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한국 사회는 갑론을박, 왈가왈부의 폐쇄회로에 갇혀 있다. 사안의 실체적 진실과 그로부터 도출할 교훈을 깡그리 날려버린다. 말싸움을 하다가, 금방 다른 주제로 바꿔 말싸움을 벌이는 악순환이 무한반복되는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많은 시민들은 한없이 불편하다. 불쾌하다. 시민의 눈높이 또는 국민의 수준에 맞지 않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더욱 악화된 풍조다.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 논란을 야기한 대통령 영부인 김건희의 캄보디아 심장병 어린이 환자 방문 사진을 놓고 하는 말이다.
국내에서 논란이 이어졌지만, 기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현지의 반응도 그랬다. 대통령 부인이 11월 12일 프놈펜에서 집으로 찾아가 만난 어린이(Aok Rotha·14)는 2018년 현지 헤브론 의료원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이후 가난 때문에 추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처지. 현지 영자지 프놈펜 포스트는 11월 14일과 16일 한국 대통령 부인이 로타와 만난 이야기를 소개했다. '한국 퍼스트 레이디가 아픈 소년에게 희망을 가져오다(14일자)' '한국 퍼스트 레이디, 아픈 소년의 수술에 길을 놓다(16일자)' 등의 제목에서 긍정적인 시각을 담았다. 로타의 형(Nara)을 비롯한 가족들은 대통령 부인이 비용을 부담해 한국에서 치료를 받게 하겠다는 약속에 감사를 표했다.
33만여명의 가입자를 두고 있는 현지 유튜버 '아드민 스탕다'가 관련 소식을 전한 유튜브 방송에 달린 32개의 댓글 역시 감사하는 내용이 많았다. "우리 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런 아이들을 돕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 "크메르 지도자들은 어떻게 크메르 재벌은 이 아이를 보았을까"라는 댓글이 눈길을 끌었다. 대통령 부인이 아픈 아이 가정을 찾아가 훈훈한 미담을 만드는 건 나쁜 생각이 아니다.
소음은 대통령실이 배부한 사진을 둘러싸고 나왔다. 연출한 흔적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인상은 중요한 단서이되 인상만을 둘러싼 논란은 공허하다. 유엔 아동기금(유니세프) 캄보디아 지부 홈페이지에 실린 '국제적 기준'을 들춰본 까닭이다. '아이들에 관해 보도하는 저널리스트를 위한 윤리적 지침'이지만, 언론에 배포하는 아이들 사진에도 적용해야 마땅하다.
지침은 ‘언론 노출로 어린이가 입을 수 있는 잠재적 위협, 사회적 낙인, 피해를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언론 보도를 할 때는 어린이가 얻을 최선의 이익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어린이와 부모의 서면 동의를 받고 질문하는 사람, 사진 기사 등의 수를 제한해 편안한 환경을 조성한다’ 등이 있다. 특히 ‘이 아이가 내 아이라면?’이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에는 로타의 얼굴과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집안 사정까지 자세히 소개됐다.
대통령 부인의 자선활동을 홍보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행사를 기획하고 사진을 찍어 배포한 수행원들이 '내 아이라면?'이라고 자문했다면 공개 전에 고민했어야 할 대목들이다. 정치권에서 벌어진 '기획 사진' 논란에는 아이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 대통령실이 배포한 사진의 주인공은 대통령 부인이었다. 아이는 되레 풍경의 일부로 처리된 것 같다. "화보 촬영"이라는 야당 의원의 공세에 대통령실은 "허위 사실" 운운하며 되받았지만, 아동을 공개할 때 생기는 '부수적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적어도 유니세프 기준에는 맞지 않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실은 '국익'을 함부로 거론한다. 국내언론이 전한 대통령실 관계자의 말은 "(야당 의원이)국제적 금기사항이라는 황당한 표현까지 덧붙였다"면서 "국격과 국익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했다. 양금희 국민의 힘 수석대변인은 "오드리 헵번, 안젤리나 졸리, 다이애나 왕세자빈 등 이분들의 행보는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주지하다시피 '세기의 연인'으로 불렸던 오드리 헵번과 안젤리나 졸리는 모두 인생의 상당 부분을 어린이 인권과 인도주의 활동에 바친 사람들이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던 헵번은 아동 인권 및 복지를 위해 싸운 투사였다. 처음 에티오피아의 굶주린 아이들을 보고 온 그는 한동안 하루 15번 언론 인터뷰를 하며 아이들의 먹을 권리를 위해 몸을 던졌다. 세계 지도자들이 유엔 아동 권리 헌장을 채택했던 1989년 유엔 연단에 선 것은 물론, 수많은 기회를 통해 아이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게 어른의 도리라고 역설했다. 졸리는 '툼 레이더(2001)'라는 영화 촬영을 계기로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참상을 접한 뒤 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를 자청해 난민구호활동에 나선 인물이다. 안토니오 기테라스 유엔 고등판무관의 특사로 활동하면서 요르단과 터키,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분쟁 현장을 누볐다. 다이애나는 어떠했을까.
"(영국) 왕세자빈으로서의 압력에 맞서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대처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고 말한 그가 택한 길은 자선활동이었다. 어린이 병원은 물론 노인 요양시설 영국 폐 재단, 지뢰 피해자 네트워크, 암 퇴치 운동 등 그가 참여했던 단체 및 활동은 수십개에 달한다. 특히 1980년대 선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감염 부모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에이즈 환자들과 접촉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나병환자 병원을 찾은 뒤에는 나병 환자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나병 미션'의 후원자가 됐다.
비교는 비교 대상이 될 때 하는 것이다. 생뚱맞게 비교하려 들면 억지가 된다. 현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의 삶이 이들의 삶과 비유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나. 이들 중 누구도 자선 현장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는 사진을 찍게 한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이) 잘 보이려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적"도 없었다.
같은 행위를 해도 행위의 주체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던지는 메시지가 다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세기의 활동가들과 같은 반열에서 현 대통령 부인을 평가하는 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대통령실은 과연 많은 사람들의 눈높이에 대통령 부인의 개인 자선활동이 왜 감동스럽지 않은지, 아픈 아이와 찍은 사진이 왜 특이하게 보이는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지 궁금하다.
고공행진을 하는 물가와 금융기관 이자율에 서민의 삶이 허덕이고 한반도 상공에 괴물 ICBM와 최첨단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안보 위기, 안팎으로 심각한 난국에 처한 나라에 살면서 희한한 사안을 놓고 벌어지는 끊임없는 공방과 논란을 봐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분명 '극한직업'이다.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보도한 게 엉뚱하게 "(한미)동맹관계를 이간질 하려는 아주 악의적인 행태"라며 특정 언론의 전용기 탑승 배제가 "헌법수호 책임의 일환"이라는 대통령은 많은 국민의 청취력을 의심케 한다. 잘 차려입고 허공을 바라보는 대통령 부인의 사진에 제기한 의혹에 '허위사실 유포'라는 대통령실과 '국격과 국익'을 입에 담는 여당은 국민의 시력을 의심케 한다. 정녕 귀막고 눈을 감아야 무사한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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