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이 서로 날선 ‘말의 전쟁’을 재개하면서 세밑 한반도 안보 기상도가 뿌옇다. 분명한 사실은 12월31일이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바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요구하며 제시한 시한이다. 그가 올해 신년사에서 거론한바,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는 새로운 길’과 맞물려 총천연색 분석과 전망, 견해를 낳고 있다. 미국은 “목표가 있을 뿐 시한은 없다”며 김 위원장의 시한을 무시한 채 대화 제의를 거듭하고 있다. 동시에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같은 ‘고강도 도발’을 할 경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 제재는 물론 물리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일각에서 미국의 군사행동을 비롯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놓는 근거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북한은 미국이 셈법을 바꿀 것을 요구해왔다. 10월5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실무접촉 뒤 김명길 북한 외무성 순회대사는 한·미 합동군사연습 중단과 한반도 주변 첨단 전쟁장비 반입 금지 및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뒤 미국이 추가로 발동한 15차례의 제재 취소를 대화 재개 조건으로 걸었다. 한·미는 이 중 한 가지에 대해 성의를 보였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11월13일 당초 같은 달 말 실시 예정이던 한·미 연합공중훈련의 조정 여지를 밝히자 북한은 반겼다. 김영철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은 다음날 담화를 통해 “대화의 동력을 살리려는 미국 측의 긍정적인 노력의 일환”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북한은 ‘한·미 훈련의 완전한 중단’을 강조했지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전엔 어떠한 제재도 풀지 않겠다는 미국 입장이 맞서면서 협상은 겉돌았다.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다는 발언은 주로 군복 입은 사람들 입에서 나온다. 박정천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은 지난 14일 담화에서 “우리는 거대한 힘을 비축했다”고 장담했다. 북한 국방과학원이 평북 철산군 동창리 서해위성발사장에서 7일과 13일 실시한 두 차례 ‘중대한 시험’에서 확보한 새로운 기술들이 미국의 핵위협을 견제, 제압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무기 개발에 적용될 것이라고도 밝혔다. 중대한 시험은 미사일 엔진 연소 또는 신형 엔진 개발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창리 위성발사장은 북한이 지난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우선 영구 폐기하기로 했다’고 명시했던 시설이다.
미국 국방부는 아예 북한이 연내 ICBM 발사와 같은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을 것을 전제한다. 찰스 브라운 태평양 공군사령관이 대표적이다. 그는 17일 워싱턴 언론간담회에서 북한이 거론한 ‘성탄절 선물’은 “일종의 장거리탄도미사일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이 전략무기들을 한반도 주변에 전개했던 “2017년에 (검토)한 많은 것들의 먼지 털어내고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는 말에 뼈를 심었다.
가장 직설적인 말은 군대도 안 갔다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입에서 나왔다. 트럼프는 3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가 열린 영국 런던에서 “우리가 (북한에)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사용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정은 위원장을 두고 “로켓맨(rocket man)”이라는 호칭을 다시 호출했다. 북한이 그 직후 동창리 발사장을 다시 가동한 것은 트럼프의 ‘도발’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북한이 고강도 도발을 하더라도 군사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는 미국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군사행동은 자칫 체제 존속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브라운 사령관이 소환한 2017년 초부터 미국은 대략 20개의 군사적 옵션을 검토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대북 심리전에서부터 사이버 공격, 전략자산 전개 등이 포함된다. 강도가 높은 옵션으론 영국 텔레그래프와 파이낸셜타임스 등의 보도로 알려진 ‘코피 작전(Operation bloody nose)’이 있었다.
코피 작전은 일회성 공격으로 상대를 위협해 협상장으로 끌어낸다는 복안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장 또는 발사대 위의 미사일, 무기고 등이 소규모 제한 공격의 과녁이 될 수 있다. 제임스 매티스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서울에 큰 피해를 주지 않을 군사옵션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됐다가 낙마한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지난해 1월30일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자신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제한적 군사행동에 반대했다면서 코피 전략의 존재를 확인했다. 한반도 거주민들이 몰랐던 위기는 또 있었다. CNN 국방해설가 피터 버건은 트럼프가 2017년 9월 주한미군 가족들의 소개 지시를 내렸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이달 초 펴낸 책 <트럼프와 장군들: 혼돈의 비용>에서 공개된 사실이다. 실행됐다면 가장 확실한 대북 공격 신호였을 것이다.
