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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

도쿄 올림픽 랩소디(狂詩曲)

by gino's 2021. 8. 2.

“올림픽은 계속돼야 한다(The Games must go on)”고?
지난해 1월20일 요코하마에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 탑승한 80대 홍콩 노인이 닷새 만에 병원을 찾아갈 때만 해도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배가 홍콩에 정박한 뒤 몸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는 병원을 찾았고, 2월1일 코로나19 감염 사실이 확인됐다. 불행의 전조였다. 영국 선적 크루즈선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거대한 배양접시가 됐다. 사흘 뒤 승객 10명이 확진을 받자 일본 영해에 있던 배는 요코하마항에 선상 격리됐다. 코로나19가 미증유의 대확산으로 급속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3월16일까지 712명의 각국 승객들이 확진을 받자 일본 정부가 머뭇거리는 사이 각국 정부가 나서 자국 승객을 본국으로 실어날랐다. 확진자 중 14명이 숨졌다. 도쿄 2020 하계올림픽 개최에 우려가 높아지자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3월2일 성명을 내고 올림픽은 예정대로 열린다고 밝혔다. 아베 신조 내각의 정치적 고려가 듬뿍 담긴 강행안이었다. 하지만 캐나다와 호주가 불참을 선언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3월24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도쿄올림픽조직위는 결국 대회를 1년 연기했다. “올림픽이 (코로나19 탓에)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세계에 희망의 횃불이 될 수 있다”면서 올림픽 성화가 ‘터널의 끝’에 보이는 빛이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 23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개막한 ‘2020 하계올림픽’은 여전히 불안한 일정을 이어가고 있다. 평화 시 사상 처음 연기된 도쿄 올림픽이 사상 처음 중단될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6일 도쿄 오다이바 해양공원에서 열린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경기)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무더위에 지쳐 쓰러지거나 구토를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도쿄 올림픽을 보는 세계의 시선은 복잡하다. 프린세스 다이아몬드호 사태와 올림픽 연기, 모리 요시로 도쿄올림픽조직위원장의 불명예 퇴진을 필두로 한 일련의 조직위 관계자들의 사퇴 소동, 당초 예상을 두 배, 세 배 초과한 개최비용(시사주간 타임은 200억달러 이상으로 추산했다) 등 개막 전부터 이례적인 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여성 비하 발언(모리 위원장)과 유대인 학살 희화화(개·폐회식 예술감독 고바야시 겐타로), 학창 시절 장애 친구 학대(개회식 작곡가 오야마다 게이고), 여성 연예인 외모 비하(개·폐회식 총책임자 사사키 히로시) 등 개막 전날까지 이어진 책임자들의 사퇴는 일본 사회 일각의 이면을 가감없이 노출시켰다. 평화와 화합, 연대의 올림픽 정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준비한 꼴이다.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 오히려 코로나19를 걷어내야 올림픽 정신이 직면한 위기를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린세스 다이아몬드호 사태는 코로나19의 창궐 초기에 발생한 데다 도쿄 올림픽 연기와 직결되면서 관심을 끌었을 뿐이다. 비슷한 시기인 지난해 3월 호주 시드니에 정박했던 루비 프린세스호에선 852명이 감염돼 이 중 28명이 사망했다. 위키페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선내 코로나19 감염이 발생한 크루즈선만 44척이다.

어쨌든 선수들이 오랫동안 연마한 실력을 보는 기쁨이 무더위와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작은 행복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작은 행복을 위해 일본 국민과 각국 참가 선수들은 물론 세계가 값비싼 대가를 치러왔고, 지금도 치르고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개최국 일본의 아사히신문과 차기 개최국 프랑스의 르몽드가 개회식을 전후해 각각 내놓은 진단에 힘입어 ‘올림픽 광시곡’의 실상을 정리해본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2016년 브라질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차기 올림픽 개최국 수반 자격으로 참석, 슈퍼마리오 복장으로 이벤트를 하고 있다. 위키페디아

 

아사히는 개회식 당일자 사설로 이번 올림픽을 ‘걱정과 의혹, 스트레스로 점철된 호화 스포츠 이벤트’로 정의했다. 올림픽 무대에 서는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힘든 훈련과 경쟁을 치러온 선수들의 놀라운 경기를 바라보는 흥분의 시간이 되기는커녕 도쿄에는 어떠한 희열 또는 축제 무드가 없다고 단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없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짚었다. 화합과 신뢰의 자리에 분열과 불신이 들어섰다는 것. 2016년 하계올림픽 유치에 실패했던 일본 정부가 생각해낸 홍보 아이디어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일본의 부흥이었다. 아베 총리는 ‘부흥 올림픽’을 강조하며 후쿠시마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파괴로 인한 핵재앙이 통제됐다고 선언했다. 거짓이었다. 작년 3월 올림픽 연기를 발표하면서 아베 총리는 또 다른 식언을 했다. “최상의 조건에서 완벽한 형태로 올림픽을 열겠다”는 약속은 일본의 부흥과 마찬가지로 공염불이 됐다. 아베로부터 ‘슈퍼 마리오’의 깃발을 전달받은 스가 요시히데 총리 역시 새로운 현실을 외면했다.

