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의 냉전은 베를린에서 싸워 이겼다. 다가오는 중국과의 냉전 역시 베를린에서 싸워 이기게 될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난해 여름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내놓은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여부가 불분명하던 그즈음 다소 생뚱맞게 읽혔다. 독일, 특히 올가을 총선에서 16년째 유지해온 총리직을 내놓겠다고 선언한 앙겔라 메르켈(67)의 독일은 조 바이든 행정부 취임을 전후해 국제정세의 변화를 가늠하는 이정표가 된 것 같다. ‘메르켈 이후’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변화는 물론, 덤으로 독일 국내 정치의 변화 방향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어쩌면 ‘큰 스위스’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금기를 깨고 ‘존더베크(Sonderweg·특별한 길)’를 선택, 러시아 및 중국과의 관계를 확대하려는지 모른다.” 티에리 몽브리알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 소장이 지난달 15일자 르몽드 기고문에서 내놓은 말이다. 글의 요지는 프리드먼의 글과 비슷하다. “중국에 맞서려는 미국의 의지에 직면, 독일은 진정한 선택을 해야 한다”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전선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몽브리알 소장이 존더베크를 언급한 것 자체가 금기를 깬 것이다. 19~20세기 독일 역사를 돌아볼 때 등장하는 존더베크는 나치즘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차르식 전제주의와 영·불의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서 독일만의 독자적인 ‘제3의 길’이 필요했으며 나치즘은 그 지정학적 특수성에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역사적 해석이다.
몽브리알이 그럼에도 존더베크를 언급한 것은 ‘메르켈의 독일’이 서유럽 다른 나라들과 달리 자국의 국익만을 좇고 있음을 꼬집는 동시에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대러시아 포석에서 예외가 되고 있음을 지탄하기 위해서다. 독일이 러·중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는 서유럽 국가들의 ‘정상적인 길’에서 이탈해 러시아와는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건설사업을 진행하고, 최대 수출국 중국을 두둔하려는 노력을 두고 칼질을 했다. 프리드먼은 트럼프가 중국과 독일을 동시에 때리는 것을 지탄하며 1970년대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중국과의 데탕트로 소련을 제압했듯이, 중국을 제압하려면 ‘미·독 (경제)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이 군사적으론 지역 중견국이지만 경제, 특히 제조업의 글로벌 강대국(super power)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몽브리알도 독일을 ‘유럽 제1의 강대국’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독일의 선택에 향후 30년간 유럽은 물론 국제질서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지적했다. 프리드먼과 몽브리알 모두 지경학을 말하고 있다.
동아시아 분단국에서 화두가 된 ‘안미경중’(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은 독일이 처한 딜레마에도 적용된다. 중국은 유럽에 동아시아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군사적 위협이 주로 대륙을 나눠쓰고 있는 러시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중국은 안보 위협이라기보다 지식재산권 침탈과 불공정 무역관행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위협이다. 물론 차이나 머니를 동원해 중·동유럽 국가들을 EU에서 떼어내고 있는 중국이 유럽통합에 위협요소이지만, 존재론적 위협에는 못 미친다. 미국은 안보를 제공하되, 파이가 줄어드는 경제적 기회다. 메르켈의 독일은 그 사이에서 어찌보면 가장 성공적으로 국익을 챙겨왔다. 몽브리알의 지적처럼 러·중과 미국 사이에서 영세중립국 스위스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제3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독일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콘스탄체 슈텔첸뮐러에 따르면 독일 통상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로비단체는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가들 모임인 오스트 아우스슈츠(Ost-Ausschuss)이다. 거의 매년 이뤄진 메르켈의 방중 때마다 중국에서의 사업 기회 확장을 노리는 독일 기업인들이 줄을 선다. 종종 3대의 여객기를 동원해야 할 정도다. 메르켈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를 규탄해왔다.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 대리전쟁, 독일 소셜미디어에서의 가짜뉴스 살포, 2015년 독일 연방의회 서버 해킹, 2019년 베를린에서의 체첸 정치난민 피살 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하자 독일 의회는 러시아에 대한 재평가에 착수했다.
메르켈은 지난해 러시아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독극물 테러 기도를 비난하고, 나발니에게 독일 병원 치료를 제안했다. EU가 나발니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러시아 고위 관료들에 대해 내린 추가 제재를 지지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에 이어 바이든 행정부와 미국 연방의회의 계속되는 중단 압력에도 불구하고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사업을 접지 않고 있다. 기존 가스관이 경유하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는 물론 셰일가스의 유럽 공급을 노리는 미국의 이익을 공히 저해하는 프로젝트다.
