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된 증조부 임천택의 묘소를 찾은 증손자들. 왼쪽부터 카를라, 가브리엘라, 펜한. 카를라는 교육 소감문에 “한국에 처음 온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쿠바에 돌아가서도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전통과 자부심을 지키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뉴스도, 역사도 결국은 이야기이다. 한번 풀어낸 뒤 흩어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가슴 속 어딘가 쟁여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사람에 대한 기억 역시 세월이 지나면 흩어진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18년 전, 쿠바에서 처음 만났던 헤로니모(Jeronimo) 임 김 선생(1926년 생·2006년 작고)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오감 중에서도 냄새가 특히 기억 복원에 좋다고 하던가.

“시가를 피우려면 3가지가 있어야 해. 우선 안락한 소파가 있어야 하고, 전축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걸어놓아야지. 또 한가지, 좋은 친구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준비가 되는 거야.” 2001년 말 아바나 외곽 귀테라스의 자택에 초대받아 한국식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였다. 거실로 자리를 옮겨 선생이 건넨 게 피델 카스트로가 생전에 즐겨 물었던 코히바(Cohiba)였다. 다탁 위에는 럼주와 에스프레소를 절반씩 섞은 음료가 놓여 있었다. 멀리 조국에서 온 기자를 앉혀 놓고 선생이 꺼내놓은 것은 ‘아버지’였다.

광복절 이틀 뒤인 지난 17일 공주대 옥룡캠퍼스에서 두달째 재외동포 한국어 수업을 받고 있던 선생의 손녀들을 만났다. 가브리엘라(23)와 카를라(18). 그들이 선물로 가져온 것이 코히바였다. 쿠바 한인들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온 재미교포 조셉 전(전후석)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헤로니모를 찾아서>의 일부가 지난 광복절에 KBS 전파를 탔다. 코히바와 선생의 기억이 한목에 떠올랐다. ‘아베의 도발’ 탓에 어수선하게 보낸 광복절이 차분하게 정리되는 듯했다.

'아바나의 택시운전사'  헤로니모 선생이 2001년 말 아바나 시내에서 손자 넬슨과 함께 포즈를 취해주었다. 선생은 은퇴 뒤 자신의 라다 승용차로 개인(파르티쿨라르)택시 영업을 하셨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선생은 책장 자물통을 열어 10여개의 훈장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쿠바 혁명 주역이었던 그는 쿠바 정부의 최고 훈장만 두 번 받았다. 선생은 그러나 자신이 받은 훈장들을 옆으로 밀어냈다. 훈장 더미에서 찾아 보여준 것은 아버지(임천택·1985년 작고)의 훈장이었다. 1997년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이었다.

마탄사스의 한 야산에서 처음 본 에네켄(Henequen·용설란)은 얼핏 큰 화초 같아 보였다. 하지만 쿠바 한인들에게 에네켄은 눈물이었고, 땀이었으며, 밥이었다. 선생은 13세 때부터 부친을 도와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다. “생각도 하기 싫은 지옥이었다. 매일 새벽 3, 4시에 일어나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키 낮은 유년생 에네켄 가지를 자르려면 온종일 허리를 굽히고 일해야 했다. 에네켄은 돌밭에도 뿌리를 내린다. 억센 줄기를 다듬으려면 푹푹 찌는 열대의 날씨에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가시는 살을 파고들었다.” 쿠바의 최하층민들도 꺼렸던 에네켄 농장의 노동. 한인들은 그 속에서도 조국 독립을 열망했다.

