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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의 평범한 정상외교가 비범해 보인 까닭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2. 12. 1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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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국빈만찬이 자정이 넘도록 이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준비한 와인과 칵테일이 떨어질 정도로 참석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파티를 즐기는 광경은 더욱 흔치 않다. 지난 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에마뉘엘 프랑스 대통령 부부 및 프랑스 방문단을 초대한 백악관 만찬. 뉴욕타임스가 전한 분위기에는 흥겨움이 넘쳤다.

바이든 대통령(80)은 코카콜라로, 마크롱 대통령(44)은 미국산 와인으로 여러 차례 건배를 나눴다. 프랑스인 참석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느꼈는지는 확인이 안되지만, 핫도그와 아이스크림, 스파게티 등 미국 음식 상찬도 있었다고 한다. 두 정상이 자리를 떠난 시간은 0시30분쯤. 백악관 주변은 새벽 1시 넘어까지 귀가를 서두르는 초청객들로 부산했다. 

그런데 바이든이 취임 3년 만에 처음 국빈으로 초청한 외국지도자가 그 많은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왜 하필 마크롱이었을까. 엉클 샘이 '공화국 대통령'에게 원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마크롱은 바이든으로부터 무엇을 챙겼을까. 

 

1일 백악관 국민만찬장은 평범한 파티를 연상시킬 정도로 흥겨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준비한 술이 떨어질 정도로 만찬 행사를 만끽했다.  2022.12.1 로이터연합뉴스
일단 1년 전 "(미국이 프랑스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며 통분했던 마크롱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은 2021년 9월 15일 영국 및 호주 정상과 함께 핵잠수함 기술 공유를 요지로 하는 3국 안보협력체(AUKUS·오커스) 발족을 발표했다. 당장 2016년 호주 국방부와 공격용 잠수함 공급계약을 체결했던 프랑스 국영 방산업체 나발그룹은 900억달러의 계약액을 날리게 됐다. 1958년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 덕에 핵잠 기술을 제공받았던 영국과 달리, 자력으로 핵잠을 개발해야했던 프랑스엔 두번째 핵잠 배반이었다. 마크롱이 분개했던 까닭이다.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가장 오랜 우방국' 대통령을 국빈 초청해 다독일 필요가 있었음직하다. 프랑스는 한국산은 물론 유럽연합(EU)산 전기차와 배터리 등을 차별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탓에 새로운 불만도 쌓인 터였다. 마크롱은 IRA가 "매우 공격적(super aggressive)"이라고 비난했다. 바이든은 1일 마크롱과의 정상회담에서 앵글로 색슨 국가들 간의 오커스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IRA법에 대해선 '작은 결함들'이 있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협의를 약속하는 성의를 보였다. 마크롱 부부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날 만찬을 즐긴 배경의 하나였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앞쪽)이 1일 백악관 남쪽잔디밭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주최한 국빈 방문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2022.12.1 로이터연합뉴스
 

IRA가 EU 기업 차별 내용을 조정한다면, 지난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정계 은퇴 이후 유럽의 외교 지도자로 떠오르는 마크롱의 입지를 확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마크롱은 국민으로부터 넉넉한 봉급에 더해 숙식과 교통편까지 제공받는 '상머슴'의 외교가 어떠해야하는지 그 전범을 보였다. 

이날 백악관 미·프 정상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장에선 생뚱맞게 사랑 타령이 나왔다. 프랑스 RTL라디오의 엘리제궁 출입기자 윌리엄 발리베르가 물꼬를 텄다. 그는 바이든을 호명하며, "프랑스에는 '사랑은 없다. 사랑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Il n'y a pas d'amour, il n'y a que des preuves d'amour)'라는 말이 있다"면서 IRA와 관련해 "프랑스 친구들이 안심하고 귀국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IRA에 분노하는 국민정서를 실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자칫 바이든이 난처해했을 질문에 마이크를 잡은 것은 마크롱이었다. 바이든이 말문을 열기 전에 답을 자청한 것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1일 국빈만찬이 열린 백악관 노스 포르티코 앞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부부를 맞이하고 있다. 이들은 만찬장에서 진농반농 분위기에서 바이든의 재선을 위한 건배를 나눴다고 미국 언론이 전했다.  2022.12.1  EPA연합뉴스

정상회담 전까지 IRA에 대해 독한 비판을 내놓았던 마크롱은 놀라운 변신술을 보였다. 그는 "우리가 미국에 온 것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지, 단순히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면서 바이든을 옹호했다. 그러면서 IRA문제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의견을 나눴고, 앞으로 공동 위원회에서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켜보고 있던 바이든은 "그게 바로 내 대답"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발리베리가 인용한 것은 20세기 초 프랑스 시인 피에르 레베르디의 싯구였다.

