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미국 사이에는 최고위급에서 논의할 밀린 의제가 많다. 생산적인 회담이 되길 바란다."(푸틴)
"상호 이해가 일치되는 부분에서 우리는 협력할 것이다.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선 예측가능하고 합리적인 길을 찾을 것이다. 미·러는 두 개의 강대국이다."(바이든)
2021년 6월 16일 저녁 제네바. 조 바이든 행정부 취임 뒤 처음으로 성사된 제네바 미·러 정상회담 모두 발언이다. 대표적으로 이해가 일치한 의제는 핵무기 감축과 핵전쟁 위협 감소를 통한 전략적 안정이었다. 두 정상은 이부분에 대한 합의만 담은 짤막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다른 모든 의제에서는 서로 입장이 달랐지만 그 다름을 인정한(agree to disagree) 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회담이 좋았고, 긍정적이었고, 생산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방의 소요는 의견이 갈린 수많은 의제의 하나였다. 하지만 미·러 정상은 어떤 갈등도 노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8개월 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졌다. 미·러 사이에는 그동안 어떤 일이 일었고, 그 과정에서 바이든은 어떤 결정을 내렸던 것일까.
제네바 이후 8개월, 차분히 준비된 전쟁
어떤 전쟁이건 단순한 이유 때문에 발발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수많은 원인 중 두 가지만 꼽자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에 따른 안보적 위협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직·간접적인 개입으로 벌어진 돈바스 및 크림반도에서의 소요였다.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부가 2021년 3월 발표한 신군사전략은 러시아 치하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방에서 테러리스트 지하조직을 조직하고, 서방 군대의 지원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토대로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전쟁이 가능함을 시사했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 개발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게 블라디미르 푸틴(70) 대통령의 진단이었다. 더 큰 위협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로부터 왔다.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중순 나토를 상대로 2가지를 요구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영원히 거부하는 문서상 보장과 나토가 동유럽 회원국들에 배치한 다국적 전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나토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중·동유럽 14개국을 새로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면서 표방했던 '오픈 도어(open door) 정책'을 고수하며 이를 거부했다. 러시아가 다른 나라의 나토 가입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논리였다. 푸틴의 눈에 우크라이나는 이미 나토의 훈련기지로 변했다. 2021년에만 2만3000명의 군인과 수천개의 중화기가 동원된 훈련을 했고, 2022년엔 10여개의 합훈이 예정돼 있었다. 보리스폴과 이바노프란코프스크, 오뎃사에는 군용비행장이, 크림반도 인근 오차키우항에는 미국 해병작전센터가 설치됐다.
"푸딩 맛을 알려면 먹어봐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80)은 제네바 정상회담 회견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 단계"라고 거듭 강조했다. "푸딩 맛을 알려면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미국 속담을 인용, 3개월이나 6개월 뒤쯤 러시아와의 협력 정도를 점검해 더 나아갈 것인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제네바 이후 '다음 단계'는 미·러가 각각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러시아군은 지난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3~4월과 10월부터 올해 2월 침공까지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였다. 바이든의 전쟁 준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의 두 갈래였다.
2021년 3월 1억2500만 달러 상당의 무기를 지원한 것을 비롯해 연말까지 4억 달러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개전 뒤에는 지난 5월 의회를 통과한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무기대여법'에따라 총 400억 달러의 지원안에 서명했다. 7월부터는 총 5억5000만 달러 상당의 HIMARS(다연장로켓시스템)를 제공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오랫동안 준비한 회심의 '푸딩'은 러시아 경제제재안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21일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 앞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상원의장, 왼쪽)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우크라이나 국기를 전달하고 있다. 국기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 방문한 최전선에서 받아온 우크라이나 병사들의 서명이 가득 적혔다. 2022.12.21 로이터연합뉴스
윌리 아더예모 미국 재무부 부장관이 지난 16일 '미국의 새로운 제재 전략'이라는 제목의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은 상세한 내용을 전한다. 우선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뒤 축적해놓은 총 6300억 달러의 국부펀드와 중앙은행 자산을 동결하고, 러시아 중앙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시켰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미국 재무부의 대러 제재안 완성 시점이다. 미국이 주요 7개국(G7), 유럽연합(EU), 호주·싱가포르·한국·대만 등 이른바 '비슷한 생각의 나라(LMN)'들과 협의를 거쳐 제재의 틀을 완성한 것은 지난해 10월. 미국 정보당국이 러시아의 침공을 예측하기 1달 전이었다.
