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은 러시아를 고립시키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러시아 관영매체의 논평이 아니다. 미국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뉴욕타임스의 지난 23일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년 특집기사 헤드라인이다. 전쟁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들을 일거에 반러시아 동맹으로 바꿔놓았고,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고립은 심화했다. 하지만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으로 러시아의 허리를 끊어놓으려는 미국과 서방의 의도가 관철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러시아가 여전히 일군의 우호적인 국가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계와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반 러시아 국가들은 사안별로 다양한 이익 결합을 하면서 미국 주도 질서와 길항작용을 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압박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유엔 결의안에 기권, 불참한 나라들
전쟁 1년을 맞아 유엔 긴급 특별총회가 지난 23일 압도적인 지지로 채택한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원칙 관련 결의안'에 찬성한 국가의 수만 놓고 보면 러시아는 고립됐다. 찬성 141국, 반대 7국, 기권 32개국이었다. 표결 불참국가를 포함하면 중립 성향의 국가의 수는 47개국으로 늘어난다. '찬성' 대 '반대·기권·불참'은 141개국 대 54개국이다. 유엔 회원국 195개국 중 네 나라에 한 나라 꼴로 '반러시아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서방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국가들의 의미는 숫자보다 중요해진다.
러시아를 포함한 브릭스(BRICS) 5개국 중 브라질(찬성)을 제외하고, 중국·인도·남아공이 모두 기권했다. 찬성한 국가 중 튀르키예와 사우디 아라비아·아르헨티나·아랍 에미리트·바레인·인도네시아 등은 오는 8월 남아공에서 열리는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신규 가입 여부가 결정되는 국가들이다. 미래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릭스의 확대 움직임은 서방 진영과 각을 세우는 국가들의 집합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여준다. 2021년 기준 브릭스 5개국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4%, 무역의 16%를 차지했다.
나머지 국가들 중 벨라루스(반대)·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6개국은 러시아의 영향권에 포함된 국가로 분류할 수 있다. 러시아가 서방의 촘촘한 제재망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틈새를 제공하고 있다는 게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미국 주도 러시아 금융제재에 동참한 국가 중 37개국은 자국 내 러시아 자산을 동결했다. 지난해 3월 7일 달러화 대비 루블화 가치는 30%가 추락해 저점을 찍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루블화가 산산이 부서졌다(The ruble is reduced to rubble)"며 조롱한 것도 이즈음이다. 하지만 4월 들어 러시아의 원유·천연가스·석탄 등 에너지 수출에 힘입어 제재 이전의 가치를 거뜬하게 회복했다. 인도와 중국은 물론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에너지를 수입했고, 튀르키예는 러시아행 화물운송량을 3배로 늘렸다. 인도와 중국은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늘렸고, 중국은 더 많은 자동차와 기계류 및 반도체를 수출했다.
루블화가 휴지 조각이 됐다고?
대 러시아 제재는 특히 항공기 부품과 전자제품용 반도체 등에 집중됐다. 수백 개의 기업이 러시아 사업을 접겠다고 자발적인 선언을 했다. 맥도널드와 애플 휴대폰, 넷플릭스를 러시아에서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제재망을 간단하게 우회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르메니아 등 옛 소련 국가들로부터 우회 수입한 덕이다.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전쟁 전년보다 10배의 스마트폰을 수입, 이를 러시아에 되팔았다. 중국과 튀르키예는 러시아가 제재를 우회하는 널따란 통로가 됐다. 중국은 자동차와 반도체 수출을 급속히 늘렸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기도 한 튀르키예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파는 동시에 러시아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창구가 됐다. 튀르키예의 대 러시아 화물 물동량은 전쟁 전에 비해 3배가 늘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작년 9월 "터키는 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정책을 유지해왔다"고 말했다. 균형 외교를 추구하는 남아공 역시 서방의 제재를 러시아와의 교역을 늘릴 기회로 보고 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러시아 올리가르히(재벌)와 엘리트들의 해방구가 되고 있다. 돌아온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이 보다 분명해야 한다"면서 유보적인 발언을 내놓았다.
