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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평화의 순간' 없었던 월드컵 미-이란전, 후퇴한 양국관계 현주소

by gino's 2022. 12. 6.

이란 '히잡 거부 시위' 여파로 그라운드 안팎서 날선 대치
이란 국내 상황…미-이 관계 악화…지정학적 갈등 겹쳐
1998프랑스 월드컵선 FIFA 중재로 평화와 화해의 축구

지난 29일 카타르 도하의 알 투마마 스타디움에서 월드컵 B조 마지막 경기에 나선 이란 대표팀(왼쪽)과 미국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전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2022.11.30  로이터연합뉴스

국제축구연맹(FIFA)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축구로 주목받았던 경기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맞붙었던 미국-이란 전이었다. 조 추첨에서 두 나라가 같이 F조에 속하자 당시 미국 축구연맹 회장이 남긴 '모든 경기의 어머니(the Mother of All Games)'라는 표현이 지난 11월 30일 카타르 월드컵 B조 미국-이란 전을 전후해 각국 언론에 회자됐다. 

축구 국가대표팀 간의 경기는 민족주의 에너지를 가장 고양시킨다. 하지만 때론 90분 동안 평화와 화해의 순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24년 전 세계의 우려 속에 프랑스 리옹의 제를랑 스타디움에서 열린 양국의 첫 월드컵 경기가 그랬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사건과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의 이라크 지원으로 악화됐던 관계 탓에 시작부터 원만한 경기가 어려워보였다. '축구 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에 프랑스 폭동진압 경찰이 대거 배치됐다. 

 

1998년 6월 21일 프랑스 월드컵 예선 F조 경기에서 처음 맞서게 된 미국과 이란 선수들이 리옹 제를랑 스타디움에서 경기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란 선수들은 평화의 상징으로 백장미를, 미국 선수들은 기념 페넌트를 교환했다. 2022.11.26 AFP연합뉴스

 

FIFA는 경기 때마다 A팀과 B팀을 분류하고, 휘슬이 올리기 전 A팀 선수들이 B팀 선수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도록 한다. 당시 A팀은 이란이었지만, B팀인 미국 선수들이 이란 선수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이란 팀은 절대 미국인들을 향해서 걸어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FIFA 관계자들이 벌인 사전 협상 끝에 간신히 미국팀의 양해를 얻어낸 덕분이었다. 사전 기념사진 촬영은 또다른 기획이었다.

이란 선수들은 평화의 상징으로 백장미 꽃을, 미국 선수들은 기념 페난트를 선물했고 양팀은 각각 장미꽃과 페난트를 들고 사진을 촬영했다. 경기 결과는 2 대 1로 이란의 승리. 

비록 두팀 모두 16강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공다툼 외 충돌은 없었다. 양국 응원 관중 간 충돌도 없었다. 팔레비 왕정 지지자들과 이슬람 혁명정부 지지자 간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을 뿐이다. "월드컵에서의 가장 큰 지정학적 충돌이었던 경기에서는 평화가 지배했다"는 평가(AP통신)가 나왔다.

 

이란 남자축구팀이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미국에 패한 지난 30일 이란 수도 테헤란 중심가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11.30 AP연합뉴스

승패에 따라 엇갈린 반응은 불가피했지만 딱 거기서 그쳤다. 미국을 꺾은 이란에선 전국적으로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 반면에 미국팀은 자국 팬들에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카타르 월드컵 무대에서 양국이 다시 맞붙은 이번 경기에는 그러나 '알라'가 부재했다.

이란 국내에서 지난 9월부터 계속되고 있는 '히잡 거부 시위' 탓에 과거처럼 국가와 축구가 원팀이 되기 어려웠다. 

이란 선수들은 11월 21일 잉글랜드전에 앞서 연주된 국가를 따라부르지 않았다. 이란 정부의 강압으로 웨일즈전과 미국전에선 국가를 불렀지만, 께끄름한 분위기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외 거주 이란인들 상당수도 시위 군중을 지지하면서 관중석에서는 이슬람 신정 지지파와 반대파 간에 싸움도 벌어졌다.

미국 축구연맹이 벌인 이란 국기 훼손 역시 히잡 거부 시위와 무관치 않다. 미국 축구연맹은 일요일이던 지난 27일 오전 "이란 내 (히잡을 거부하는)여성들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낸 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연맹 소셜미디어에서 이란 국기 중앙의 이슬람 상징을 24시간 동안 지우겠다고 밝히고 곧바로 실행했다. 

 

이란 여성 마샤 아미니가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경찰에 붙잡혔다가 사망한지 40일이 되는 10월 26일, 수천명의 추모객들이 마샤의 고향마을인 이란 서부 쿠르디스탄  사케즈의 공동묘지로 향하는 가운데 히잡을 벗어던진 젊은 여성이 자동차 지붕에 올라 두손을 치켜들고 있다. AFP통신은 UGC이미지가 트위터에 올린 이 사진을 올해의 사진으로 꼽았다. 2022.11.29  연합뉴스

이란 축구연맹은 이에 "우리 국기에서 알라를 지운 것은 (정치적 표현을 금지한)FIFA 규정 위반"이라고 반박했다. 국기 훼손 사건은 미국 연맹이 같은 날 오후 정상적인 이란 국기 그래픽을 내놓으며 종식됐지만,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란 연맹이 "책임을 묻겠다"면서 FIFA에 제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서다.

수백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란 내 히잡 거부 시위에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 축구 연맹의 이란 여성 인권 지지성명은 생뚱맞다. 순수한 의도 보다 이란에 적대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읽힌다. 의도가 무엇이었건 스포츠에 정치와 종교적 편견을 끌어들였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양국관계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17년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한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뒤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JCPOA 재협상에 이란의 각국 시아파 무장세력 지원 중단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어 해결이 더 어려워졌다.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총사령관 솔레이마니 암살은 기왕의 악화된 관계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에는 러시아가 이란에서 도입한 무인기가 전장에 사용되면서 미국과의 관계에 새로운 악재가 되고 있다. 

 

지난 29일 미국 미시건주 베이시티의 SK 실트론 공장을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국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예선에서 이란을 꺾었다는 낭보를 전하면서 파안대소하고 있다.  2022.11.30  로이터연합뉴스

 

월드컵 시즌을 달구던 거리 응원도 정치에 오염됐다. 이란 내에선 신정(神政)에 반대하는 시위를 의식해 차단하고 있고, 레바논과 시리아, 이라크 등 중동 각국의 시아파 지지 군중은 미국이란 전 거리응원장에 종종 반미 구호가 울려퍼졌다.(워싱턴포스트)

이란 전 승리로 16강 진출에 성공한 미국은 축제분위기다. 결승골을 넣은 미국 선수 크리스천 풀리식이 '캡틴 아메리카'로 등극했고,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를 기뻐하는 모습이 공개됐다. 하지만 이란 국내 사정과 미-이란 관계 악화 및 지정학적 갈등 탓에 이번에는 축구가 '평화의 순간'을 제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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