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중정상2] 미국이 주선한 러시아-중국의 '계약결혼'

헨리 키신저가 1970년대 중·소 갈등의 틈새에서 연 미·중 데탕트는 냉전 후반부의 세계질서를 결정했다. 미국은 소련·미국·중국의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면서 긍극적으로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이번엔 시진핑의 중국이 중심국(Pivot State)이 되어 러시아와의 '계약결혼'을 선택했다. 지난 21일 크렘린궁 중·러 정상회담에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22일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에서 열린 환송행사에서 오른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다. 배경에 오성홍기가 새겨진 전용기가 보인다.   2023.3.22. TASS 연합뉴스

미·중·러 삼각관계의 변화

중·러 결합이 가까운 시일 내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국이 단기적으로 미·중·러의 전략적 삼각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도 적다. 미·중 데탕트 당시 미국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모두 구애를 받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지금 러시아의 구애를 받고 있지만, 미국의 견제를 받고 있다. 중·러 결합이 '안정된 결혼'이 되기 힘든 연유이다. 그러나 러·중 결합이 세계 차원의 경제적, 군사적 변화의 양대 흐름인 것은 분명하다.

일각에서 '신냉전'을 거론하지만, 냉전시대와 작금의 국제 정세는 성격과 구조가 다르다. 소련은 폐쇄회로 안에 머물렀지만 중국은 여전히 서방과 경제적으로 열린 공간에서 부강(富强)을 추구하고 있다. 긍극적으로 아메리카 헤게모니를 대체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기도 하다. 다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의 전방위적인 압박에 전략적 선택을 다소 앞당겼을 뿐이다. 

러시아와의 결합은 대만해협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미·중 충돌의 위험을 분산하는 동시에 달러화 주도 세계경제 질서에 변화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러시아는 미국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 중국과 결합함으로써 외교적, 경제적 고립 속에서 넓직한 활동공간을 확보하게 됐다. 

중국 입장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패배는 최악의 상황을 예고한다. 그렇지 않아도 전방위로 압박하는 미국과 서방의 위협에 사실상 홀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푸틴이 권좌에서 밀려나고 친 서방 지도자가 크렘린궁을 차지한다면 미국의 중국 포위망은 완성된다. 시 주석이 미국의 견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의 초청에 응한 이유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1일 러·중 정상회담 뒤 공동성명 조인식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발언을 듣고 있다.  2023.3.21.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9월 위안화·루블화 결제 65%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1일 크렘린궁 공동기자회견에서 전략적 협력이 아닌 경제 협력을 앞세웠다. ‘신시대 전면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 심화에 관한 공동성명’과 함께 서명한 ‘경제협력을 우선하는 2030년 전(前) 발전계획에 관한 공동성명’의 주요내용들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양국 교역이 30%가 늘어 1850억 달러를 기록했고, 올해 초 2000억 달러의 상징적 문턱을 넘었다고 평가했다. 경협 안에서도 두 정상이 먼저 소개한 내용은 달랐다. 푸틴은 경협 공동성명에서 금융과 제조업, 기술 및 교통과 유통 등 8개 전략적 영역을 설정했다고 설명했다면서 곧바로 '탈달러화'를 언급했다. "루블화 및 위안화 결제의 확대는 교역·투자협력 촉진의 중요한 인센티브"라면서 지난해 3분기 말부터 양국 상업적 교역에서 루블·위안화 결제 비중이 65%에 도달했고, 계속 늘어난다고 강조했다. 이는 '제3의 국가들'과 글로벌 금융시장의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양국 교역을 보호한다고 말했다. 이어 원유·가스·원전 순으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국은 지난해 12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원유 결제를 달러화로만 하는 '페트로 달러' 원칙을 깨고 위안화 결제를 하기로 했다.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의 브릭스(BRICS) 국가들과도 비달러화 결제를 확대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달러화 주도 세계경제 질서의 재편을 예고하는 흐름이다.  

