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가 사과를 나무에서 떨구면 사과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북미동맹에 올 수밖에 없다.” 존 퀸시 애덤스 제6대 미국 대통령(1825~1829)에게 쿠바는 ‘사과’와 같은 존재였다. 국무장관 시절 애덤스는 스페인 외교장관에게 이런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아이작 뉴턴이 중력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었던 사과에 비유한 것이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50년 내 쿠바는 미국에 병합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은 그러나 사과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임스 녹스 포크 제11대 대통령(1845~1849)은 스페인으로부터 1억달러에 쿠바를 매입하겠다고 공식 제안했다. 스페인의 답은 “미국에 파느니 바다에 빠뜨리겠다”는 것이었다. 50만명 정도의 흑인노예를 확보할 수 있는 쿠바는 미국에도, 스페인에도 돈이 되는 섬이었다. 1897년 쿠바 독립전쟁이 발발한 뒤 윌리엄 매킨리 미국 대통령은 그 가격을 3배 높여 제안했다. 스페인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아바나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전함 메인호가 의문의 폭침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서전쟁으로 번졌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제국이 붕괴하고, 미국이 카리브해의 패권국가로 등장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듬해 미군은 점령군으로 아바나에 입성했고, 3년 뒤 쿠바 독립을 허용했다.(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뒤 한국에서 군정을 펼친 기간과 공교롭게 같다.) 미군이 물러난 자리에 미국 자본이 진출했다. 미국은 미-서 전쟁으로 쿠바에 더해 푸에르토리코와 서태평양의 괌 및 필리핀을 획득했다.
아바나가 시끄러워지면 곧바로 마이애미가 시끄러워진다. 지난 주말 쿠바 전역에서 약 30년 만에 발생한 반정부 시위를 들여다보기 전 쿠바·미국 관계사부터 찾아본 연유는 쿠바 국내 문제가 미국과 필연적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 공간에서 대미관계가 결정적인 변수가 된 사회주의권 국가는 북한과 쿠바, 베트남이다. 전쟁에서 북한은 중국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미국과 비겼지만, 쿠바와 베트남은 자력으로 이겼다. 그러나 승패와 무관하게 이후 대미관계 정상화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독자적인 생존공간을 확대하고 있지만, 북한과 쿠바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이다. 베트남이 1995년 국교정상화 이후 ‘새로운 관계’를 굳혀가는 종말 단계라면, 북한은 여전히 관계정상화의 탐색 또는 적대 단계에 머물고 있다.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나라가 쿠바다. 미국이 한 발을 내딛고도, 다른 한 발은 좀체로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 미국이라는 장벽을 마주하고 있는 북한과 쿠바는 '특수한 동지적 관계(김정은 국무위원장)'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제한적 관계정상화를 시작한 2014년 12월 이후 양국 관계는 냉온탕을 오갔다. 오바마 당시의 해빙은 쿠바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취소, 미국민의 쿠바 여행 및 송금 제한 완화, 대사관계 복원으로 요약된다. 항공·해운·우편·금융거래도 재개했다. 상업적, 경제적, 금융적 제재의 골간을 유지했지만 화해로의 분명한 신호였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쿠바정책 전환은 부분적인 U턴이었다. 쿠바 경제의 40% 정도를 점유하는 군부기업 가에사(GAESA)를 정조준했다. 개인여행을 금하고 가에사 소속 상점·호텔·레스토랑 출입을 금지했다. 단체여행 및 가족방문 등은 유지했다. 이후 크루즈와 개인 요트나 항공기 여행도 금지했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플로리다주 마이매미에서 열린 1961년 피그만 침공 노병들의 모임에서 추가 제재안을 발표했다. 쿠바 이민자들의 본국 송금을 제한한 데 이어 지난 1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기 며칠 전 쿠바를 다시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바이든 대통령의 쿠바정책은 취임 반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검토 중”이다.
지난 11일 아바나 남서부 외곽 산 안토니오 데 로스 바노스에서는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이날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의 시작이었다.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시위는 처음부터 페이스북으로 실황중계됐다. 잠시 뒤 쿠바 남동부 팔마 소리아노에서 시위 현황이 SNS로 중계됐다. 남서부 아르테미사 시위에서는 “국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는 한 여성의 절규가 소개됐다. “우리 아이들이 배고파 죽어간다”는 말도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차를 뒤엎고, 국영상점을 약탈하기도 했다. 쿠바 정부는 강경 진압에 나섰지만, 쉬 사그라들지 않을 기세다. 쿠바 당국은 12일 ‘작은 소란’ 과정에서 (시위 주민) 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쿠바 주민과 함께한다는 성명을 내놓은 것 외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마이애미의 보수강경 쿠바 이민자들이 동조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공화당 보수강경 정치인들은 미국의 군사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서방언론이 전하는 시위의 원인은 트럼프 행정부가 강화한 제재로 인한 생필품난과 코로나19로 인한 관광객 감소, 지난 1월 쿠바 정부의 화폐개혁으로 더욱 어려워진 민생 등 3가지 악재가 겹친 경제난에 집중된다. 특히 식량은 3분의 2 정도를 수입에 의존해 제재를 비롯한 외생변수에 취약하다. 쿠바 정부가 코로나19 대확산 이전인 2019년 5월부터 닭고기 및 달걀·콩·비누를 비롯한 생필품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제재가 더 큰 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쿠바 정부가 지난 1월 단행한 이중통화제도 철폐가 민생고에 불을 붙였다. 쿠바는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태환페소(CUC)와 일반페소(CUP) 등 두 가지 화폐가 있었는데 이 중 CUC를 폐지한 것이다. CUC는 국영수입업체와 외국인들이 사용했던 화폐로 1달러를 1CUC로 고정시켜 외환통제에 이용됐다. 쿠바 정부로선 외국인 투자의 장애물로 지목되던 CUC를 폐지함으로써 긍극적으로 경제활력을 불어넣으려 했겠지만 제재와 코로나19로 생활고가 가중된 상태에서 단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다. CUC 폐지로 생필품 및 전기·교통요금 등의 단기적인 물가상승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폐지 당시 쿠바 정부가 예측한 물가상승률은 160%에 달했지만 실제론 상승률이 더 올라가 물품 사재기 현상까지 보였다. 정부는 새해부터 최저임금을 5배 넘게 인상했지만, 일자리를 잃은 민간부문 종사자들의 생활고는 가중됐다. 올해 초부터 “쿠바가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광범위하게 제기돼온 까닭이다.
