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부 유럽의 지정학적 분쟁은 '판도라의 상자'다. 민족과 종교, 역사, 언어가 뒤엉켜 '치명적인 칵테일'로 비화할 위험성이 상존한다. 글로벌 강대국(super power)과 지역 강국(regional power)이 개입하면 분쟁의 규모가 증폭된다.
개인적으로 중-동유럽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처음 깨달은 것은 1995년 부다페스트 출장길에서였다. 방한 경험이 있는 헝가리 국제문제연구소의 아틸라 게르게이 박사는 "국경 밖에 존재하는 소수민족의 문제가 헝가리 국가안보의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서울을 방문했을 때 옌볜 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 문제를 아무도 국가안보 사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고 전했다.
보스니아 전쟁은 물론, 루마니아 차우세스크 정권의 붕괴 역시 소수민족 문제에서 비롯됐다. 1989년 루마니아 티미소와라에서 시작된 광부폭동이 전국으로 번진 결과였다. 바로 티미소와라가 속한 트란슬바니아 지역에 집중거주하는 헝가리계 주민들의 해묵은 불만이 뇌관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1992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평화적으로 결별한 것 역시 잠복된 갈등이 원인이었다.
'럼프 스테이트(Rump State)'라는 단어가 서방언론에 자주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평화적 분리 또는 전쟁을 통한 병합, 점령 등의 원인으로 쪼개진 나라를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제3의 길'에 성공했던 대표적인 나라였다. 독립적으로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전쟁 뒤 이제 8개의 독립공화국으로 쪼개졌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스르프스카, 북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등이다. 대한민국 영토의 80%를 웃도는 면적(8만8361km2)에 인구 669만명(2022 추계)의 세르비아 외에는 우리 지자체 규모의 소국이 됐다.
생뚱맞게 30여년 전 시사용어를 끄집어낸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럼프 스테이트'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전'을 나라 간의 '전쟁'으로 만든 지역 강국은 갓 통일된 독일이었다. 헬무트 콜 총리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보다 몇 달 앞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를 국가로 승인해 국제전으로 만들었고, 전쟁 결과 발칸은 마르크화 경제권에 포획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는 더 큰 외부의 손이 개입하고 있다.
구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럼프 스테이트'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폴란드와 헝가리가 나온다. 각기 다른 연유에서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쟁 초기인 지난 3월 11일 러시아의 승전으로 젤렌스키 정부가 수도를 리비우로 옮겨갈 경우 우크라이나는 럼프 스테이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폴란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리비우는 서부 최대 도시로 전쟁 초기 몇몇 외국 대사관이 임시 이전했던 곳이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통신 칼럼니스트인 표토르 아코포프는 지난 4월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 세력권 내 럼프 스테이트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개전 10개월이 지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긍극적인 목표는 점령지를 최대한 확대, 러시아 영토로 병합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지방도 우크라이나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기대를 기회 있을 때마다 내비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수차례 "폴란드가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서부의 고토를 회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모스크바 발다이 회의에서도 비슷한 의중을 내비쳤다. 세르게이 나린슈키 대외첩보국(FVS) 국장은 "폴란드는 다른 이해당사국들과 우크라이나 영토를 분할할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고 역시 수차례 경고했다.
헝가리는 역으로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영토 분할 야욕을 의심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 및 국방협의회 올레스키 다닐로프 서기는 지난 5월 "헝가리가 우크라이나 서부 자카르파티아주의 일부를 병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의 헝가리 정부는 펄쩍 뒤면서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양국은 수년전부터 갈등을 빚어온 터이다.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공급받고 있는 헝가리는 개전 뒤 나토 30개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우크라이나 지원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거나 회피하고 있다. 헝가리는 2017년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정부가 헝가리어 교육을 중단하는 내용의 교육법개정안을 확정한 뒤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절충안으로 개정 교육법의 시행을 2023년으로 미뤘지만, 헝가리는 같은해 '나토-우크라이나 위원회' 결성을 막았다.
자카르파티아주는 역사적으로 헝가리 영토로 15만명 이상의 헝가리계 주민이 살고 있다. 2018년 헝가리 국경과 불과 10㎞ 떨어진 자카르파티아주 베레호브에 군사기지를 설립키로 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결정도 양국간 불화를 덫들였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나토 및 유럽연합(EU) 회원국이다. EU로부터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 때문에 힘에 의한 국경의 변경을 시도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미국과 서방의 강한 압박으로 러시아가 유지하고 있는 독립국가연합(CIS) 역내 안정이 흔들린다면 불똥이 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각국의 민족주의 에너지가 분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민족분규 '판도라의 상자' 여는 우크라이나 전쟁 < 국제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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