바이든은 바이든대로 체면을 차렸다. IRA 질문이 계속되자 "아니다. 미국은 사과하지 않는다. 나도 사과하지 않는다. 내가 그 법안을 작성했기 때문"이라면서도 680억달러의 큰 예산을 짜다보니 '작은 결함들(glitches)'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재고할 것이라고 되풀이 강조했다. 

마크롱은 자신의 말대로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는 대신 주변을 공략했다. IRA를 통과시킨 상원의원들을 만나 "(유럽 기업에 피해를 줄)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을 끌어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IRA를 비난하는 말로 자국 국민 정서를 챙겼다. 막후 교섭에서 바이든의 양해를 구해낸 뒤 공동기자회견장에선 오히려 바이든을 두둔하는 외교적 세련됨을 보였다. 프랑스 납세자 입장에서 상머슴에게 주는 봉급이 아깝지 않을만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왼쪽)과 조 바이든 대통령이 1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연 공동기자회견장에 들어서고 있다. 2022.12.1   EPA연합뉴스

대한민국 대통령실은 9월 22일 대통령이 런던에서의 찰스 3세 영국 국왕 주최 리셉션(18일)과 뉴욕 글로벌펀드 회의 뒤 리셉션 참석(21일) 계기에 이뤄진 '한·미 정상 간 환담 결과'를 발표했다. 뉴욕 환담 시간은  '48초'였다. 통역 시간을 생각하면 한두 마디 주고받은 정도다. 리셉션 주최자인 바이든은 선 채로 한국 대통령과 잠깐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미국 정상을 만나 △인플레감축법(IRA) △금융 안정화 협력 △확장 억제에 관해 협의했다고 밝혔다. 10월 4일엔 바이든이 친서를 보내와 "IRA에 관한 윤석열 대통령의 우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한·미 간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협의를 지속해나가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마크롱은 바이든과 국빈만찬만 함께 한 게 아니다. 전날 저녁 바이든 부부의 초청으로 부부동반 비공식 만찬을 먹었다. 대통령실 발표에 따르면 한국 대통령은 대단히 신묘한 능력을 발휘했다. 마크롱이 2박3일 동안 미국 언론과 상원의원들은 물론 바이든 대통령과 공식·비공식 대화를 통해 관철한 IRA 수정 요구를 그 짧은 시간에 달성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당최 알 길이 없다. 

 

미국을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가운데)이 지난 30일 워싱턴의 의회도서관에서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을 주제로 한 미국 상원의원들과의 업무오찬에 앞서 상원의원들과 함께 관련서류를 보고 있다. 업무오찬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IRA와 관련한 유럽의 불만을 집중 제기했다.  2022.11.30  AFP연합뉴스

흥미로운 대목은 마크롱의 현란한 정상외교에 주목하거나 감탄하는 프랑스 언론이 없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공화국 대통령'이 마땅히 해야 할 '밥값'을 했기 때문일 게다. 딱히 언론이 나서 주목할 정도로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일 게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이 권력자에게 찬사나 늘어놓으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게다. 

한국 대통령은 뉴욕에서의 짧은 회동 직후 행사장 안에서 '이 새끼들' '바이든/날리면' '쪽팔려서' 등의 막말로 세계의 관심을 일거에 모았다. 그걸 보도한 언론사(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거부하는 일이 태연하게 벌어지는 나라에 살게 돼서 그런지 마크롱의 능란한 정상외교는 지극히 부럽다. 프랑스는 미국이 독립하기 전부터 동맹국이었다. 대통령의 발언을 '들은 대로' 보도했다고 "가짜뉴스로 (미·프) 동맹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아주 악의적인 행태"라는 황당한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프랑스 동업자들이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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