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한·미가 북한에 종전선언을 제안한다. 평화협정과는 달리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는 선언일지언정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다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한·미가 북한과 관계를 정상화해 북한으로 하여금 대중 입장을 재정립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경제지원은 신뢰 구축의 또 다른 수단인 동시에 북한 비핵화의 촉진제다. 미국은 북한의 인프라를 개발하기 위해 10년 무이자 국제펀드 조성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한다. 북한은 이를 통해 대중 경제의존을 낮출 수 있다. 남북 자유무역협정(FTA)은 이러한 인프라 건설재원 마련의 보완재가 될 수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 투자 흐름을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은 한국이 맡는다.

이 단계에서 한·미 동맹과 북한은 군사적 긴장을 낮춰야 한다. 군사관계의 정상화다. 서해 충돌 및 중국 어선의 불법조업, 비무장지대(DMZ)의 안정화 체제를 구축한다. 유엔사의 역할은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다. 종전선언-외교관계 정상화-대북 경제협력-군사관계 정상화의 단계가 진행되는 동안 북한은 비핵화를 진행해야 한다. 한·미가 북한에 제공하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혜택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연동한다. 북한이 어기면 뒤로 물리는 ‘전략적 신중(strategic deliberateness)’이 전 과정의 나침반이다. 

몇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동안 비핵화가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완료된다면 비로소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세번째 단계다. 그 순간까지 한·미 동맹은 강력한 방위태세를 풀지 말아야 한다. 군사훈련은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마지막 단계는 북한을 한·미 동맹이 주도하는 질서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북한 입장에선 한·미 동맹의 안보 위협과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돌파할 묘안이 될 수 있다. 한국은 북한의 최대 교역 및 직접투자 국가로, 미국은 북한의 두번째 교역 파트너이자 국제 재원의 북한 유입을 가능케 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 

지난 5월25일 평양 낙랑구역의 남사 협동농장에서 한 농부가 벼를 심고 있다. 북한은 최근 식량난을 완화하고 쌀과 옥수수 가격 상승에 대처하기 위해 군 비축 식량을 방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P연합뉴스

 

지난 7월29일 미국 포린어페어스에 게재한 빈센트 브룩스 전 한·미연합사 사령관과 임호영 부사령관 명의 공동기고문의 요지다. 글의 제목은 ‘북한과의 대타협(A Grand Bargain With North Korea)’.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의 경제발전 및 동북아 질서의 재편을 도모하자는 전략적 구상이다. 국내에선 원문에 없는 한·미와 북한의 ‘대중 동맹’으로 표현하거나, 군사훈련을 중시한 글의 일부분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선별 소비됐다. 단계적 합의를 통한 긴 호흡의 전략 구상을 ‘일괄타결’이라고 과감하게 오역하기도 했다.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속한다고 모두가 동맹의 형태인 건 아니며, 그럴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미국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브룩스·임의 구상은 조 바이든 행정부 취임 이후 미국 내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대북 접근 방안의 하나다. 새로운 접근의 흐름은 두 가지 현실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나는 북한의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좌절 또는 인정이다. 대북 군사적 압력이나 경제제재, 중국에 아웃소싱을 하는 방식이 죄다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흐름은 갈수록 불편한 현실로 자리 잡아가는 미·중 갈등이다. 미국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들일수록 세력균형의 공식을 바꿈으로써 중국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차단하는 방안에 눈을 돌리고 있다. 

월터 러셀 미드 아메리칸인터리스트(AI) 편집장은 지난 4월5일자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에서 ‘북한과의 데탕트’가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 역시 북한의 핵무기를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미국 대통령이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인 동시에 실제적으로 달성하기 불가능한 목표라면서 브룩스·임과 비슷한 제안을 내놓았다. 현실인식 역시 유사하다. 미국의 단극체제로 여겨졌던 1990년대만 해도 미국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한 흔들림 없는 책임을 구현할 방안을 모색할 수 있었지만, 떠오르는 중국이 미국의 필수적인 국익을 위협하는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김덕훈 북한 내각총리가 함경남도 영광군과 신흥군, 홍원군, 단천시 등 최근 수해피해를 입은 지역을 돌아보며 무언가 지시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12일 보도한 사진이다. 북한은 올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수해 등 3중고를 겪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중국이 강해질수록 중국과 거리를 두려는 북한은 냉정한 마키아벨리식 논리를 수용하게 된다고 짚었다. 대북 제재를 강화해봤자 중·러가 대미관계 악화 뒤 제재망을 느슨하게 하고 있어 효력이 감퇴된다는 점도 감안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이 기존 방식으로 ‘불가능한 임무’에 연연하는 대신 북한이 중국의 궤도로부터 이탈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득에 주목할 것을 주문했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접근의 입구로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제시한 점이다. 한반도 안팎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신무기 개발 유예를 협상함으로써 북·미가 모두 전략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논지다. 

리드는 비핵화를 잠시 미뤄둠으로써 되레 동맹국들과 더 연합하고, 중국을 겨냥해 동아시아에서 우호적인 힘의 균형을 공고히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중시하는 미국 의회를 의식한 듯 미국이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은 물론 1970년대 마오쩌둥과 연합했던 전례를 들어 중국과의 전면적 투쟁이 수반할 추악한 도덕적 선택에 비하면 낫지 않으냐고 설파했다. 그러곤 한반도를 뛰어넘는 전략적 가치에 주목했다. 북한이 어렵고 위협적일 수 있지만,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전략적 이해라는 가장 큰 위협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조용히 다른 선택지를 탐사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 내 절대권력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바닥 뒤집듯’ 대외전략을 수정할 수 있을 거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파시스트를 그토록 공격하던 스탈린이 히틀러와 독·소 밀약을 체결한 것을 역사적 사례로 들었다. 

