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8일 자정이 넘은 깊은 밤. 타이(태국) 북방의 관광도시 치엥마이에서도 140키로메터나 떨어진 먄마(미얀마) 국경과 린접한 깊은 원시림을 꿰지른 삥가우로 네 사람을 태운 커누 하나가 물살을 헤가르고 있었다. 구름 속을 헤염치는 초생달빛이 조심히 젓는 노질에 술렁술렁 번져지는 강물우를 어슴프레하게 비칠 뿐 사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지난해 8·15를 평양에서 맞았다. 평양 한복판에서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방북 취재 길에 접한 전운광의 소설 명은 <네덩이의 얼음>이다. 태국의 국경 마을 칸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태국 및 일본 형사가 공조수사를 하는 것을 골격으로 한다. 일본 형사가 끼어든 것은 피살자 2명이 모두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렌코라는 이름의 30대 여성은 사원 불당에서, ‘흰 대머리의’ 노인은 그 반대편의 수백년 된 티크나무에 목매인 채 각각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들은 왜 태국 변방의 작은 마을에서 피살됐을까. 유일한 단서는 현장에서 발견된 ‘아시아정의련합’ 명의의 ‘판결집행장’뿐이었다. ‘일본군 전쟁범죄, 성노예 범죄자들을 마지막 한사람까지 추적 처벌한다’는 게 골자였다.
■ 평양 한복판에서 발견한 추리소설
전형적인 추리소설 기법으로 쓰였지만 일본의 과거사 관련 현안들이 중간중간 소개된다. 관방부 장관으로 사건을 무마하려는 아베 신조 현 총리도 나온다. 하지만 한달음에 읽힐 만큼 가독성이 높았다. 피살된 노인은 태평양전쟁 당시 태국 라후족 유격대를 진압하던 일본군 토벌대의 니시하라 중대장으로 신원이 밝혀진다. 렌코는 우익단체에서 활동하던 그의 손녀다. 둘 다 일본 황실의 인척이다.
사건을 수사하던 태국 민완형사 웅카라는 현지인과 결혼한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의 아들로 설정된다. 결론은 선명한 인과응보다. 제목의 ‘네덩이의 얼음’에 대한 설명은 종장(終章)에 나온다. 소행성이 일본 근해에 떨어져 시코쿠섬이 완전 폐허가 되고 후쿠시마 원자로가 재폭발해 4개의 일본 열도 전역에 방사능 피해가 퍼진다는 저주를 담고 있다. 그리하여 “풍파사나운 태평양 한가운데를 향방없이 좌충우돌하며 떠돌고있는 차고 싸늘한 그 네덩이의 얼음을 세상 사람들은 쓰거운 웃음 속에 지켜본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추궁하는 것은 평양 사람들에게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였다. 조선중앙TV에서는 해방 직후 인민 속으로 숨어든 친일파와 미군첩자를 색출하기 위해 비밀활동을 하는 여성 혁명가 이야기를 담은 <방탄벽>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딱히 광복절 즈음에만 반짝하는 게 아니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을 건국의 초석으로 여기는 사회다. 일본은 철저하게 응징과 저주의 대상이다. 일본도 이를 알기에 북한을 대하는데 조심스럽다.
■ 남한이 우스운 일본, 북한이 아쉬운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이 지난 7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에서 기어코 제외하면서 올해 8월은 어느 해보다 반일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다. 아베의 준비된 일격에 대응책을 찾는 것도 녹록지 않다. 그래서인지 오는 24일 우리가 연장 결정을 하게 돼 있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재검토론까지 대두됐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매체들은 아베의 도발에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부으면서 ‘민족공조’를 하고 있다. 북측의 언어는 매섭다. 적반하장격인 일본을 두고 ‘평화 부수는 악성종양’ ‘고약한 섬나라 족속’이라고 지탄했다. 아베 총리는 ‘현실을 제대로 분간할 줄 모르는 정치난쟁이’로 규정했다. 남측 일각에서 “속이 다 시원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그런데 북한은 일본만 공격하는 게 아니다. 7월23일 신형 잠수함을 공개한 데 이어 지금까지 네차례나 신형전술유도탄 혹은 신형대구경조종방사포시험을 감행했다. 특히 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참관하에 위력시위 발사한 신형전술유도탄은 평양 수도권 상공에서 한반도를 횡단, 동해의 목표물을 정밀타격했다. 정확하게 남측을 사정권으로 하는 무기다. 한·미 군사훈련을 빌미로 내세우지만 북측 매체의 보도를 꼼꼼히 읽어보면 ‘지상군 작전의 주역을 맡게 될 신형 무기’ 개발 성공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일본과 북한만 우리를 옥죄는 게 아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경제와 안보 악재에 꼼짝없이 포획된 모양새다. 미국은 한·일 갈등 해소에 나서기는커녕 한국에 대해 방위비 증액, 호르무즈 해협 파병, 중거리 미사일 배치의 3중 압박을 가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인가. 한발 떨어져서 보면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안보 사안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느닷없이 돌출한 것도 아니다. 한반도 분단 체제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이 공교롭게 겹쳤다. 나라별로 따져보면 각각 갈등요인과 협력요인이 병존한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실타래를 풀어가야 한다. 우선 일본이다.
