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76). 미국 민주당 주류가 내년 대선 후보로 점찍어 놓은 거물급 정치인이다. 나이 서른에 처음 연방상원에 진출했고, 마흔 중반이던 198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데뷔했다. 2008년 대선에선 후보로 나섰다가 일찌감치 포기하고, 버락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서 8년 동안 부통령직을 수행했다. 바이든은 인간성이 묻어나는 배경과 털털한 성격으로 대중에게 편안함을 주는 정치인이다.
바이든은 노동자 가정 출신이다. 선친은 바이든이 태어날 무렵 사업 실패로 처가살이를 해야 했다. 바이든이 어린 시절엔 안정적인 직업이 없었다.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자리 잡으면서 간신히 중산층에 복귀한 보통사람이었다. 바이든이 유독 노동자 친화적인 데에는 성장배경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보통사람들의 삶이 파괴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부통령에 취임한 그는 ‘사이다 발언’을 종종 내놓았다. “2000~2007년 노동생산성은 20% 올라갔는데 노동자 가정의 수입은 매년 2000달러씩 줄었다”고 통탄했다. 수백억달러의 보너스 잔치를 벌인 월가 금융공학자들을 “교도소에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격분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실업이 미국의 정신을 고갈시키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던 그는 부통령이 아닌, 노동조합 간부로 보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친기업적인 환경 조성에 나서던 무렵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부축하기 위해 갖가지 비상경제대책을 내놓았으며 그 한 축이 바로 ‘흙수저 정치인’ 바이든이었다.
트럼프, 녹취록 공개 ‘승부수’
논란 들출수록 스캔들 부각
‘도덕성’ 내세운 바이든에 ‘타격’
미국 연방하원이 지난 2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에 돌입했다. 특별검사까지 등장했지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던 2년 전 탄핵 움직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의 지난 7월 통화 녹취록이 결정적인 증거(smoking gun)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가 원조 공여를 조건으로 바이든 부자가 관련된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는 게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필두로 민주당이 내세우는 탄핵 사유다. 하지만 결말이 뻔한 드라마는 흥미를 주지 못한다. 트럼프 탄핵 논의가 어떤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더라도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한들 상원의원 3분의 2의 찬성이라는 턱을 넘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원은 235석 대 198석(무소속 1, 공석 1석)으로 민주당이 우세하지만 상원은 53석 대 45석(무소속 2석)으로 공화당이 앞선다.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끌어내려면 공화당 의원 20명 정도가 탄핵에 찬성해야 한다. 초현실적인 시나리오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탄핵 관련 기사들이 많은 경우 “○○할 수도 있다”는 맥없는 예상으로 끝나는 이유다.
대통령 탄핵은 미국 의회가 행정부를 상대로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을 할 수 있는 고유권한이다. 미국 헌법 2조는 탄핵 사유로 ‘반역과 뇌물수수 또는 중죄와 비행(misdemeanor)’ 등 4가지를 들고 있다. 이 중 ‘비행’은 해석 여지가 가장 넓은 항목이다. 의회는 굳이 대통령의 특정 행동에 씌운 혐의를 입증할 필요가 없다. ‘비행’으로 묶어 표결하면 그만이다. 민주당으로선 상원에서 부결될지언정 하원 표결 과정에서 대외원조를 미끼로 내년 대선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높은 바이든에게 타격을 입히려 했다는 트럼프의 흉계를 최대한 홍보할 수 있는 기회다. 문제는 탄핵이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미국 여론은 대체로 탄핵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로이터·입소스의 24일 여론조사에서도 트럼프에 대한 탄핵 찬성 응답은 37%에 불과했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얻었던 지지(48.2%)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특검 수사가 시작된 1994년부터 5년 가까이 탄핵 절차가 진행됐는데도 지지율이 65~73%에 달했다. 여론의 대다수가 트럼프 탄핵을 지지하지 않는 한, 트럼프 탄핵은 정치적 소란으로 끝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995년 당시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공화당)은 ‘공화주의 혁명’으로 하원을 장악한 기세로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을 집요하게 밀어붙였지만 부메랑을 맞았다. 화이트워터 부동산 개발 의혹에서 시작해 백악관 직원 무단해고, 연방수사국(FBI) 수사파일 부당 사용, 파울라 존스 스캔들 및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까지 온갖 죄목을 들이댔지만 여론이 클린턴 편이었기 때문이다. 깅그리치는 1998년 하원에서 탄핵안을 가결했지만,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 그해 중간선거 뒤 하원의장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깅그리치는 24일 뉴욕타임스에 펠로시 의장이 정확하게 1998년 자신이 걸었던 행로를 되밟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또 다른 위험은 유력한 대선 후보 바이든이 입게 될 외상이다. 바이든 부자의 우크라이나 의혹이 들춰질수록 대권주자로서 그의 자질과 덕목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지난 4월 ABC방송 인터뷰 도중 대선운동의 슬로건이 있느냐는 질문에 ‘미국을 다시 도덕적으로!(Make America Moral Again!)’라고 답했다. 트럼프의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패러디한 말이었다. 바이든은 이어 자신이 대선 출사표를 던진 가장 큰 목적은 ‘미국 영혼의 복원’이라면서 트럼프가 떨어뜨린 국가적 존엄과 명예를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미국 척추인 노동자 계급과 중산층을 복원하겠다고도 했다. 이런 그에게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정치적 자산으로 꼽은 ‘도덕’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1991년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관 지명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애니타 힐 변호사의 주장을 묵살했고, 여러 여성들과 불필요하게 신체 접촉을 했다는 비난과는 성격이 다른 문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에서 포퓰리즘이 창궐하는 가장 큰 이유의 한 가지는 바로 기성제도(establishment)의 엘리트 정치에 대한 반감이다. ‘워싱턴 밖’의 천박한 장사꾼 트럼프가 ‘워싱턴 안’의 똑똑하고 잘난 엘리트들을 제치고 백악관에 입성했던 비결이다.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엘리트 정치인들은 기득권을 대물림할 뿐 보통사람들의 분노에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가정에서 자랐지만 6선의 상원의원에 부통령 출신인 바이든은 엘리트 계층의 대표주자이다.