다행히 아직까지 ‘한반도 위기론’은 워싱턴과 서울에서 초점을 받고 있지 않다. 내년 11월 미국 대선과 맞물려 북·미 대화가 장기간 공전하면서 어느 정도 긴장이 유지되더라도 유사시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윌리엄 번 미국 합참 부참모장(해군 제독)이 말했듯이 “희망은 전략이 아니다”. 방금 백악관 상황실 회의에서 나온 양 ‘전쟁’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한·미 양국 전직 관료들이 나섰다. 그레이엄 앨리슨 전 미국 국방부 정책·계획 담당 차관보(하버드대 교수)와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이다.
앨리슨 교수는 12일 ‘일본 아카데미아’가 도쿄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현재의 한반도 상황을 “매우 위험하다”고 진단한 뒤 일본과 중국도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을 즉각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그는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북한이 설정한 연말 시한이 지나가고 북한이 탄도미사일 또는 핵실험을 재개하면, 2017년 11월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대나 핵심 군사시설을 공격해 전쟁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가정이다. “50%는 안돼도 꽤 큰 가능성”이라고 부연했다. 패권국과 신흥국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투키디데스 함정’을 분석틀로 전쟁의 국제관계를 읽는 그다운 주장이다. 저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미·중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될 운명을 짚었다. 미국 내셔널인터리스트가 작년 12월 게재한 ‘2019 나의 북한 전망’ 특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북·미) 협상이 붕괴되고, 트럼프가 자신이 제압당했고 모든 판돈이 떨어졌다고 결론 내린다면, 북한이 다시 ICBM을 발사하고, 그것이 제2의 한국전쟁으로 이어질까”라는 의문형으로 전쟁 가능성을 글에 남겼다.
천영우 이사장은 17일 유튜브 방송 ‘천영우TV’의 ‘미국의 대북 공격 시나리오: 김정은을 살려둘 것인가’를 통해 전쟁 가능성을 설파했다. 그는 16분40초 방송의 도입부에 “북한이 ICBM을 발사해도 트럼프가 무력으로 대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무력대응 가능성이) 1993년 1차 북핵 위기 때보다는 높다”고 주장했다. 그 역시 근거를 제시한 건 아니다. 그가 거론한 1차 북핵 위기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폭격 옵션을 검토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 당시 6자회담 수석대표로 외교적 해결 노력을 기울였던 그가, 미국의 대북 공격 가능성을 주장한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천 이사장에게 통화를 청한 까닭이다.
그의 논리는 1993년과 2019년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1993년과 달리 이번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자국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됐기 때문에 미국이 무력대응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높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며 자위권 차원에서 공격할 요인이 성립된다고 본다. “북한의 ICBM 개발은 미국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에, 미국이 핵과 미사일 관련 시설에 제한 공격을 한다면 무력행동에 필요한 국내법적, 국제법적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인공위성을 로켓으로 발사해도 마찬가지다. 실제 켈리 크래프트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11일 안보리 공개회의에서 북한의 ICBM 발사와 장거리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우주발사체(SLV) 발사를 공히 ‘매우 걱정되는 신호들’로 지목했다. 특히 “북한의 ICBM은 미국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미국에 대한 위협임을 분명히 했다.
북·미의 레드라인은 서로 연결돼 있다. 북한의 도발이 저강도에 그칠 가능성 역시 엄존한다. 2017년과 다른 점은 북한이 이미 핵·미사일 능력을 확보했기에 무작정 미국과 충돌하기보다 ‘선’을 지킬 것이라는 전망에 귀가 더 솔깃해진다. 조성렬 국가안보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이 ICBM 또는 괌을 사정권에 두는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와 같이 미국을 위협하는 선은 넘지 않겠지만, SLV를 발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한반도다. 북한이 올해 개발 완성 단계에 진입했다고 밝힌 전술유도무기·대구경 방사포·지대지미사일·초대형 방사포 등 ‘신형 단거리 4종 세트’를 동원해 도발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한반도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는 무기들이다. 내년 7월 말부터 열리는 도쿄 올림픽 시기 긴장을 일본열도까지 확산할 수도 있다. 가장 큰 변수는 트럼프다. 18일 연방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북한의 새로운 도발로 지난 3년의 대북 외교가 실패했음이 분명해진다면, ‘돈’과 ‘표’가 되는 일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 트럼프가 어떤 판단을 할지 예측이 어렵기 때문이다. 더이상 "전쟁만은 안된다"는 호소 만으론 안된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내는 주권국가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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