코로나19 백신 부족과 의약품 및 보건의료 인력 부족이라는 분석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엇보다 쿠바는 의료 및 제약부문에서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월드오미터 집계에 따르면 세계표준시(GMT)로 15일 오전 3시(한국시간 15일 정오) 현재 인구 1100만명인 쿠바의 코로나19 확진자는 25만6607명(사망 1659명)으로 한국의 17만3500명(사망 2050명)보다 많다. 하지만 코로나보드가 집계한 백신 2차 접종률은 15일 현재 15%로 한국(11.93%)보다 높다. 쿠바가 자체 개발, 시험 중인 소베라나2와 아브달라 등 2개 백신이 개발 완료 단계이기도 하다. 아브달라는 3회 접종 시 92.28%의 예방효과를 보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물가상승 압박은 코로나 이전에도 어려웠던 주민들의 일반 의약품 구매난에 추가 악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시위 배경에 정치적 요소가 있기는 하다. 2018년 9월 출범한 ‘모비미엔토 산 이시드로(성 이시드로 운동·MSI)’가 그 핵심이다. 예술작품의 공개 전 검열을 의무화한 ‘법령 349’에 반대하며 표현의 자유를 외쳐왔다. 작년 11월에는 아바나 산 이시드로 구역에서 스스로를 감금한 채 동료 예술인 구금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SNS에 유포한 랩송 ‘조국과 삶(Patria y Vida)’이 최근 시위에서 새삼 각광을 받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혁명을 하면서 외친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Patria o muerte)’ 구호를 빗댔다. 이번 시위에 ‘빵’과 함께 ‘자유’가 등장한 까닭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요구가 정치적 자유까지 연결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난과 이로 인한 사회불안은 쿠바만의 현상이 아니다. 브라질과 남아공, 레바논, 이라크 등지에서 비슷한 이유로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문제는 쿠바 시위가 플로리다반도를 통해 미국에 상륙하면서 신속하게 정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쿠바 시위의 경제적 배경을 미국의 제재와 글로벌 코로나19 대확산, CUC 폐지로 인한 물가상승 등 3중 파고로 본다면, 미국 행정부 및 쿠바 정부가 책임의 3분의 1을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쿠바와 미국 당국은 스스로의 책임을 외면한 채 정치적 비방만을 주고받고 있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주석은 지난 12일 대국민연설에서 시위의 원인을 쿠바의 경제적 질식을 획책한 미국의 제재 탓으로 돌렸다. 플로리다주에 밀집해 사는 보수 쿠바인 공동체가 SNS에 ‘#SOS Cuba’ 해시태그를 달며 불안을 조성했다는 비난도 빼놓지 않았다. 절반은 맞되, 쿠바 정부의 책임을 외면한 주장이다. 같은 날 바이든 대통령의 짤막한 성명도 다르지 않았다. 바이든은 “(코로나19) 대유행과 수십년의 압제 및 경제난 속에 권위주의 정부에 포획된 쿠바인들이 자유를 요구한 분명한 신호”라면서 쿠바 정부를 향해 “국민의 평화적 시위권을 존중하고 민성에 귀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역시 절반은 맞되 미국의 책임을 생략한 주장이다. 주로 플로리다에 몰려 사는 보수 쿠바인 이민사회는 본국의 모든 문제를 “폭정 타도” “체제 전환”의 기회로 삼는다. 세대가 바뀌고 있지만, ‘피그만의 패잔병 정서’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옛 소련 붕괴 이후 경제난 속에 발생했던 1994년 시위 당시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해법은 기발했다. 뗏목난민 수만명의 플로리다행을 방관함으로써 위기탈출을 하는 동시에 미국의 의표를 찔렀다. 디아스카넬 주석이 유사한 해법을 쓸지는 모를 일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내놓은 유일하고 구체적인 대응은 국토안보부를 중심으로 한 쿠바 난민의 미국 접근 차단이다. 피델은 가고 라울은 올해 90세다. 쿠바 정치연령으로 보아 여전히 적응 단계인 디아스카넬(61) 정부가 위기를 어떻게 탈출할지, 바이든은 어느 시점에 문제해결에 나설지 주목된다. 하필 카리브해는 이달 초부터 허리케인과 열대폭풍의 계절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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