끼니 때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의 성미(誠米)를 거뒀다. 천도교 방식이었다. 목돈이 되면 아바나의 중국은행 또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를 통해 상하이와 충칭의 임시정부에 보냈다. 아버지는 모금운동을 주도했던 쿠바 이민 1세대의 한명이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기록을 남긴 덕에 뒤늦게나마 한국 정부의 훈장을 받았다. 아버지의 훈장은 과연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2001년 말 쿠바 아바나 인근의 자택에서 아버지 임천택의 훈장을 꺼내 보이고 있는 헤로니모 선생.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버지는 3세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멕시코로 옮겨왔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제물포에서 배에 오른 1031명 중 한 명이었다. 1905년부터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4년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조국은 일제 치하가 됐다. 멕시코에 눌러앉았다. 세계 1차대전이 끝나자 국제 설탕값이 급등했다. 사탕수수밭에서 더 나은 생활을 꿈꾼 한인 288명이 쿠바 동북단 마나티항에 도착한 것은 1921년 3월이었다. 이번에도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깨졌다. 설탕값이 폭락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나티에는 모기가 들끓고 마실 물도 충분치 않았다. 한인들은 결국 에네켄 농장으로 돌아갔다. 아바나와 인근 마탄사스, 중서부 카르데나스 등지로 흩어졌다. 쿠바인들은 눈이 찢어진 동양인들을 통칭해서 “치노(Chino·중국인)”라고 불렀다. 한인들은 그때마다 “코레아노(Coreano·한국인)”라고 정정케 했다. 마나티에 도착한 지 3달 만에 북미 국민회 쿠바 지방회를 설립했다. 1922년 마탄사스에 민성(民成)학교를, 이듬해 카르데나스에 진성(進成)학교를 세워 한글 교육에 나섰다. 김세원, 박창운, 호근덕, 이승준, 이세창 등 많은 분들이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약했다.

 

아버지는 교사이자 농부였다. 그 역시 고된 노동의 한쪽에서 한인회 활동에 뛰어들었다. 태평양전쟁 당시인 1942년 쿠바의 보수 신문 델라 마리나가 “코레아노는 하포네(Japones·일본인)와 마찬가지”라고 왜곡보도했다. 한인들은 “우리는 하포네가 아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그러나 한국은 아버지의 조국이었을 뿐 ‘청년 헤로니모’의 조국은 쿠바였다.

아바나 법대에 입학하면서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에네켄 농장과 아바나 차이나타운에서 일하면서 공부를 하던 그는 ‘운동권 학생’이 됐다.

지난 8월17일 대전 국립묘지를 찾은 임천택 선생의 증손자들이 방명록에 소감을 남기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은 헤로니모의 손녀 가브리엘라.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졸업을 1년 앞둔 1949년 학업을 접고 오르토독소(ortodoxos)당에 입당, 직업혁명가로 이후 10년을 지냈다. 법대 동기인 피델이 졸업 뒤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저항해 씨에라 네바다 지역에서 무장 게릴라 활동을 할 때 헤로니모는 점조직으로 운영되던 마탄사스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했다. 헤로니모는 “총은 갖고 있었지만 사용한 적은 없다. 대중 선전전에 주력했다”고 회고했다. 맏아들의 성공을 기대했던 아버지에겐 늘 죄송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슨 일인가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셨겠지만, 1959년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었다.

혁명 뒤 아바나 경찰청에서 복무한 뒤 공기업을 거쳐 1963년부터 산업부 에스페시알리스타(스페셜리스트)로 3년 일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우리 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했던 체 게바라가 장관이었다. 유엔총회 연설차 뉴욕으로 떠나는 게바라의 출장 가방에 담긴 양말들은 구멍이 나 있었다. 선생은 피델보다 게바라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식량농업부 구매국장(대외 직함 차관)을 끝으로 1988년 은퇴했다.

1967년 북한 정부 초청으로 조국을 처음 방문했다. 금강산은 ‘아찔한 아름다움’으로 새겨졌다. 아버지는 1985년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헤로니모는 아바나 귀테라스의 민선시장에 당선돼 1995년까지 3년 임기를 채운 뒤 공직생활을 정리했다. ‘아버지의 조국’은 그 끝에 찾아왔다.

