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무어 허쉬(85).
1969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미라이 마을 학살사건을 탐사보도 해 '펜으로 미군의 베트남 철군을 끌어냈다.' 미국 저널리즘계는 이듬해 퓰리처상으로 보답했다. 2004년 조지 부시 행정부가 내지른 '테러와의 전쟁' 와중에 이라크 바그다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자행된 테러 용의자 고문도 그의 펜 끝에서 세상에 드러났다. '특종의 예술가(scoop artist)'란 극찬이 아깝지 않은 탐사보도의 전형이다.
워터게이트 특종을 터뜨린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기실, 허쉬의 다음 세대에 속한다. 그런데 탐사보도의 전설이던 허쉬가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기자가 된 것일까. 미국 사회가 그의 탐사보도물을 깡그리 무시하는 현상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노르트 스트림 폭파는 바이든의 지시"
허쉬가 지난 8일 블로그 매체 서브스택에 내놓은 탐사보도물 '미국은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을 어떻게 들어냈나'가 세계의 주목 또는, 외면을 받고 있다. 미해군이 노르웨이 해군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9월 발트해 해저에 가설된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 4개 중 3개를 폭파했다는 내용이다. 미해군 심해 잠수부대원들이 지난해 6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발트해에서 실시한 연합훈련(BALTOPS 22) 기간 중 C4 폭약을 매설했고, 3달 뒤인 9월 26일 노르웨이 해군의 P8 정찰기가 소나 부표를 바다에 투하해 원격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허쉬는 3달 동안 취재한 결과라고 밝혔다.
노르트 스트림 폭발 사건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러시아의 소행이라는 시나리오도 나온다. 스웨덴 안보국(SSS)은 초기 조사 뒤 "폭발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 테러리즘의 전례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독일 슈피겔은 사건 다음날 CIA가 독일 정부에 노르트 스트림에 대한 테러 가능성을 경고했었다면서 미국 개입설을 제기했지만 독일 정부는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고 있다.
스웨덴·덴마크 합동조사와 러시아 및 독일의 단독 조사가 각각 진행 중이다. 폭발 지점은 공해상이지만 4개의 가스관 중 2개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지난다.
허쉬에 따르면 극비작전은 바이든 대통령의 지시로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빌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 및 빅토리아 눌런드 국무부 부장관 등이 관여했다. 기사는 미해군 심해잠수부대의 선정 및 작전 수립 및 원격 폭발로의 수정, 노르웨이 군과의 비밀 협력 과정을 상술했다. 노르웨이 정보 및 군 당국은 이상적인 매설 지점의 선정부터 개입했다. 취재원은 '작전 계획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익명의 취재원 1명이었다.
미국 주류언론의 완전한 무시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라이 학살사건'보다 더 큰 파장이 예상된다. 미국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가 신뢰도 추락한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뒤에선 국가 테러를 감행한 추악한 국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서유럽 국가들의 나토 이탈 사태가 야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반전은 보도 뒤에 나왔다. 미국 주류언론의 집단적인 무시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드리안 왓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8일 언론 브리핑에서 허쉬의 기사가 "완전한 거짓이자 완벽한 허구"라고 일축했다. 이후 현지 시간 14일까지 국무부, 국방부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이 없었다. 이는 허쉬가 2015년 이후 미국 언론계에서 사실상 퇴출된 존재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허쉬는 미해군 특수부대의 오사마 빈 라덴 사살이 파키스탄 정보부가 세팅한 일종의 쇼였다는 탐사보도를 내놓았다가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물론 미국 주류언론으로부터 소나기 비난을 받았었다. 주로 허쉬가 △한 명 또는 몇 명의 익명의 취재원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점 △미 행정부 외교안보 부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 음모론적 시각 △고약한 성격 등을 문제로 꼽았다.