탄핵 절차 돌입이 펠로시의 승부수라면, 젤렌스키와의 통화 녹취록 공개는 트럼프의 승부수다. 트럼프 탄핵이 민주당의 자충수가 될 것이라는 깅그리치의 저주 섞인 전망을 무시하더라도 트럼프가 녹취록을 공개한 셈법은 따져볼 필요가 있다. 25일 공개된 녹취록에 트럼프가 바이든 관련 부패사건 수사를 권유하는 대목은 분명히 적시됐지만, 미국의 원조를 그 대가로 한다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여론의 관심이 미지근한 상태에서 진실을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의 논란이 오갈수록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부각될 수밖에 없다.
미 언론, 민주 대선 후보 워런에
“이번 사태 최고 수혜자 될 것”
각종 여론조사 6위 그쳤던 워런
최근 일부 조사선 바이든 제쳐
월스트리트저널(WSJ) 논설위원인 홀맨 젠킨스는 바로 이 점을 짚었다. 젠킨스의 24일자 칼럼 ‘우크라이나는 엘리자베스 워런에게 간다’는 제목부터 민주당 워런 상원의원(70)이 이번 사태의 최고 수혜자가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젠킨스의 지적대로 바이든이 부통령 재직 당시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의 교체를 요구한 것은 문제가 안된다. 우크라이나 가스회사가 바이든의 아들을 이사로 선임한 것 역시 탓할 수 없다. 유력 정치인 자식들이 부모의 후광을 입어 부유한 삶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는 게 미국 정치풍토에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의 자식들은 꿈도 꾸지 못할 ‘내부자 거래’인 것은 분명하다.
가족이 각종 이권사업에 깊숙이 개입한 것은 트럼프가 훨씬 더하다. 하지만 수없이 드러난 트럼프의 비행은 당연시되는 반면에 도덕을 표방한 바이든의 비행은 지탄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트럼프 시대의 모순이다. 더구나 ‘미국의 영혼’을 복원하겠다는 도덕의 수호자, 바이든이 아니던가. 젠킨스는 “유권자들은 우크라이나(스캔들)에 대해 자세히 알려 하지 않겠지만, 선출된 권력자의 가족이 미국의 우크라이나 정책에서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챌 것”이라고 지적했다.
엘리트 계층의 내부자 거래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불만은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캠페인의 공략 대상이었고, 2020년 선거에서 바로 워런이 공략하고 있는 대상이다.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트럼프를 넘어 바이든을 공격하고, 다시 바이든을 넘어 워런에게 기회가 된다는 해석이다. 워런의 인디언 혈통을 문제 삼아 ‘포카혼타스’라고 조롱하며 만만한 상대로 여겨온 트럼프다. 트럼프가 여기까지 수를 읽고 녹취록을 공개했다면 동물적인 본능으로 자신의 살길을 모색하는 동시에 상대의 무덤을 준비하는 무서운 현실정치인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2월 각종 여론조사에서 바이든(33%)은 물론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11.8%)을 비롯한 다른 후보들에게 뒤져 민주당 후보들 중 6위(4.3%)에 머물렀던 워런은 무서운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13일부터 24일까지 실시된 8개 여론조사를 평균한 리얼클리어폴리틱스 집계에서 21.4%의 지지율로 바이든(29.0%)을 뒤쫓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유고브, 퀴니피액 조사에선 각각 1, 2%포인트 차로 바이든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샌더스 의원의 ‘민주 사회주의’는 워런의 ‘책임지는 자본주의(Accountable Capitalism)’에 밀린 지 오래다. 선거는 바람이자 열기다. 워런은 16~23일 WSJ·ABC방송 여론조사 결과 유권자들의 후보에 대한 열성도에서 35%로 샌더스(25%)와 바이든(23%)을 멀리 제쳤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유권자들에게 편안한(comfortable) 후보 항목에선 35%로 바이든(41%), 샌더스(37%)에 다소 뒤졌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워런의 특징으로 '맥주 한잔을 함께 마시기는 다소 불편하지만, 셀피 사진을 함께 찍고 싶은 정치인'이라고 표현했다. 트럼프와 워런 중 과연 누가 민심의 향방을 정확히 포착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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