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미국 매사추세츠주 러들로의 엄마들 모임 이름이 관심을 끈 계기는 다소 엉뚱했다. 아이들의 축구리그 후원단체 회계담당자의 남편이 모금액 일부를 훔친 사건이 뉴스를 탔다. 절도 사건보다 엄마들이 구성한 후원단체의 이름에 포함된 ‘축구엄마(Soccer mom·사커맘)’가 더 관심을 끌었다. 본격적으로 미국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선거철이었다. 콜로라도주 덴버 시의회 의원에 출마한 수전 케이시 후보는 ‘사커맘을 시의회로!’라는 구호로 주목을 받았다. 박사학위 소유자로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던 화려한 경력의 그가 ‘사커맘’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보통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지역언론 로키마운틴 뉴스는 사커맘은 똑똑하고 성공한 여성은 가정에 사랑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막연한 우려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구호였다고 해석했다. ‘모두의 이웃이자 유권자 여러분과 같은 엄마’임을 내세운 케이시는 과반(51%) 득표율로 당선됐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가 전하는 사커맘의 유래다. 2008년 그렉 매클래치 감독의 영화 <사커맘> 역시 딸과 엄마의 축구이야기다.
사커맘은 이후 도시 교외에 거주하면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중산층 백인여성의 대명사로 정착됐다. 출발은 그야말로 축구와 엄마였다. 주말이면 미니밴이나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을 몰고 아이를 운동장에 데려다주고 지켜보는 것이 흔하게 볼 수 있는 미국 사회의 주말 풍경이다. 학교와 가정,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열쇳말이기도 하다. 러들로의 엄마들처럼 곳곳에서 아이들이 주말마다 축구시합을 할 수 있도록 기금을 조성해 지역 리그를 운영한다. 미국 여자축구가 성장하는 동안 사커맘은 선거 전략가들이 정밀하게 표심을 분석해야 하는 유권자 그룹으로 정착됐다.
축구는 북미대륙에서 결코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 아니다. 미국인의 ‘국민 스포츠’는 전국적으론 미식축구(풋볼)와 야구, 농구이고 지역적으론 알래스카주와 미국 북부를 중심으로 아이스하키가 인기몰이를 한다. 왜 풋볼맘이나 베이스볼맘, 바스켓볼맘이 아니라 그 많은 스포츠 중에서 유독 사커맘이 돋을새김됐을까. 여기에 미국적 특징의 또 다른 단면이 숨어 있다. 개인적으로 미국 생활 약 4년 동안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가 아이들의 체육교육이었다. 남자아이들이 주로 미식축구나 야구, 농구에 빠지는 반면에 여자아이들은 축구를 많이 시켰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거나 재능이 없으면 ‘하다못해’ 육상이라도 시켰다. 성장기 여자아이들에게 축구와 육상에 재미를 붙이게 하면서 단단한 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을 식물처럼 자리에 붙어앉아 공부하게 하는 습관을 들이려는 한국사회와 가장 다른 특징의 하나였다.
미국에서 사커맘이라는 말이 처음 주목을 받을 즈음, 한국에선 매년 9월이 되면 신문 사회면에 종종 캘린더형 기사가 등장했다. 아이들이 체력장을 하다가, 주로 오래달리기 도중 쓰러졌다는 뉴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입시부담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체력장까지 혹독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많은 기사의 주제였다. 그 덕에 전국의 학생들이 첫 입시에서 1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 악착같이 달려야 했던 체력장은 이제 아득한 전설이 됐다.
한동안 잊고 있던 사커맘이 다시 떠오른 것은 이달 초 프랑스 리옹에서 끝난 2019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 월드컵대회 때문이다. 미국 국가대표팀(USWNT)이 네덜란드를 제치고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1991년부터 시작된 여자 월드컵대회 8회 중 미국 팀은 통산 4번의 우승(1991·1999·2015·2019)과 1번의 준우승(2011)을 차지했다. 3번의 3위를 포함하면 전 대회에 걸쳐 ‘톱 3’에 오른 유일한 팀이다. 독일(2003·2007), 노르웨이(1995), 일본(2011)도 우승국이지만 역대 성적은 미국팀에 족탈불급이다. 그 저력은 여자아이들에게 튼튼한 다리를 갖게 하기 위해 주말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핸들을 잡았던 사커맘들에서 나온다. 올해 미국팀은 어느 해보다 많은 화제를 뿌렸다. ‘트럼프’와 ‘성평등’ ‘동성애’ 등 축구를 넘어서는 주제의 검색어와 조합을 이뤘다. 그 모든 조합은 내년 미국 대선과 연결된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은 단연 주장 매건 래피노(34)였다. 월드컵에서 6골 3도움의 경이적인 기록으로 최우수선수(골든볼)와 득점왕(골든부트)을 독식했다. 습관적으로 여자를 무시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래피노의 독설에 여러차례 망신을 당해야 했다. 순간적인 망신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현직 대통령으론 지극히 이례적으로 2017년 1월 취임과 거의 동시에 시작한 재선 캠페인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악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래피노와 미국 여자팀은 뛰면서 싸웠다. 풋볼을 비롯한 주요 종목이 전국대회 또는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백악관이 우승팀을 초청하는 것이 관례다. 래피노는 지난달 말 월드컵 16강 스페인전을 앞두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 인터뷰에서 “우승하더라도 ‘F 같은(f로 시작하는 욕설)’ 백악관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 첫해 콜린 캐퍼닉을 필두로 미식축구 선수들이 흑백차별에 대한 항의 표시로 국가연주 중 무릎을 꿇은 사건을 겪은 트럼프 대통령이 웃어넘길 말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예의 애국주의와 실적주의로 맞섰다.
