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핵잠수함 유리 돌고루키호와 툴라호가 지난 8월24일 북극해에서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러시아 국방부는 북극해와 바렌트해에서 실시한 훈련 중 ICBM 불라바(Bulava)와 시네바(Sineva)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EPA연합뉴스

 

“떠다니는 구름이 시야를 가린다고 해서 두려워 말고….” “구름이 어지럽게 흩날려도 여전히 태연해야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일 중국 중앙당교 중·청(중년·청년간부) 양성반 개강식에서 한 연설은 투쟁으로 시작해 투쟁으로 끝났다. 왕안석의 시구와 마오쩌둥의 칠언절구를 삽입했지만 연설의 핵심은 간단없는 투쟁이다.

시 주석은 “우리나라의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위해하는 각종 위험과 도전에 견결히 싸울 것이고, 게다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가 강조한 최종 목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었다. 중국 입장에서 위협은 태평양 건너편에서 온다. 지난달 초 관세에서 환율로 전선이 확대된 미·중 무역전쟁은 그나마 협상 테이블 위에서 속도가 조절될 수 있다. 극적인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다. 서로 주고받을 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협상 테이블조차 마련하지 못한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드리워지고 있는 가장 짙은 먹구름의 정체는 미사일이다.

■ 미사일의 국제정치학

눈부신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아직 군사적으로 미국에 필적할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해서 국방의 큰 그림으로 선택한 것이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이다. 두가지 모두 21세기에도 압도적인 미국의 해군력과 무관하지 않다. 해군력과 공중공격 능력에서 열세인 중국은 미사일 배치 및 해상접근 거부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중국은 대함 탄도미사일 DF(東風)-21D와 지대지 미사일 DF-26 등을 개발, 실전배치해왔다. 사정거리가 최대 3000㎞에 달하는 DF-21D는 미국 항공모함과 한·일 내 미군기지를 겨냥한 것이고, 최대 5500㎞인 DF-26은 괌의 미군기지를 사정권 내에 두고 있다.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에서는 ‘전함 부딪히기’ 전술로 미 해군의 헤게모니에 도전장을 내고 있다.

미국의 2018년 핵태세검토보고서(NPR) 수록된 2010년 이후 각국의 핵무기 운반수단(미사일) 추가 개발 현황. 러·중에 이어 운반수단을 많이 개발한 나라로 등재한 북한은 화성-12·13·14·15형 등 대륙간탄도미사일급 장거리 로켓 5종을 포함해 총 9종의 육상 및 2종의 해상발사 수단을 확보한 것으로 집계됐다. 러시아는 14종, 중국은 9종을 늘렸지만, 미국은 공중발사 수단을 1종 늘린 것으로 표기했다. 미국이 중거리핵전력(INF)조약을 파기한 근거이자, 중거리 미사일과 소형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을 선언한 보고서다.

 

중국의 전략은 지난달 2일 미국이 기어코 미·러 중거리핵전력(INF)조약을 파기함에 따라 암초에 부딪히게 됐다. 시진핑 주석이 승진을 앞둔 당 간부들을 모아놓고 투쟁을 다짐한 배경이다.

1987년 미·소가 맺은 INF는 사거리 500~5500㎞의 지상발사형 중(장)거리 순항·탄도미사일 금지협정이다. 미국이 INF 족쇄에서 풀려나 중거리 핵전력을 개발, 배치한다면 중국이 미사일로 유지해온 억지력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해리 해리슨 주한 미국대사가 인도·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작년 4월 의회 청문회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중국 미사일 전력의 95%가 INF에 저촉된다. 미국은 중국의 위협 인식을 되레 부추기고 있다. INF 파기 다음날 아시아 순방 중이던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몇달 내로 아시아 지역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보름쯤 뒤인 16일엔 캘리포니아주 샌니컬러스섬에서 중거리 순항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

동아시아에서 미사일 개발 우등생은 바로 북한이다. 2018년 미국 핵태세검토(NPR)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2010년 이후 모두 7종의 지상발사 미사일을 개발, 중국(5종)과 러시아(5종) 및 미국(0종)을 앞질렀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괌을 사거리로 하는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시험은 잠정 중단했지만 단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아예 내놓고 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석달 동안 모두 8차례의 단거리 미사일 및 초대형 방사포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안보리 대북 제재 위반이건만 트럼프 행정부는 묵인한다는 제스처로 일관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두고 “북한이 판문점에서 약속한 것은 핵실험과 ICBM·IRBM 시험발사 중단”이라고 공개하며 “(단거리 미사일 시험은) 어느 나라나 하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한·미 간 북한 단거리 미사일 발사에 따른 안보인식의 차이를 공식화한 셈이다. 북·미 대화가 진척되지 않고 공전상태가 장기화한다면 갈수록 벌어질 인식의 격차다.

