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인으로 읽은 세계, 세계인으로 읽은 한반도
“앗, 선생님 어디선가 뵌 얼굴입니다.”
21세기 초, 군사분계선을 넘어 처음 북한 땅을 밟았다. 속초에서 배편으로 장전항에 도착했다.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이었다. 현실은 감회에 젖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북측 남자 안내원이 기습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5시간 정도 소요되는 만물상 코스의 초입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남측 방문객들이 방북 기간 내내 목에 걸어야 했던 신분증을 멋대로 들춰 인적사항을 훑었다. 사진과 함께 생년월일, 직업,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한국기자협회 대표단의 한 명으로 조선기자동맹 대표단을 만나기 위해 방북한 길이었다.
인적사항을 확인한 그는 대뜸 “기자는 시대의 조산원입네다”라며 추켜올렸다. 그러더니 “하지만 잘못하면 시대의 쓰레기장이 됩네다”라고 덧붙였다. 제멋대로 대구였지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다. 문제는 이어진 그의 장광설이었다. 그즈음 경기도 양주에서 훈련 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여중생 효순·미선양이 압살당한 사건을 끄집어 냈다. “제 나라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면서 왜 (미군에) 꼼짝 못합네까” “남측은 지나치게 외세의존적이다 말입니다”라며 몰아세웠다. 화해·협력을 하자면서 기어코 쓰린 상처를 헤집고야 마는 심사가 참으로 고약했다. 당시 진행 중이던 경수로 건설의 정확한 일정까지 언급하는 걸 듣고서야 그가 단단히 학습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전 방북교육에서 “북측 사람들과 정치적 내용의 대화를 절대 하지 말라”는 주의를 거듭 받았기에 맞대응이 어려웠다. 순간, 그가 기껏해야 외운 내용을 뇌까리는 거라면 ‘학습 범위’를 넘어서자는 꾀가 발동했다.
베트남과 쿠바, 중국, 구 유고슬라비아 등 북측 입장에서의 ‘사회주의 형제국’ 방문 경험을 풀어놓으며, 슬그머니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올가미에 포획된 사냥감을 노려보듯 초롱초롱하던 그의 눈빛이 먹먹해졌다. ‘범위 밖’의 화제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교육받았을 리 만무했을 터. 그 끝에 “서로 교류하자면서 조선기자동맹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라며 따지자 마침내 꼬리를 내렸다. “안내원이나 하고 있는 제가 어떻게 알겠습네까….”
이후 산행을 하면서 말을 걸어와도 건성으로 대꾸하며, 시선은 가급적 풍경에 꽂았다. 북한의 농축우라늄 의혹 탓에 북핵 위기가 재발하기 몇 달 전이었다. 방북 횟수가 늘어가며, 북측 보장성원들이 ‘학습받은 대로’ 말을 걸어오면, 적당히 응수하며 능청을 떨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남과 북이 만나는 접점에는 ‘지뢰’가 묻혀 있는 경우가 많다.
냉전 시기 남과 북은 옥류관 냉면을 두고도 신경전을 벌였다. 북측 매체는 남측 방문자가 냉면 가닥을 한입 가득 물고 있는 사진을 우정 보도했고, 남측 방문자는 맛있게 먹고도 서울에 돌아와선 “맛있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꺼렸던 시절이다. 6·15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방북했을 때 옥류관 냉면이 ‘동티’를 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깜짝 회동이 이뤄지고 민간과 당국의 모든 행사가 무난하게 치러진 끝이었다. 옥류관 냉면 오찬을 앞두고 다탁에 앉았던 남북 고위 관계자들은 그즈음 문을 연 옥류관 금강산 분점을 화제로 ‘냉면 냉전’의 추억을 소환하며 정담을 나눴다. 기사감이었다!
형형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당시 79세의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남측의 정 장관,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장, 박재규 경남대 총장 등이 모인 자리였다.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공동행사준비위’ 백낙청 상임대표도 자리했다. 허물없는 대화 자리에 ‘불청객’이 있음을 발견한 북측 과장급은 “어른들 말씀하신 걸 쓰면 안 된다”는 해괴한 주의를 주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되, 무시했다. 6·15공동선언에서도 서로 다름을 인정키로 하지 않았나. 굳이 이의를 제기할 사안이 아니라고 봤다. 그 대신 ‘옥류관 냉면 맛으로 본 남북관계사’라는 제목의 풀기사를 송고했다.
다음날, 서울로 출발하기 앞서 백화원 초대소에서 남북 주요 인사들 간 송별 다과모임이 있었다. 예의 과장급은 행사 도입부를 취재하던 기자 옆으로 다가오더니 신묘한 기술을 부렸다. “이제 기자 선생들은 나가야 할 시간”이라고 점잖게 퇴장을 요청하는가 싶더니 몸을 바싹 붙여 걸으며 팔 어딘가를 압박했다. 아픔이 전해질 정도였지만, 다탁에 앉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그러더니 “아니, 쓰지 말라고 했는데…”라고 질책하며, 대뜸 “당신 신문은 이제 북측과 어떤 일도 함께 못할 줄 알라”고 쐐기를 박았다. 중인환시리의 공식 행사장이었기에 대놓고 항의도 못하고, 쫓기듯 버스에 오르자 뒤늦게 분통이 터졌다.
남측 기자들과 한담을 나누던 북측 보장성원들이 궁금해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뒤 그중 나이 지긋한 분이 입을 열었다. 온기가 묻어났다. “사람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고만, 화 풀라.” 그해는 해방 60돌이기도 했다.