허쉬는 그럼에도 취재를 멈추지 않아 왔다. 2018년에는 크노프 출판사와 딕 체니 전 부통령에 관한 책 집필계약을 했다. 그러나 중요한 취재원이 협력을 취소해 집필이 어려워졌다. 막대한 선수금을 받았던 허쉬는 결국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를 팔아 배상하겠다고 제안했다. 출판사 측은 허쉬에게 "그 책 대신 자서전을 쓰라"고 역제안했다. 같은 해 자서전 <리포터>가 나온 배경이다. (뉴욕타임스)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시카고 남부 빈민가에서 자란 그는 출발부터 이단아였다. 뉴욕타임스와 뉴요커, 워싱턴 포스트 등에 글을 썼지만, 경력의 대부분을 프리랜서 기자로 보냈다. 지금도 외로운 전사다. 허쉬에 대한 비난을 그대로 듣고 넘기기 전에 미국 사회가 미국의 적을 두둔하는 '이단아'를 어떻게 취급해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국에서 '시대의 지성'으로 평가받았던 <미국 민중사>의 하워드 진과 변형생성문법의 천재적 언어학자이자 미국의 제국주의 속성을 비판해온 노엄 촘스키 등의 글은 르몽드를 비롯한 유럽 언론에 실려도 미국 주류언론에선 보기 이렵다. 허쉬의 이번 기사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미국 주류언론의 태도 자체가 '기삿거리'이다.
가스관 폭파로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미해군의 소행 여부와 상관없이 가스관 파괴로 이득을 보는 나라가 어디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허쉬가 폭파 주역으로 꼽은 미국과 노르웨이다. 미국은 유럽에 대한 LNG 수출을 늘리고 있다. 정치적으론 독일과 서유럽 국가들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 심리를 허물었다. 폭파 당일은 공교롭게 노르웨이와 폴란드가 북해산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발틱 파이프'의 개통 전날이었다.
서유럽 가스 수요의 45%를 공급하던 노르트 스트림1은 폭파 몇 달 전부터 정세 악화 탓에 가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노르트 스트림2는 2021년 완공했지만 역시 가동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폭파가 일어난 뒤 서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8~12%가량 급등했다.
바이든은 취임 이후 독일과 러시아를 운명공동체로 묶어주는 노르트 스트림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아 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0여 일 전인 지난해 2월 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러시아가 침공한다면 노르트 스트림2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리가 끝장을 낼 것"이라고 공언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그즈음 서유럽의 에너지 위기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에너지를 무기화할 수 없다면 말할 수 없이 좋은 기회일 것"이라는 동문서답을 내놓았었다.
허쉬가 가스관 폭파 결정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지목한 눌런드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 1월 의회 청문회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노르트 스트림2가 이제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해저의 고철 덩어리가 된 것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허쉬의 보도 뒤 노르트 스트림 폭파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제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허쉬는 유료 블로그 서브스택(Substack)에 정착하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다. 이번 기사는 서브스택에 게재한 첫 기사다. 미국 주류 사회는 외면하고 있지만, 진실이 안개 속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허쉬는 이번 사태를 예견했는지 서브스택에 올린 자기소개에 "내 기사가 틀렸고, 창작이며, 별나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취재를) 멈춘 적이 없다"라고 적었다. 2004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를 처음 보도했을 때 백악관 대변인이 그의 기사를 두고 "터무니없는 말의 짜깁기(a tapestry of nonsense)"라며 혹평했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바이든은 지난 7일 국정연설에서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라면서 "우리의 위력은 (우리가)힘의 본보기(example)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주는 본보기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본보기의 예로 민주주의를 들었다. 평생 기자, 허쉬의 작업도 민주주의를 지향해왔다. 허쉬와 바이든 중 누가 맞을지, 역사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https://seymourhersh.substack.com/p/how-america-took-out-the-nord-stream
[우크라이나] 성급하게 축배 든 바이든의 미국 (0) | 2023.03.11 |
---|---|
[우크라이나] '편익 동맹'의 시대, 러시아는 고립되지 않았다 (0) | 2023.03.06 |
미중 스파이 풍선 해프닝의 '나비효과' … 흔들리는 동아시아 평화 (0) | 2023.02.12 |
아시아를 화약고로 만드는 미국의 '선군(Military First)정치' (0) | 2023.02.12 |
"중국이 대만 침공한다" 미국은 왜 되풀이 경고할까 (0) | 2023.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