■ 미·중·러 갈등의 핵, 한반도

북한이 지난 8월11일 함경남도 함흥 일대에서 단거리 발사체를 발사하고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신무기’라고만 밝혔지만, 신형 전술 지대지 탄도미사일로 추정됐다. 로이터연합뉴스

 

한국 국방부는 에스퍼 장관의 발언에 대해 “논의도 검토 사실도 없다”고 즉각 부인했다. 하지만 중국 또는 러시아를 겨냥해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한다면 유효 사거리 안에 있는 한국과 일본이 유력한 후보지가 될 수밖에 없다. 북·중·러는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은 한국을 상대로 ‘스스로 총알받이 노릇을 하는 어리석은 자멸행위’(조선중앙통신 8월14일)라고 경고했다.

푸충 중국 외교부 군비통제국장은 지난달 6일 외신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과 일본, 호주를 콕 집어서 미국 미사일을 배치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경고했다. 그는 “어느 나라도 중국 문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도 미국·러시아와 함께 군축체제를 새로 짤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싹을 잘랐다. 세르게이 라브코프 러시아 외교부 군비통제 담당 차관도 “미국이 새로운 미사일을 아시아에 배치하면 그 위협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대응조치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신형 중거리미사일을 개발, 배치한다면 한반도는 북한 미사일의 기존 위협에 더해 미·중·러의 군비경쟁이 중첩되는 지역이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군사전략(그런게 있다면)이 낳은 최악의 부산물은 중·러 간 안보협력을 강화시켜놓은 것이다.

지난 7월23일 동해상에는 동아시아 4개국 공군기가 동시에 떴다. 중·러 공군기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침범한 데 이어 러시아 공군기가 독도상공을 정찰했다. 한국 공군의 K-15K, KF-16기는 360여발의 경고사격을 했다. 중국은 “방공식별구역은 영공이 아니다”라며 무시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 전투기도 발진했다.

중·러와 미국이 서로 상대 위협을 빌미로 군비를 확충하는 경쟁이 계속되면 중·러의 군사행동은 ‘미래의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더 자주 일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최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미·일 지식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문제해결 시점을 지금이 아닌 ‘이후’로 제시했다.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우대국) 제외,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중단을 주고받은 한·일 갈등에 대해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아베 이후’에나 해결에 착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역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미루되 아베 시대에는 한·일 양국 국민들 사이에까지 적의가 생기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고언이었다. 중국과 북한은 한·일 관계 악화에 환호하고 있다.

미국 국방부가 지난 8월18일 캘리포니아주에서 지상형 중거리 순항미사일을 시험발사하고 있다. 미국의 중거리미사일 시험발사는 1987년 미·러 중거리핵전력 조약 체결 이후 처음이다. 로이터연합뉴스

 

국제정치학계에서 현실주의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와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교수의 세계관은 확연하게 달랐다. 하지만 양자 공히 작금의 악화되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근본적인 해법은 ‘트럼프 이후’에나 모색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 안보상황에서는 1년 후도 먼 시간이다. ‘아베 이후’나 ‘트럼프 이후’에도 기약은 없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한·일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은 해당 지역 주둔 미군과 한국, 일본 등 동맹국 방어에 관한 것”이라면서 벌써부터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

월트 교수는 솔직하게 미국의 본심을 드러냈다. 트럼프가 동맹국들을 공공연하게 무시함으로써 미국 안보이익의 근간인 동맹관계가 느슨해졌다고 한바탕 비난을 쏟아낸 그는 중거리 미사일 배치 필요성을 묻자 차갑게 돌변했다. “미국이 (결정에 앞서) 동맹국들의 처지를 고려해야 한다”면서도 “한국 역시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거리 미사일이 한국의 안보를 강화할지에 따라서, 다시 말해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배치하라는 말이었다. “중국이 두려워 한국의 이해가 아님에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친절하게 덧붙였다.

중거리 미사일 배치가 중국에 위협을 제기함으로써 군비강화의 악순환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아이켄베리 교수는 한·미 동맹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할 것을 해법으로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동맹이 흔들리면 한국이 자칫 동아시아의 흔들리는 (군사적) 균형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중국의 094형 잠수함발사9SLBM)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장착한 진(Jin)클래스 잠수함. 중국 해군이 촬영한 사진으로 미국의 2018년 핵태세보고서가 소개했다. 

미국의 핵전략에 동조해 북·중·러와의 새로운 분쟁에 연루될 것인지, 동맹으로부터 방기 위험을 감수할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과 박정현 연구원이 더힐 기고문에서 지적했듯이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을 곤혹스럽게 했던 ‘전략적 유연성’과 유사한 딜레마다. 전략적 유연성은 양안 분쟁에 주한미군이 파견됨으로써 한국이 연루될 가능성만으로도 극심한 반발과 우려가 있었다. 이번에는 북·중·러에 직접적 위협이 될 수 있는 공격용 미사일 배치가 걸려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을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가려는 북한을 더 멀리 보낼 수도 있다. 남북이 언제 마주 앉았었는지 아득하다.

동맹은 가도 지리적 조건은 바뀌지 않는다. 한반도 거주민이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는 핵심가치는 평화다. 미국 스스로 동맹을 금전적 흥정 상대로만 여긴다면 ‘평화’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구름이 시야를 가려도 두려워 말고(不畏浮云遮望眼)’, 투쟁해야 할 당사자는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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