개의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군사적, 경제적으로 도왔던 소련이 돌아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85년 페레스트로이카(개혁)·글라스노스트(개방)와 함께 신사고를 표방했다. 그 신사고 안에는 베트남과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포함돼 있었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양 진영으로 갈려 국가가 직면한 위협에 대해 각각 다른 판단을 내놓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투철한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권 붕괴를 위협의 원천으로 보았고, 개혁파는 낙후된 경제를 최대 위협으로 꼽았다. 이듬해 제6차 당대회에서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발표했지만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된 상황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베트남 지도부는 결국 캄보디아 철군을 결정한 뒤 중국에 투항했다. 1989년 9월2일, 베트남 지도부는 하노이를 비우고 중국 청두로 날아갔다. 응우옌 반 린 당 총서기와 레 둑 안 국방장관 등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중국에 사회주의 연대를 제안했다. 제국주의에 맞서 ‘이념의 동맹’을 맺자는 제안은 “친구는 될 수 있지만, 동맹은 아니다”라는 중국의 거절 탓에 좌절됐다. 하지만 대중 외교는 베트남이 최소한 국제사회로 복귀하는 첫 단추를 끼웠다. 1991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동남아국가연합(ASEAN) 복귀, 1995년 미국과의 국교정상화로 이어졌다.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에는 여전히 중국 공산당을 이념의 동지로 여기는 세력이 권력의 한 축을 맡고 있다. 개혁파와 이념파는 지금도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 주권을 침해하는 중국을 견제하되, 중국의 고도성장에 편승하는 ‘투쟁·협력의 외교원칙’을 정착시켰다. 베트남과 중국 관계는 전형적인 ‘관온민랭(官溫民冷)’이다. 2015년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아시아 10개국 국민들의 상대국 인식조사에서 베트남 응답자의 19%만이 중국에 우호적이라고 답했다. “베트남 공산당이 중국의 2등 국민이 되길 원한다” “조국을 중국에 팔아넘겼다”는 불만이 나온다. 하지만 양국 지도층과 관영 언론은 양국관계에 부정적인 요소를 한사코 지우고 있다. 베트남은 그럼에도 군사동맹을 맺지 않는다. 강대국의 망토 안에서만 안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동아시아 분단국과 참 다르다.
이달 초 한국의 의표를 찌른 아베 신조 일본 내각의 무역보복 탓에 한·일관계는 1965년 수교 이래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면서 그나마 활발했던 민간교류에까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무역마찰을 ‘무역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긴장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와 결합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급습은 미국의 대일 석유금수조치 끝에 발생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도발에 나선 일본과 달리, 뒤늦게 대책 강구에 나선 한국은 비축해놓은 총알이 별로 없다.
그 와중에 전선에 나선 이들의 뒤통수에 총을 쏘는 구한말의 작태가 재연됐다. 일부 정치인들이 정부의 외교실책 비판에 화력을 집중하면서 작용과 반작용이 맞물리며 발생한 사태다. 친일파 논란이 새삼 불거지고, ‘죽창가’와 국채보상운동, 의병론의 레퍼토리가 나왔다. 밥값을 못하는 정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일본과 대적해야 할 정부의 뒤에 총을 쏘고, 적을 응시해야 할 정부가 고개를 돌려 맞총질을 하는 구도는 볼썽사납다.
‘일본’은 한국민에게 단순한 나라 이름이 아니다. 과거사를 돈 몇 푼에 팔아넘긴 선대의 패착이 악순환하면서 숱한 감정의 복선을 낳았다.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민족주의와 국민적 감정은 다르다. 과열되지만 않는다면 대일 교섭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그 감정을 인정하되 현실외교에서 냉정하게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국민의 총합으로써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친일파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지 100년이 넘었다. 그 정도면 준비하기 충분한 시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여전히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 친불파와 베트남 친중파가 그랬듯이 우리의 친일파도 자산이 될 수는 없을까. ‘토착왜구’도 분명 우리 역량의 일부다. 일본을 깊이 이해하고, 애정하는 그들이 경쟁적으로 대일 교섭에 나서주었으면 한다.
아베의 일격은 우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 굴지의 교역국이자 반도체 강국의 급소가 노출됐다. 국제 분업으로 유지되는 자유무역 질서라고 하지만 일본 소재로만 완성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재계 일각의 안이함이 위기를 배양해왔다. 우리 기술, 우리 중소기업을 키워낼 생각이 적었다. ‘푸른 눈의 쇼군(將軍)’은 이번에도 한·일 갈등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일본인들의 철저한 준비와 의사결정 과정을 네마와시(根回し)라고 한다던가. 아베 내각의 네마와시 과정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사전 조율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건 난센스다. 그럼에도 미국으로 달려가 ‘거시기한 반응’만 접하고 돌아와야 했다. 한·미·일 삼각형 질서에 포획된 우리의 좌표가 아프게 노출됐다. 1965년 체제는 끝났다. 새로운 포석을 고민하고, 준비할 때다.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그동안 친일파라도 나서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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