■ 아베, 도발인가 몽니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 이후 북한의 잇단 단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작은 일’로 평가하고 있다. 미국 본토에 도달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니면 괜찮다는 말이다. 5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체 시험에 ‘깊은 유감’을 표했던 아베 역시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복창하듯 “일본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는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와야 다케시 방위상은 “중대한 위협이자 심각한 과제”라고 본심을 내보였다.
아베의 여유는 북한 미사일의 사거리에 따라 간단하게 뒤집힐 수밖에 없다. 2017년 8월29일 오전 6시2분, 북한이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을 일본 열도 위로 발사하자 홋카이도 주민들은 혼비백산했다. 재난 및 긴급상황을 통보하는 ‘J-얼럿(Alert)’ 시스템이 발동됐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각료회의를 열었다. 한반도 유사시 서울 수도권의 인명피해와 도쿄 수도권의 피해 예상치는 별차이가 없다. 북한발 위기에 관한 한 한·일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베의 대응에는 뒤틀린 속셈이 엿보였다. 한반도 위기를 종종 평화헌법 개헌의 호재로 동원하려는 의도 탓이다. 지난해 4월13일 참의원 국방위에 출석해 “북한이 사린가스 미사일 발사 능력을 갖췄을 것”이라며 되레 국민을 더 불안케 한 것이 대표적이다. 같은 달 “유사시 (대한해협을 넘어올) 난민 수용시설 설치 및 난민 심사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한반도 거주민을 졸지에 ‘가상난민’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단호한 행보는 거기까지였다.
지난해부터 5차례의 북·중, 3차례의 남북, 2차례의 북·미, 1차례의 북·러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아베는 철저히 소외됐다. 작년 9월 미·일 뉴욕 정상회담 기자회견 석상에서는 트럼프가 자신을 앉혀 놓은 채 품속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꺼내 보이는 것을 바라봐야 했다. 결국 올해 6월부터 김정은 위원장과의 무조건적 대화 제안을 내놓고 마냥 기다리고 있다. 대남 경제 도발 이후 남한의 고위급 대화제의를 한사코 외면하는 반면에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 납치문제 해결 모습을 자국민에게 보이길 고대하고 있다. 남북을 분리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일본 문제에 관해서라도 은밀하게나마 민족공조를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북·일이 대화의 물꼬를 튼다면, 오히려 우리가 소외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남북관계나 북·일관계나 많은 부분 북·미협상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 아베의 다음 수(手), 그 의표를 찔러야 한다
일본과의 역사문제나, 우리의 안보문제나 단기간에 풀어나갈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현실은 한·일 모두 미국과의 안보 삼각형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중재를 기대하지만, 미국은 한·일 갈등에 여유가 넘친다. 갖가지 현안에서 한국이나 일본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일본과 일전을 불사하려 한다면, 일본을 향한 결기만으론 안된다. 미국 중심 안보 삼각형의 틀을 깨겠다는 담대한 전략을 먼저 마련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삼각형 내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차도지계(借刀之計)는 어떨까. 해결고리는 일본이 내민 ‘안보상의 우려’라고 본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징용자 판결에 대한 대항조치나, 보복조치가 아니라 수출관리의 문제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이 하는 것을 봐서 언제든지 보복 범위를 넓힐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오는 24일 우리가 연장 여부를 결정할 GSOMIA는 양날의 칼이다. 북한 관련 정보는 일본이 더 아쉽다.
우리가 홧김에 탈퇴한다면 당장 속이 시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난관이 많은 한·미관계에 상당한 타격이 된다. 한번 깬 협정을 복원하기는 더 어렵다. 특히 중국발 위기가 고조되면 우리 역시 아쉬운 면이 커진다. 워싱턴의 보수정객들 사이에서 “한국이 GSOMIA를 흔들 것”이라는 말이 넓게 퍼져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베가 사전에 설치해놓은 덫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언이다. 그 덫에 들어가면 아베의 꾀에 넘어간다.
이럴 때 딱 ‘아베 수준’으로 대응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면 “경제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승적인 의미에서 GSOMIA를 연장한다. 다만, 일본이 제기한 ‘안보상의 우려’가 명확하지 않은 만큼 우리 역시 안보상의 우려에서 대일 정보제공에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일본이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못박아둠으로써 우리 역시 여지를 확보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북한의 반일 감수성은 분단 70여년 동안 다져온 것이다. 단단하다. 하지만 ‘당의 결심’에 따라 언제든지 일본과 관계개선을 할 수 있는 게 북한과 같은 당국가체제이다. 일본에 대한 심정은 충분히 공유하되, 현실에서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남과 북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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