횟수로 11번 방북 취재를 했다. 서독의 누군가가 말한 ‘접촉을 통한 변화’는 만능열쇠가 아닐지언정,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화성과 목성 간에도 상호 방문이 잦아지면서 작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기회만 있으면 남측의 아픈 곳을 찔러대던 북측 보장성원들은 어느 순간 “지난번 남측이 지원한 비료 덕분에 올해 농사가 잘될 것 같다”면서 사의를 표해왔다. 한 해 각각 두 차례 장관급 회담과 경제협력추진위 회의가 열리고, 이산가족 상봉행사 및 대북 쌀·비료 지원이 이뤄지던 시절이다. 북측은 남측 여론이 중요함을 깨달은 게 분명했다. 미모의 엘리트 여성 보장성원들도 많아졌다. 차관급(부상급) 회담이 열리던 개성 자남산 여관이었던가.
“그래도 뭐 들은 게 있으니까 그런 기사를 쓰지 않았을까요….” 북측 보장성원들은 남측 언론보도의 배경에 대해 세련된 탐문을 해왔다. ‘금강산의 교훈’을 떠올렸다. 화제 전환이 필요한 지점이었다. “진달래와 철쭉의 차이를 아시는가.”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진달래는 마른 가지에서 꽃부터 피우지만, 철쭉은 한해살이의 자양이 될 잎을 모두 만들어놓고 차분하게 꽃을 피운다”고 설명하곤 너스레를 풀었다.
대책없이 꽃부터 피우는 진달래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안정적인 상황에서 꽃을 피우는 철쭉의 신세도 처량하다. 앙상한 가지에서 요사스럽게 피워내는 진달래의 ‘화양연화’를 끝내 누려보지 못하고 질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 대목쯤이었다. 만혼(晩婚)의 처지를 살짝 보태 살림과 사랑, 인생을 사는 두 가지 순서에 대해 말을 잇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서너 명의 북측 동료들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이 울먹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이도 있었다. 치밀한 논리와 정교한 이론, 수없는 토론에 능수였을 그들이 사소한 이야기에 이리 깊이 몰입하다니…. 서울에서 결코 만나기 어려운 순수, 그 자체였다. 이념과 정치를 떠나 깊은 교감이 가능함을 체득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분단국 저널리스트는 세계 어디를 가도 한반도를 겹쳐 본다. 분단과 전쟁, 70여년 반목이 남과 북만의 역사가 아니기에 민족과 국제, 한반도와 세계가 중첩되는 그 어느 지점에 해결의 단서가 있을 것 아닌가. 방북이 어려우면 주변을 맴돌았다. 단둥과 장백현 등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하산,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체 왜 갔겠는가. 신의주와 저 멀리 룡천, 압록강 건너 너무 가까운 혜산, 두만강 유역을 건너다보기 위해서였다. 멀리 워싱턴에 가서도 ‘한반도의 말뚝’에 매여 살았다.
음악이 협화음을 지향하며 불협화음을 경계한다면, 한반도와 세계를 습자지에 겹쳐놓듯 한목에 읽는 것은 숱한 불협화음 속에서 협화음의 단서를 포착하는 작업이다. 안경에 비유하면 다초점 렌즈가 필요하다. 자칫 가까운 것을 못 보거나, 먼 것을 놓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난독증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다초점 렌즈에 익숙해지는 것은 늘 어려웠다.
읽어야 할 텍스트는 널려 있었고, 현실은 어려운 원소기호까지 익히게 했다. 미국의 4년 주기 국방정책 검토보고서(QDR), 연례 국가위협평가보고서, 북한 외무성의 핵비망록, 조선노동당 당대회 발표문 및 남과 북, 미국 지도자의 수많은 연설문을 읽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정부의 영문 홈페이지도 뒤적여야 할 대상이다. 우라늄(U)235의 함량으로 구분하는 고농축 우라늄(HEU)과 저농축 우라늄(LEU),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대기권 재진입 기술 등 생소한 분야를 피상적으로나마 알아야 했다. 전쟁이건, 평화건 한반도 현안을 논하려면 그 모든 것의 디테일이 포함돼야 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과 사건에 꽤 굳은살이 박였다고 생각했지만 늘 ‘첫경험’이 되풀이됐다.
2017년의 전쟁 위기엔 여느 독자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더 걱정했다. 극적으로 국면이 전환되자 누구보다 환호했다. 한바탕 극과 극을 오간 한반도 상황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자 어느 때보다 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한반도 남쪽에는 당위와 담론이 천지다.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좌우 격돌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통일과 민족’ ‘인권과 동맹’이라는 당위가 각각 사자후를 토하다가도 ‘어떻게’라는 질문을 만나면, 슬그머니 말을 흐린다. 예나 지금이나 ‘중간’이 없다. 당위와 당위가 부딪쳐 서로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다가 각각 섬처럼 동떨어진 채 헤어지는 게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곤 또 정권을 바꾸고, 세월을 보낸다. 그 번다한 난장(亂場)에서 밥을 벌고, 지위를 얻거나, 사적 이해를 도모하는 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표방하는 게 진보인지, 보수인지는 덜 중요하다. 당위와 담론을 팔아 눈앞의 이익을 노리는 이들을 싸잡아 ‘통일 떨거지’라고 칭하게 됐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회고담이 길어졌다. 이 글로 ‘세계읽기 시즌1’을 마친다. 지면을 빌려 혹여 기억하고 있을 북녘 동료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읽기’는 계속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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