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 (철로가 놓인)이쪽이 북쪽입니다. 이 길 처럼, 세상의 어지러움을 극복하고 모든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평화를 그리며, 행복한 음악회가 되시길 바랍니다.(PLZ페스티벌 예술감독 임미정 피아니스트)"
철로는 습기를 머금은 채 게으르게 누워 있었다. 북을 향해 곧게 뻗었건만 허우대만 멀쩡할 뿐 철륜을 받아내지 않고 있었다. 장마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7월 24일 오후 대한민국 최북단 기차역인 강원 고성 제진역. 남북이 69년 동안 중무장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그 형용모순의 현장에서 2022년 PLZ(Peace & Life Zone) 페스티벌 개막식 및 오프닝 콘서트가 열렸다.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도, 날씨도 축축했다. 바람은 가까스로 선선했다.
DMZ를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돌려놓자는 취지로 매년 강원도 내 5개 분단군을 순회하는 PLZ 페스티벌은 이날 오프닝을 시작으로 3개월 여정에 돌입했다.
김진태 강원지사는 최기용 강원도 문화관광체육국장이 대독한 축사에서 "우리 모두의 염원인 남북통일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길 기원한다"라고 말했다. 함명준 고성군수는 "우리 지역이 유라시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인 제진역에서 PLZ페스티벌을 열게 돼 무한한 영광"이라고 말했다.
지역문화축제를 지향하는 페스티벌의 주인공은 단연 국군 장병들을 포함한 지역 주민 200여 명이었다. 하지만 평화와 생명을 희구하는 마음은 분계선 너머는 물론,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를 비롯해 라트비아,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모로코, 케냐, 파나마, 파라과이, 시에라리온 등 한국에 주재하는 10개국 외교관들이 함께 한 까닭이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세계 각국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그들이 갈구하는 평화에 대해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진 오프닝 콘서트는 아리랑으로 열어 아리랑으로 끝을 맺었다. 앞의 아리랑은 북의 작곡가가, 뒤의 아리랑은 남의 작곡가가 창작했다. 임미정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아리랑 변주곡은 북한 작곡가 전권씨가 편곡한 곡. 안개에 쌓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해금강을 먼 배경으로 연주되어 장소에 최적화됐다.
연주자 대기실은 언감생심. 무대는 제진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남단 역인 감호역까지 10.5㎞를 연결하는 철로 위였다. 피아노는 플랫폼에 놓였다. 임미정 피아니스트와 김한 클라리네티스트, 서울 비르투오지 챔버오케스트라(지휘 박광현)가 순서대로 자리했다.
콘서트는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대비되는 두 개의 주제로 구성됐다. 엘가(Elgar)와 모차르트(Mozart)를 통해 천국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클라리넷(김한)이 연주했고, 슈베르트(Schubert)의 마왕과 죽음의 소녀를 비르투오지가 연주했다.
피아노 건반이 미끌거릴 만큼 축축했고, 습기를 싫어하는 현악기들은 가까스로 선율을 뽑아냈다. 그러나 소리와 소리가 어우러져 내놓은 화음은 장엄했다. 간간이 곁들여진 새의 지저귐이 뜻밖의 액센트가 됐다.
두 개의 상반된 주제는 마지막 곡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방향성을 상징했다. 영국 작곡가 본 윌리암스(Vaughan Williams)가 16세기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의 ‘죽음에서 일어나면(When, rising from the bed of death)’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쓴 곡이다.
앙콜 곡은 남한 작곡가 이지수의 현악기를 위한 ‘진도아리랑’이 여운을 길게 남겼다. 비올라와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의 선율이 서로 꼬리를 물고 엉키는가 싶다가 어느새 말쑥하게 조화를 이뤘다.
페스티벌 연주회를 위해 몇해째 일년 열두달 DMZ 산길을 돌아다닌 임미정 예술감독은 행사 안내 글에 "우리의 음악이 분단의 현실을 녹여내어 평화와 생명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올해 PLZ 페스티벌은 오는 10월29일까지 이어진다. 고성을 비롯해 철원, 화천, 양구, 인제 등 5개 지역에서 여는 콘서트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국제평화음악캠프 등이 펼쳐진다. PLZ페스티벌의 모든 일정과 소식은 공식홈페이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www.PLZ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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