인도는 개전 초부터 미국으로부터 러시아산 원유 수입 감소를 요청받았지만,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의 전략적 위치 탓에 강하게 압박하지 못하고 있다. 인도는 되레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늘렸다.
북한(반대)·베트남·파키스탄·방글라데시·라오스·몽골·스리랑카 등 아시아 7개국과, 에리트레아(반대)·말리(반대)·알제리·앙골라·브룬디·중앙아프리카·콩고·에티오피아·가봉·모잠비크·나미비아·수단·기니·토고·우간다·짐바브웨 등 아프리카 18개국도 반러시아 진영 가담을 거부했다. 이밖에 니카라과(반대)·볼리비아·쿠바·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4개국과 중동의 시리아(반대) 등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고 있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개도국) 국가들이 상당수 포함됐다.
미국과 중국이 모두 관계 개선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많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반러시아 진영을 거부하는 까닭은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서방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각국은 국가적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방식으로 분절화되고 있다. 미국 언론은 러시아와 이란,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관계를 두고 '편의의 동맹(Allies of Convenience)'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새롭게 확대되는 ‘편익 동맹’
물론 제재의 장기적 효과는 파괴적이다. 러시아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가 얼어붙었고, 러시아의 자산은 말라가기 시작했다. 원유거래 제한으로 감산을 할 수밖에 없게 됐고 유럽 시장을 대체할 아시아로의 천연가스관 건설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례 없는 글로벌 단합'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2.3% 하락에 그친 러시아 경제가 올해는 0.3%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주도한 제재는 장기적으로 러시아 경제의 30~50% 축소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최종적인 결과는 누구도 예단하기 힘든 상황이다.
군사적으로 러시아를 약화하는 것 역시 녹록지 않다. 개전 이후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는 한편,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부품을 차단해 러시아 군사기술의 약화를 노렸다. 펜타곤에 따르면 미국은 자블린 대 탱크시스템과 스팅어 방공미사일시스템, 자주포(howitzer), 고속기동로켓시스템(HIMAS),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 에이브럼스 탱크 등 320억 달러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했다. 나토를 중심으로 50개국의 우크라이나 국방컨택그룹의 무기지원액은 200억 달러다. 그러나 러시아 군을 약화하려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 용병집단 와그너에 상당한 규모의 포탄과 미사일을 제공하고 있고, 이란은 수백 대의 가미카제 드론을 러시아에 보내고 있다. 중국은 그동안 마이크로 칩과 같은 이중용도 부품을 러시아에 수출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이번 달 들어 여러 차례 "금지선(red line)"을 운운하며 중국이 러시아에 살상용 무기 제공을 검토하고 있다며 변죽을 울리고 있다. 중국은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을 뿐 전쟁 자체에 거리를 두어왔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호전 또는 진지전은 전장 밖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의 '반러시아 동맹'이 약화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이 자국의 에너지난과 경제적 어려움이 임계치에 도달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립을 유지하면서 러시아와 교역을 늘릴 기회를 보고 있다. 어쩌면 미국 역시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 '우크라이나 피로'가 심화하면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러시아에 굴복하도록 압력을 넣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진단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1년, 세계를 바꾼 8개의 숫자 (애틀랜틱 카운슬)
108,000 |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 면적(㎢) *남한 면적 |
8,000,000 |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의 국내외 난민(명) |
-90% | 러시아 파이프라인 천연가스 수출 감소량 |
60.2% | 러시아 2023년도 예산 적자(1월 현재) |
52.5% | 전쟁 중 파괴된 러시아 탱크(전체 보유량 대비) |
21개국 | 러시아군 전쟁범죄 수사 및 재판 방침인 국가 |
35개국 | 러시아군 철수 요구 유엔 총회 결의안 기권국가(2022.3.2.) |
500억유로 |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의 우크라이나 원조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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