아사히는 특히 스가 내각과 올림픽 주최자들의 오만을 꼬집었다. 과학과 국민이 제기하는 우려를 깡그리 무시하고 올림픽을 위한 올림픽을 강행함으로써 관중 없는 올림픽으로 귀결됐기 때문이다. “일단 선수들이 경기를 시작하면 일본 국민도 덜 부정적으로 될 것으로 확신한다”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의 낙관에도 칼질을 했다.

일본 이바라키 가시마 스타디움에서 지난 25일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남자축구 대한민국과 루마니아의 조별리그 B조 2차전 경기를 앞두고 관중석이 텅 비어있다. 도쿄 이준헌 기자

 

아사히 사설 필자는 “시민 각자가 자기만의 관점으로 스포츠의 힘과 인간의 잠재력을 찾아내 세계의 더 나은 미래를 함께 건설해나가야 할 것”이라는 당부로 글을 매듭지었다. 역설적으로 올림픽 정신을 일깨울 주체인 주최국 정부와 IOC의 역할을 이미 포기했음을 말해준다. 아사히는 다음날자에도 1면 무기명 칼럼(千聲人語)을 통해 “도쿄 올림픽이 남길 가장 중요한 유산은 올림픽의 성격에 대한 결정적인 변화일 것”이라면서 스타디움 앞에 일반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된 높은 펜스를 빗대 “올림픽의 이상 중 하나인 연대는 공허한 슬로건으로 전락했다”고 통탄했다.

24일자 사설에서 도쿄 올림픽 개회식을 다룬 르몽드 역시 “올림픽의 마술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서 어두운 분위기를 직시했다. 르몽드는 올림픽의 정치적 도구화와 도핑 및 부패를 둘러싼 반복되는 스캔들, 막대한 재정부담 탓에 올림픽 정신이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고안한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의 구호는 ‘더 비싸고, 더 욕먹으며, 더 정치적인(올림픽)’으로 바뀌었다”고 통렬한 풍자를 날렸다. 개최가 확정된 3개 도시(2024 파리·2028 로스앤젤레스·2032 브리즈번) 모두 단독 입후보였던 점을 들어 과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던 올림픽 유치는 이제 부담과 근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짚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개최비용이 늘 문제가 됐지만 도쿄 올림픽은 최고기록을 경신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갈수록 젊은이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는 것도 올림픽이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올림픽이 상업주의에 오염됐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지만, 이번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마케팅상의 이유로 2021년의 절반이 지난 시점임에도 대회 명칭에 ‘2020년’을 못 박은 것은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막 일정을 후덥지근한 한여름에 잡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최대 수입원인 TV중계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프로야구와 미식축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좌판'을 깔아놓아야 한다는 타산이 아니었다면 설명할 길이 없다. 마라톤 경기를 개최지에서 멀리 떨어진 삿포로로 옮겨놓았지만, 지난 26일 도쿄 오다이바 해상공원에서 벌어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을 마친 선수들이 경기 뒤 쓰러지고 일부 구토까지 하는 사태는 막지 못했다. 이틀 뒤 스페인의 여자 테니스 선수는 열사병에 8강전을 기권하고 휠체어를 탄 채 실려나갔다. 러시아 남자 테니스 선수는 경기 중 두 차례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한 뒤 “내가 죽으면 책임질 것인가”라고 항의했다.

올림픽 정신을 강조한 바흐 위원장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IOC 홈페이지는 29일 현재까지 “도쿄 2020 ‘부흥 올림픽’은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에 희망을 주고 있다”는 메시지를 올려놓고 있다. 동아시아의 여름은 무덥다. 1964년 도쿄 올림픽(10월10~24일)과 1988년 서울 올림픽(9월17일~10월2일)이 가을에 대회를 시작한 까닭이다. 

글머리에 소개한 “올림픽은 계속돼야 한다”는 말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가 자행된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이 남긴 말이다. 그는 테러 다음날 올림픽 스타디움 추도식에서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이 올림픽 정신을 파괴하도록 방관할 수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하루만 애도하고 다음날부터 경기를 치르자는 그의 제안에 경기장을 메운 8만명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바흐 위원장도 개회식 연설에서 어려움 속에서 올림픽을 준비한 일본 정부와 국민에 감사를 표하면서 “올림픽 취소는 선택지가 아니다”라며 그 이유로 “한 세대의 선수들을 전부 잃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느 올림픽에도 반대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IOC를 직접 겨냥한 반대는 흔치 않다. 그가 개막연설을 하는 순간 스타디움 밖에서 올림픽 반대 시위를 벌이던 군중들 사이에선 ‘IOC, 지옥에나 가라’는 푯말이 있었다.

지난 3월 압도적인 지지로 바흐의 재선을 결의한 IOC 회의에선 향후 4년간 시행할 ‘2020+5’ 전략이 채택됐다. 연대와 디지털화, 지속성, 신뢰성 및 경제적·재정적 회복력 등 5가지 부문으로 구성됐다. 공교롭게도 디지털화를 제외한 4가지 부문의 목표 모두가 도쿄 올림픽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어떠한 역경에도 계속돼야 하는 게 올림픽인가, ‘값비싼 쇼 비즈니스’인가. 바흐의 IOC가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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