“나는 미국 팀과 여자축구의 엄청난 팬이지만, 매건은 말하기 전에 우승해야 할 것이다! 일부터 끝내라! 우리는 아직 매건이나 팀을 초청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승패와 무관하게 팀을 초청하지만 매건은 미국과 백악관 또는 성조기를 결코 무시해선 안된다. 당신이 (유니폼에) 걸치고 있는 성조기를 자랑스러워하라. USA는 위대하다!” 래피노의 팀 동료인 알리 크리거는 트럼프의 트윗을 보고 “나는 성적 소수자(LTBTQ)와 시민들, 이민자와 우리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과 싸우는 이 행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래피노에 동참했다. 미국팀이 우승하자 트럼프는 마지못해 “미국 팀의 우승을 축하한다! 멋지고 흥미로운 경기였다. 미국은 당신들이 자랑스럽다”고 트윗했지만,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래피노가 백악관에 발을 디딜 일은 없을 것 같다.
래피노만큼 트럼프가 싫어할 요소를 두루 갖춘 스타 플레이어도 드물다. 캐퍼닉의 무릎 꿇기에 동참해 미국 내 경기에서 국가가 나올 때 무릎을 꿇어왔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38명의 동성애자 선수 중 한명이다. 게다가 ‘여자’다. 트럼프는 전형적인 백인남성우월주의자이자, 정도가 심한 여성 혐오론자다. 2016년 대선 유세과정에서는 그가 “범하고 싶은 여자가 있으면 성기를 움켜잡아라”라고 발언한 녹음테이프가 공개돼 그의 여성관이 백일하에 드러나기도 했다. 미국 여자팀 선수 28명은 지난 3월 남자 선수들과의 보수 차별철폐를 주장하며 전미축구연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트럼프는 그에 관한 질문을 몇차례 받았지만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해왔다. 그러다가 지난달 더힐 인터뷰에서 “그것(여자 선수들이 주장하는 동일임금)은 경제성과 관련이 있다. 호나우두 같은 스타들은 많은 돈을 받지만, 관중 수십만명을 몰고 다니지 않나”라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트럼프의 발언은 이번에도 팩트가 틀렸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USWNT는 2016~2018년 3년 동안 남자팀에 비해 거의 100만달러(약 10억원)를 더 벌어들였다. 성적은 비교가 안된다. 남자팀은 작년 월드컵에서 예선 탈락했다.
매스컴에는 래피노와 트럼프의 대결로 비쳤지만, 그 결과는 내년 11월 대선에서 드러날 사커맘의 표심에 따라 갈린다. 미국 사회는 이번 월드컵에서 밀레니얼(1980년대~2000년대 초반) 선수들이 보여준 당당함을 목도했다. 래피노는 그 표상일 뿐이다. 임금차별을 고리로 성차별 문제를 성공적으로 제기했다. 남성우월주의의 상징 격인 트럼프의 코를 납작하게 한 부수적인 성과도 거뒀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2016년 대선의 승패를 가른 주역은 ‘성난 백인남자들(Angry white male)’이었다. 미국 중서부 산업 황폐화지역 아빠들의 증오가 이겼다. 트럼프의 여성혐오 성향에도 지지층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여성을 향한 막연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트럼프 지지자의 상당수는 여성이 사회적 지위상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평등하게 대우받는다고 불평한다.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의 곤란과 좌절의 원인을 제공한다고 여기고 증오한다. 이민자와 무슬림,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태도 역시 비슷한 심리기제에서 적대적이다.
사커맘이 미국 대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빌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한 1996년 대선에서였다. 클린턴은 빠듯한 살림살이와 일, 육아에 허위허위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러면서도 주말이면 미니밴에 아이들을 싣고 그라운드를 다니는 사커맘들로부터 과반의 표를 얻어 승리했다. 미국 보수주의 혁명(1994년 중간선거) 2년 뒤여서 불리했던 대선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영어협회(ADS)가 그해 ‘올해의 단어’로 사커맘을 선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커맘은 평범한 여성 유권자의 표심을 대변하는 동시에 선거 때마다 지지정당을 바꾸는 부동층(swing voters)의 대명사로도 쓰였다. 견고한 증오로 무장된 성난 백인 남자들에 비해 응집력도 떨어진다. 미국은 트럼프를 3년째 겪고 있다. 그사이 미투(MeToo) 열풍이 있었고, 성적소수자와 이민자, 무슬림에 대한 감성지수도 달라졌다. 반면에 트럼프의 반자유무역협정(FTA), 반동맹, 반중국 정책과 제스처에 환호하는 계층도 있다.
워싱턴포스트-ABC 방송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44%였으며, 그중 경제부문 지지율(51%)이 가장 높았다. 여성 이슈에 대한 지지는 32%로 낙태 이슈와 동률을 이뤘다. 지구온난화(29%) 다음으로 낮았다. 젠더 문제로 본다면 내년 미국 대선은 성난 백인 남성들과 성난 사커맘의 대결로도 볼 수 있다. 백인 남성들의 증오와 사커맘들이 각각 품고 있는 분노의 강도에 의해서도 갈라질 것이다. 사커맘들이 키워낸 세계 최강의 미국 여자축구팀 개가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내년 미국대선의 관심 포인트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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