 

군인복장을 한 우크라이나 경찰관이 지난 17일 아브디브카의 아파트 부근에서 러시아군의 공습에 대피할 곳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2023.3.17. AP 연합뉴스

'시베리아의 힘 2' 극동 가스관 매설 합의

푸틴은 대 중국 원유 수출의 확대 방침을 확인한 뒤 곧바로 지난해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을 통한 대 중국 가스 공급이 50% 늘어났다고 소개했다. 지난 1월 양국 정부가 극동 가스관 매설에 합의한 사실도 상기시켰다. 몽골을 횡단하는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 매설을 위한 정부간 합의 이행을 앞당길 것이라고도 소개했다. '시베리아의 힘 2'의 공급량은 한해 500억㎥에 달하며, 2024년 중에 착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지난해 중국의 네 번째로 많은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출한 나라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돕고 있는 중국 톈완 7·8호기와 수다바오 3·4호기 원전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산업 부문에선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의 러시아 진출 확대 및 민항기·헬기 합작생산, 비철금속 야금, 우주 탐사, 바이오기술 분야 협력사업에 합의했다. 지난해 41%가 증가한 농산물 교역도 육류와 곡물 중심으로 획기적으로 늘릴 기회가 있다고 말했다. 양국은 시베리아횡단·바이칼-아무르·북극해 철로 및 아시아 하이웨이 사용을 대폭 늘리기로 합의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공격무기 제공이 선을 넘는다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흘리면서 직설적인 공세를 해왔다. 반면에 시 주석은 적어도 공동기자회견 석상에서 사뭇 다른 접근을 했다. 

 

대만군 병사들이 23일 타오위안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가상 상륙작전을 저지 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2023.3.23.  로이터 연합뉴스

양국이 지난 10년 간 안전성과 보완성, 복원성이 뛰어난 다면적 실용적 협력을 해온 덕분에 교역 규모가 116% 늘었다고 평가했다. 에너지·천연자원·전자제품 및 기존 정보통신(IT)·디지털 경제·농업, 서비스 교역을 확대키로 했다고 소개했다. 푸틴이 강조했던 탈달러와 가스관 개설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양자 합의에 모두 포함된 내용이지만, 두 정상이 각각 자신들이 중요하게 보는 순서대로 소개했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새로운 대국관계 모델?

시 주석의 러시아 외교는 한편으로 지난해 10월 중국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중국 특색 신형대국관계'의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변국과 1촌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강대국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기본 구도는 같다. 시 주석이 당대회를 전후해 방문한 주변국은 모두 자원부국이거나 일대일로(BRI) 거점국가들이다.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9월), 캄보디아·인도네시아(11월), 사우디아라비아(12월)를 찾았다. 러시아 역시 자원대국으로 원유와 가스 수입 및 원전 기술 제공국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중견국이 아닌, 강대국이다.  

시 주석이 모스크바 방문에 앞서 지난 19일 러시아 관영 로씨스카야 신문에 게재한 기고문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중·러가 주요 국가 관계의 새로운 모델을 키워왔다면서 상호 존중·평화 존중·상생 협력의 '새로운 대국 관계 모델'을 모범적으로 발전시켜 왔다고 밝혔다. 양국은 비동맹과 비대결 및 제3자를 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확인했다. 중·러가 코로나19 기간 동안 서로 지지, 응원했음을 상기하면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임을 입증했다고도 강조했다. 그러나 중·러가 아무리 비동맹·비대결·비적대를 강조하더라도 군사협력은 다른 이야기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인 1966년 8월 29일 베이징의 소련대사관 앞에서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이 반소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러 관계는 스탈린 이후 1950년대 국경분쟁과 1960년대 이념갈등 등 반목의 역사로 점철되어왔다.  AP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중·러 전략폭격기는 동해 인근 상공에서 연합정찰훈련을 한 뒤 사상 처음으로 각각 상대국 공군기지에 착륙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이던 지난 2월 중·러는 브릭스의 일원인 남아공 전함과 함께 인도양에서 연합훈련을 했다. 지난 15일에는 오만 근해에서 중·러·이란 해군의 연합훈련이 있었다. 한편으로 미국에 맞설 군사훈련 및 군현대화 작업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자원부국과의 경협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시진핑 외교가 지향하는 쌍둥이 목표인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중국에 유리한 형세일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움직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