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권(Sphere of Influence)'.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정치에 다시 등장한 개념이다. "하나의 강대국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어 다른 국가들이 도전하지 않는 지역"으로 정의된다. 도전에 소요되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엠마 애쉬포드)
세력권은 기성 강대국이 어떤 비용을 들이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 실례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러시아는 개전의 목표로 제시한 나토의 동진 저지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 중립국화 및 탈나치화 중 어떤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되레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촉발했다. 우크라이나를 중립국화하기는커녕 기존 중립국의 나토화를 초래했다. 그런데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더 많은 병력과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물러나면 '세력권' 내 러시아의 위상은 물론,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전세계가 미국의 세력권이라는 착각
미국과 서방의 희망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이 쉽게 끝나거나, 러시아가 호락호락 물러나는 일은 단연코 없을 것이다. 강대국 정치가 전쟁을 만나 자기파괴의 결과로 이어진 사례는 허다하다. 아프가니스탄을 예로 들면 소련은 1979년부터 10년을 매달리다가 결국 연방 붕괴의 한 원인이 됐다. 미국도 다르지 않다. 9·11테러 뒤 침공, 20년 동안 아프간의 흙먼지 속을 헤매었지만, 2년 전 쫓겨나듯 빠져나왔다. 그 사이 1조 2400억 달러의 혈세를 탕진했다.
애쉬포드 조지타운대 교수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부터 일관되게 미국 외교전략의 실패를 지적해온 정치학자다. 그의 지난 2월 20일 자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 '강대국 정치의 집요함'은 조 바이든 행정부를 중심으로 모두가 성급한 축배를 들고 있는 '승리주의'의 이면을 짚어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두고 다각도의 분석이 있지만 가장 굵직한 이유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러시아의 세력권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탈냉전 뒤 어느 나라의 세력권도 인정한 적이 없다.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세력권을 인정하지 않게 된 이유는 낡은 사고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전 세계가 미국의 세력권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엄 앨리슨)"
1999년 코소보 사태가 발생하자 러시아는 자국의 세력권이라고 판단했다. 코소보에 공수부대를 파견, 프리슈티나 공항을 장악했다. 하지만 러시아 공수부대원들은 나토 부대에 식량과 보급품을 의존해야 했다. 스스로가 세력권임을 입증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중국이 대만을 상대로 무력 시위를 하자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 중국을 주저앉혔다. 유일 '극 초강대국(Hyper Power)'의 지위가 통하던 1990년대였다.
그러나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두 개의 전쟁에서 실패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경제적으로 미국의 쇠퇴를 상징한다.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이라는 함정
아메리칸 파워의 한계가 뚜렷해지면서 러시아와 중국은 자국 국경 인근에서 이해를 관철하려는 노력을 갈수록 강화하고 있다.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과 점진적으로 강화되는 중국의 대만 통일 의지가 본보기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자신의 가장 큰 외교 전략의 승리라고 여긴다. 워싱턴의 많은 정치학자도 미국 외교정책이 트럼프 시대의 에피소드를 극복하고 제 궤도에 올라섰다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서 "러시아의 침공에 우리는 단합되고 원칙적이며 단호한 대응을 주도하고 있다. 국토방위를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우크라이나 국민을 지원하기 위해 세계를 끌어모았다"고 자랑했다. ·
미국의 '승리주의'가 품은 허점은 두 가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본적으로 세력권을 둘러싼 강대국 간의 경쟁으로 보지 않고, 민주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는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하게 한다. 선과 악의 싸움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악의 세력과 타협은 자기부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이 '수정주의 국가'의 단호한 도전을 격퇴할 수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막대한 비용과 위협이 수반되며, 미국뿐 아니라 동맹과 우방 국가들까지 고통을 분담하고 있다.
애쉬포드는 2022년 2월 24일 개전을 전후해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을 극명하게 갈린 점을 주목했다. 전쟁 직전에는 우크라이나군을 돕기 위해 군사자문단 파견을 검토했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은 개입 방침을 철회했다. 러시아 제재와 무기 및 첩보 제공으로 역할을 제한했다. 바이든은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제3세계의 전쟁'을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간접 개입 만으로 러시아를 궁지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예상과 달리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군이 선전하자 미국의 목표는 상향됐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러시아의 허리를 끊어놓겠다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파멸적 확전에 이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원 무기 수준을 계속 높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굴욕'을 딛고 새로운 '전쟁모델'을 만들어낸 것을 축하하며.
한·일의 가세로 커지는 대만해협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미국이 전쟁을 예방하는 데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협은 모든 나라에 평등하지 않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서방에서 인기를 누리지만, 러시아군의 폭격에 고통을 받는 자국민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애쉬포드는 미국이 전쟁 전부터 우크라이나의 주권을 지지한다는 말을 남발했던 것처럼 대만 독립을 지지한다고 떠들어대기 전에 다양한 '고슴도치 전략(porcupine strategy) 전략'을 동원해 대만의 자체적인 방위력을 높여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성급한 승리주의를 거부하고 아메리칸 파워의 한계를 인정할 것"을 주문한다. 대만에서 한계를 인정하고 전쟁을 예방하는 길은 유사시 미군 개입에 대해 반세기 가까이 유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애쉬포드의 권고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더 큰 위기로 달려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대만은 경우가 다르다. 2014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러시아를 기껏해야 '지역 강대국(regional power)'라며 사태를 키워온 오바마 행정부와 이를 이어받은 오바마 행정부2(바이든 행정부)가 전쟁 예방에 손을 놓은 결과였다. 잠자던 군사강국 독일이 깨어나고 나토 동맹국들이 국방예산을 올린 것은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진 다음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대만해협에 포연이 올라오기 전부터 공세적으로 나서는 국가들이 즐비하다. '전쟁국가'로 전환을 시작한 기시다 후미오의 일본과 한반도 평화를 고민하기는커녕 미국의 전략에 자발적으로 편입돼 대만해협 문제에 끼어드는 윤석열의 한국이 대표적이다. 한·미·일 안보협력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기치로 내걸고 북한 문제에서 대만해협으로 범위를 넓히고 있다. 수년 내 대만해협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분쟁이 우크라이나보다 더 큰 낙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 한국-프랑스, 무기수출 양대 수혜국 (0) | 2023.03.17 |
---|---|
[우크라이나] "전면전만 피하자" 끝 없이 질주하는 미-러 (0) | 2023.03.11 |
[우크라이나] '편익 동맹'의 시대, 러시아는 고립되지 않았다 (0) | 2023.03.06 |
미국은 왜 '미해군, 노르트 스트림 폭파' 특종보도를 외면할까 (3) | 2023.02.16 |
미중 스파이 풍선 해프닝의 '나비효과' … 흔들리는 동아시아 평화 (0) | 2023.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