메르켈은 중국에 대해서도 신장 위구르 및 홍콩의 인권탄압과 대만해협의 위기 고조와 관련, 날선 비판을 해왔다. 독일 정부는 통신규제를 강화해 중국 5G 장비업체인 화웨이의 독일 진출을 막을 계획이다. 중국의 안하무인 격 ‘전랑(戰狼)외교’ 관행에 대한 날선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헤이코 마스 독일 외교장관은 작년 9월 베를린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면전에 대고 “우리는 국제적 파트너들을 존중한다. 그렇기에 똑같은 존중을 그들로부터 기대한다”고 쏘아붙였다. 독일 연방의회에서도 반중 정서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메르켈은 독일의 EU 의장국 6개월 임기가 끝나기 하루 전인 작년 12월30일, EU·중국 포괄적 투자협정(CAI)을 타결지었다. EU는 중국에 진출하려는 유럽 기업들을 상대로 한 불공정 관행의 개선을 요구해왔다. 민감한 조항이 많았기에 7년을 끌어온 협상이지만, 바이든 행정부 취임 20일 전에 황급히 아퀴를 지었다.
체결을 늦추고 ‘조기 논의’하자는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의 제안은 간단하게 무시됐다. 미국에선 “독일이 돌아온 바이든과 유럽 간 사랑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었다”(포린폴리시)는 반응이 나왔다.
바이든이 취임 뒤 첫 다자 외교행사였던 지난 2월 온라인 뮌헨안보회의에서 “미국이 돌아왔다”고 강조했지만, 메르켈은 “우리(미국과 독일) 이해가 늘 수렴하는 건 아니다”라면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공정 94% 상태에서 2019년 2월 미국의 대러시아 제재 탓에 완공이 늦어지는 노르트 스트림2 가스관 사업에 대한 불만이었다. 독일의 두줄 타기 외교 또는 ‘독일 퍼스트’ 선택은 국내외 압력에도 건재할 수 있었던 메르켈의 걸출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국의 굴기 이후 몇 차례 정권교체도 불구하고 미·중 사이에서 뚜렷한 전략적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아시아 분단국의 거주민 입장에선 부럽기까지 한 리더십이었다. CAI 타결과 노르트 스트림2는 메르켈 집권 후반기 최대의 치적 또는 업적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메르켈의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바이든의 시간’이 시시각각 새로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일까. 지난 4일 AFP통신이 브뤼셀발로 날린 소식은 지각이 변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EU 부집행위원장(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이날 “유럽의회에서 CAI 비준을 받기 위한 집행위원회 차원의 정치적 노력을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직접적 원인은 지난 3월 중국의 위구르족 주민 탄압을 빌미로 EU와 중국이 주고받은 제재 탓이다. EU가 인권탄압에 관련된 중국 공직자 4명에 대한 인적제재를 발표하자, 중국은 비판적인 유럽의회 의원들에 대해 보복제재를 가했다. 돔브로우스키스는 “EU의 대중 제재에 대한 중국의 보복제재에 유럽의회 의원이 포함된 현 상황이 상서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준 노력 중단 이유를 밝혔다.
작년 말 황급하게 체결된 CAI의 세부 내용이 속속 밝혀지면서 협정안 자체에 대한 회의도 짙어지고 있다. 실비 카우프만 르몽드 논설위원은 13일자 칼럼에서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비영리재단의 지도자를 중국인으로만 임명하게 하는 등 여전히 불공정이 남아 있다”면서 제재 문제와 무관하게 유럽의회 통과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메르켈이 함께 밀어붙인 CAI 비준 전망은 물론, EU·중국 관계의 풍향 자체가 이미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8일 시작한 EU·인도 투자협정 협상을 예로 들면서 유럽이 국제관계에서 중국이 아닌 인도·태평양을 바라보는 ‘새로운 노멀’이 시작됐다는 관측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6일 ‘유럽이 중국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는 사설로 유럽의 변화를 환영했다. “메르켈의 ‘교역을 통한 변화’ 철학은 이미 시효가 끝났다”며 지난해 말 CAI 타결을 최대 지정학적 승리로 받아들였을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재고하라고 충고했다. 러·중과 양갈래로 접근했던 ‘메르켈 모델’은 독일 국내에서도 벽에 부딪힐 조짐을 보이고 있다.
9월 총선에서 메르켈의 기민련(CDU)이 승리할 경우 총리 후보로 기대했던 아르민 라셰트 당대표가 갈수록 인기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자라는 악재까지 터진 상태다. 총선 전초전으로 최근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주와 라인란트팔츠주 의회 선거에선 녹색당과 사민련(SPD)이 각각 승리했다. 특히 여성 당대표 안나레나 배어복(40)이 이끄는 녹색당의 약진이 주목을 받고 있다. 메르켈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실패 및 백신 공급 지체 탓에 CDU의 인기가 곤두박질하는 가운데 녹색당은 독일 내 각종 여론조사에서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 주정부 16개 중 11개에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유럽의 대표적인 비지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 보수 정당인 CDU가 아닌, 진보 성향 녹색당의 약진을 반기는 것 자체가 변화의 방증이다.
재정적자를 허용하지 않는 블랙 제로(Black Zero) 정책에 충실해온 메르켈과 달리 중도 리버럴 정당으로 변신한 녹색당이 미국식 재정확대 정책을 펼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메르켈과 달리 중국과 러시아에 강경한 배어복의 외교노선 역시 월가가 환영하는 이유다. ‘무티(엄마) 메르켈’은 명실공히 ‘유럽의 총리’였다. ‘자유세계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바이든 취임 뒤 국제정세는 아주 천천히 바뀌고 있다. 가장 큰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독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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