쿠바 혁명정부는 소수민족 차별을 없앴지만, 동시에 민족색도 없앴다. 교민회가 사라진 것이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렸던 한민족제전에 초대받고 아버지의 조국과 다시 해후했다. 아버지의 공훈을 인정해준 것은 남쪽이었다. 그때서야 생전에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아버지 말씀을 안 들은 것이 후회됐다. 한인회도 다시 만들고 싶었다. 아버지가 남긴 32쪽의 ‘쿠바 이민사’는 미완성이었다. 마탄사스 종합대 교수였던 여동생 마르타 임(81)이 부군 라울 R. 루이스와 함께 12년 동안 현지조사와 자료정리를 거쳐 2000년 <쿠바의 한국인들(Coreanos en Cuba)>로 출간했다. 그해 선생과 함께 쿠바를 횡단했다. 왕복 1,500㎞를 달려 마나티의 ‘쿠바 한인 이주 80년 기념비’를 찾았다. 하지만 한인회는 북한과의 관계를 우려한 쿠바 정부의 반대로 만들지 못했다. 헤로니모 사후 ‘쿠바한인후손회’가 발족돼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항구 기능을 잃어버린 폐항. 쿠바 동북단 마나티에 2001년 3월25일 쿠바 한인 이민 80주년을 맞아 세운 기념비. 두개의 기둥은 한지붕 아래 쿠바와 한국을 의미한다. 조국이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웠다.  헤로니모 선생이 기념비 컨셉을 잡으셨다.  

 

2009년 아바나를 다시 찾았을 때 헤로니모는 이미 가고 없었다. 2006년 심장수술을 받던 중 갑자기 돌아가셨다. 건장한 체구에 타고난 건강을 잘 관리했던 분이다. 가족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일종의 의료사고였다. 부인 크리스티나 장(91)은 쿠바 혁명의 주역답지 않게 너무도 소박한 묘지에 모셨다며 안타까워했다.

2001년 현지에서 처음 만난 헤로니모 선생은 당시 부친을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 묘역에 모시자는 한국 정부 제안을 놓고 고민하고 계셨다. 한국에 모시면 아무래도 자주 찾아뵙지 못할 것이라는 염려가 앞섰다. 그러나 자신의 뜻보다 부친의 유지를 앞세워 2004년 이장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셨던 땅이지 않나. 임천택은 헤로니모를 비롯해 모두 9명의 자녀를 남겼다. 자손들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대전으로 향한다. 재작년엔 헤로니모의 손자 넬슨 임 로살레스(32)가, 올해는 손녀들과 손자 펜한 엔 임(23)가 함께 성묘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가브리엘라는 백신 개발 연구소에서 올가을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카를라(18)는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예술품 복원을 전공할 예정이다. 펜한은 인공지능(AI)에 관심이 많은 컴퓨터공학과 졸업반이다.

임천택 선생의 약력 및 가족. 장남이 헤로니모(임은조)이다. 

‘헤로니모’는 한 사람이 아니다. 임천택 부자 이야기는 좀 더 일찍 발굴됐을 뿐이다. 에네켄 이민 세대 중 훈장이 추서된 서훈자는 쿠바 26분, 멕시코 46분이다. 하지만 후손들에게 전달된 훈장은 쿠바 10분, 멕시코 3분에 불과하다.

디아스포라 정치학을 연구하고 있는 전남대 김재기 교수는 “당사자들은 오래전 돌아가시고 2세들도 많이 안 계시다. 하루빨리 후손을 찾아내 귀중한 서훈을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누군가에게 지독한 그리움의 원천이다. 마음의 탯줄을 매어놓은 ‘말뚝’이기도 하다. 쿠바에는 이제 100% 한국인(puro)이 줄어들고 있다. 50%, 25%, 12.5% 한국인이 더 많다. 외모만 보면 영락없는 쿠바인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조국의 말뚝에 매인 채 코스모폴리탄으로 녹아든 한국인들이다. 매년 8월15일에서 보름은 광복절에서 국치일(29일)까지 되짚어 기억하는 여정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다.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할 때 분재(盆栽)된 한인 후손들은 많다. 조국은 이들에게 충분히 보훈하고 있는가.

Posted by gin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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