AI는 닉슨센터의 기관지였던 내셔널인터리스트(TNI)의 자매 잡지 격이다. 대중 데탕트를 주도했던 헨리 키신저식 세력균형을 중시하는 현실주의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리드가 글에서 강조하듯 가치보다 국익을 우선한다. 이 점에서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당, 바이든 행정부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미국 엘리트들 사이에서 가치와 국익은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미·중 데탕트는 리처드 닉슨의 공화당 행정부가 이뤘지만, 1995년 베트남 수교를 성사시킨 것은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이었다.

 

말레이시아 콸라룸프르의 북한 대사관 담벼락의 철조망 옆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이례적으로 한·미 합훈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자 로이터 통신은 지난 3월 9일 촬영해놓은 이 사진을 지난 8월7일 전송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브룩스·임의 설계도는 북한의 경제적 상황을 더 중시했다. 올해 초 제8차 당대회에서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내세운 북한의 최우선 현안을 경제안보라고 가정했다. 북한이 경제안보를 개선토록 도와주는 동시에 또 다른 잠재적 우려인 과도한 대중 의존을 한목에 풀어낼 방안으로 북한 인프라 국제 재원 조성과 남북 FTA를 제시한 점이 창의적이다. 지난해 초 ‘중국은 아시아의 진짜 병자(Sick Man)’라는 칼럼으로 중국 외교부의 강한 비난을 받았던 리드는 북한과의 데탕트가 미국에 선사할 전략적 이익에 집중했다. 브룩스·임이 곳곳에 한국의 역할을 배치한 반면에 리드는 냉혹한 현실주의자답게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았다.

얼핏 보면 국내 대북 포용론자들이 반길 이러한 주장들은 지독히 미국적인 발상에서 나왔다. 한국이 간과해선 안 될 지점이다. 한국의 입장에 대한 고려는 거의 없다. 미국이 결정하면, 따르는 국가라는 인식이 내비친다.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들고나올 것을 집요하게 요구해왔다. 그렇다면 북한의 셈법에서 중국 요소는 얼마나 있을까. 당 대 당 간에 동지적으로 맺어진 북·중관계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물론 불신도 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는 또 다른 장점은 가까운 중국의 자장으로부터 주체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대미 수교 뒤에도 핵을 가져야 할 동기의 하나다. 그럼에도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미국 쪽으로 선회했다고 치자. 그랬다가 한국과 미국이 배신하면 어떻게 될까. 애증이 뒤섞인 중국과 달리 한·미에 대한 북한의 불신은 매우 견고하다. 익명을 요구한 외교소식통은 “2018년 북한이 우리의 중재로 북·미 정상회담을 받아들였을 당시 우리가 ‘중국을 벗어나서 한번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김정은은 곧바로 시진핑에게 달려가더라”는 말을 전한다. 북·중은 2018년 이후 다섯 차례나 정상회담을 하면서 ‘전략적 소통’을 강조했다.

미국에 ‘중국 요소’는 미·중 데탕트 당시에 비해 지금 더 중요해졌다. 역사상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에 중국 요소는 태평양 건너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녹록지 않다. 미국에 북한의 개혁·개방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베트남의 경우가 이를 입증한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를 선언했지만 미국과 수교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워싱턴의 전략가들이 굴기하는 중국을 견제할 베트남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는 데 들어간 시간이다. 그런데 미·베 수교 뒤 베트남이 반중으로 돌아섰을까. 아니다.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에서 상시적으로 물리적 충돌을 하고 있지만, 베트남이 대외전략에서 가장 중시하는 국가는 여전히 중국이다. 

포린어페어스 7월29일자에 소개된 브룩스-임의 기고문

 

어떠한 매력적인 전략이론보다 강한 것이 지리적 위치다. 북·중 국경(1352㎞)은 베·중 국경(1297㎞)보다 더 길다. ‘당 대 당’으로 맺은 이념적 유대 역시 견고하다. 1979년 중국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트남 지도부의 태반이 친중파인 까닭이다. 베트남에 비해 중국과 훨씬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북한이 리드의 가정처럼 ‘손바닥 뒤집듯’ 할지도 의문이다. 

더욱 중요한 건 바이든 행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4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정교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별다른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성김 대북특별대표가 북한의 비핵화 조치 진전에 연동한 부분적인 제재 완화를 제안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 국내)법적 제한 탓에 의회의 동의를 얻기 쉽지 않은 상태다. 미국 관리들은 조건 없는 대화 제안에도 북의 응답이 없다면서 ‘공이 북한 편에 있다’고 말하지만, 일부 분석가들은 미국의 접근이 지나치게 수동적이라고 지적한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지난달 30일 상황보고에서 평가한 현주소다. 

8월도 중반으로 치닫는다. 축소된 한·미 연합훈련이 진행되면서 북한 노동당 중앙위의 김여정 부부장과 김영철 부장이 지난 10일, 11일 예정된 비난 담화를 내놓았다. 어조는 갈수록 강해지는 크레셴도다. 광복절부터 국치일까지 반일의 계절도 돌아온다. 한반도 문제는 여전히 섬처럼 표류하고 있다. 한국의 셈법 역시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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