그 사이 바이든은 '양치기 소년' 역할을 했다. 수차례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다고 경고하고 날짜(2월 16일)를 찍어서 경고하기도 했다. 바이든이 푸틴에 덫을 놓았다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제재는 단기와 장기 효과를 노리고 설계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할 재원을 말리는 동시에 반도체와 트랜지스터, 소프트웨어 등 첨단기술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러시아 군산복합체의 무기 기술과 전력투사 능력의 감퇴를 노렸다. 주요 서방기업들은 러시아를 떠났다.
더 무서운 것은 러시아 경제에 남길 장기적 타격이다. 아더예모 부장관은 러시아 경제가 전쟁 전보다 30~50%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제재는 에너지를 중심으로 각국 경제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가할 고통을 최대화했다. 러시아산 원유를 배럴당 60달러 밑으로 거래케한 게 대표적이다. 전쟁 전 100달러였다가 지난 여름 160달러로 올랐던 유가를 대폭 낮춘 것이다. 콘스탄틴 소닌 시카고대 교수는 "러시아 경제가 1991년 소련 붕괴 당시의 '백지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면서 "길고 고통스러운 재건 과정이 불가피하다(포린 어페어스)"고 내다봤다.
1석 4조, 바이든의 새 '전쟁 모델'
러시아 군사기술의 발전을 막고, 무기·자금 지원으로 전선에서 실패를 유도하며, 국가경제의 허리를 끊어놓는 방식을 조합한 바이든의 새로운 전쟁 모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탈 냉전 뒤 역대 미 행정부가 취해온 바 해당지역 국가들이 자신들의 예산으로 균형을 잡으라는 '역외균형전략'에서 진화한 모델이다. 모두가 러시아군의 실패를 말하지만, 불과 1년 전만해도 더 큰 군사적 실패의 주인공은 미국이었다. 지난해 4월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하기까지 20년 동안 1조 2400억 달러의 예산을 흙먼지 속에 날려버렸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1석 4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 러시아 동부를 지정학적 분쟁에 휩싸이게 했고, 러시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켜 미국에 대적할 수 없는 국가로 만드는 과정을 시작했다. 전쟁 전까지 각각 제갈길을 가던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동맹국을 하나로 묶었다. 여기에 돈도 벌고 있다. 개전 이후 세계경제가 침체위협으로 몸집이 줄어드는 동안 주요국 통화대비 달러화 가치는 12%나 올랐다. 엔화 대비 20%, 유로화 대비 11%, 원화 대비 10%가 올랐다. 동맹과 우방의 곳간을 털어 국부를 늘린 것이다. 여기에 8580억 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의 내년도 국방예산까지 챙겼다. 첨단무기 개발에만 1600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군의 내년 초 대공세로 전선이 바뀔 가능성이 남아 있다. 하지만 바이든은 이미 더 큰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 이쯤되면 '승자의 저주'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미국 내에서 러시아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면 나토와 러시아의 확전과 핵전쟁의 위험을 높인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냉전의 설계자였던 조지 케넌은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헨리 키신저는 물론, 미국 패권을 절대시해온 존 미어샤이어와 스티븐 월트 등 현실주의 정치학자들까지 나서 바이든의 위험한 전쟁에 일제히 경고음을 내고 있다.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모델은 시진핑의 중국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미구에 재현될 대만해협 위기를 대비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또다른 전쟁에 착수한 까닭이다.
[우크라이나] 양치기 소년의 1석 4조 '바이든의 전쟁' < 국제 < 기사본문
출처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http://www.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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