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할 수 있다는 푸틴의 경고가 지난 주말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수도를 강타했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푸틴의 핵무기 발언이 실질적인 배치 수순을 밟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핵무기의 강대국 정치'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25일 러시아 국영 TV 인터뷰에서 "올여름 전까지 핵무기를 벨라루스에 배치할 준비가 됐다"면서 "미국이 수십 년 동안 해 온 것(핵무기 해외 배치)"이라고 강조했다. 전술 핵무기를 적재하기 위해 벨라루스 공군기 10대의 개조작업이 끝났고, 벨라루스 내 핵무기 저장시설도 7월 1일까지 완공된다고 우정 소개했다.
푸틴은 벨라루스 핵무기 배치가 영국의 대우크라이나 열화우라늄탄 제공 때문이라고 못 받았다. 지난 2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이와 관련, "러시아도 상응 조처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발언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모두 확정적인 발표가 아닌, 가능성을 흘리는 화법으로 핵무기를 거론했다. 주로 동시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불리해지는 국면마다 핵 발언을 배치했고 그때마다 미국을 지목했다.
러시아군 지도부가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흘리기 시작한 것은 전세가 확연히 불리해진 작년 가을부터다. 푸틴이 직접 거론한 것은 지난해 12월 초. 그는 "미국은 (핵무기) 선제타격 개념에서 (상대방 핵무기의) 무장해제 타격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면서 미국을 겨냥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하르키우와 남부 헤르손주 주도 헤르손시에서 철군했을 무렵이다.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의 무기 지원 탓에 전쟁이 길어진다고 비난해왔다.
지난 2월 21일 올해 국정연설에서는 미·러 신전략핵무기 감축협정(뉴 스타트)에 따른 미국 측의 사찰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핵실험을 재개할 수 있다고도 시사했다. 미국과 독일, 영국 등 나토 회원국들이 우크라이나에 최신 탱크와 미그기를 지원하려는 시점에 나온 발언이다.
푸틴의 핵 발언은 갈수록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공격용 무기의 수준을 높이는 미국과 나토의 위협에 쐐기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읽힌다. 공교롭게 푸틴의 인터뷰가 보도된 이날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 등 북유럽 4개국은 보유하고 있는 최신 전투기 250여 대로 연합 편대를 구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4개국 국방장관은 독일 람스타인 공군기지에서 모여 이같이 밝혔다. F-35와 그리펜 기종(스웨덴) 등 최신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중 F-35는 재래식 무장과 핵무장이 모두 가능한 이중용도 항공기이다.
미국은 러시아 측이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언급할 때마다 의미를 깎아내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에이드리엔 왓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이날 미국은 아직 러시아의 핵무기 배치가 임박했거나 의도가 분명하다는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와나 렌게스쿠 나토 대변인도 "(푸틴의)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우리는 아직 러시아 핵 태세에 어떤 변화도 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월 23일 ABC 방송 인터뷰에서 "(뉴 스타트의 잠정 유예는) 큰 실수가 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푸틴이 핵무기 사용을 생각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 또는 '생각이 비슷한 나라(LMN)'라는 말을 쓰지만, 가치나 생각만 공유하는 게 아니다. 핵무기도 공유한다. 나토의 확장억제전략은 미국이 나토 회원국들과 핵무기를 공유한다는 전제에 서 있다.
미국 '핵 과학자들의 불리틴'에 따르면 2021년 현재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한 나라는 벨기에(20개), 독일(20개), 이탈리아(20개), 네덜란드(20개), 튀르키예(20개) 등이다. 푸틴이 인터뷰에서 벨라루스에 핵무기를 배치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면서 "미국은 수십 년 동안 핵무기를 외국에 배치하고, 사용 훈련을 해왔다"고 말한 까닭이다.
푸틴의 핵 발언은 미국의 핵 독트린 안에 머물러 있다. 선제 핵무기 사용 방침과 핵실험, 해외 핵무기 배치 등 미국의 핵태세와 같은 수준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말처럼 푸틴이 실제 핵무기를 사용하려고 하기보다 유럽 국가들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내거나, 최소한 미국과 유럽의 거리를 멀리하기 위한 전략일 가능성이 큰 이유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가 전술핵무기를 동원하려고 한다면, 굳이 벨라루스에 배치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푸틴의 핵 발언이 던지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전술 핵무기가 투입된다면, 2차대전 방식의 참호전과 포격전으로 느리게 진행되는 전쟁이 일시에 러시아와의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핵전쟁'을 피하면서도 끝없이 무력 수준을 높이는 한, 언제 우발적인 확전의 불쏘시개가 될지 모를 일이다. 푸틴의 핵 발언은 갈수록 간격이 짧아지고 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벨라루스 핵 배치의 시한을 '7월 이후'로 설정했다. 나토의 전투기와 탱크 등의 우크라이나 전달은 그 전일 것으로 예상된다.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해부터 러시아가 저준위 전술핵무기를 쓸 가능성을 경고해왔다. 그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결정적인 패배의 순간을 맞게된다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미·러가 벌이는 '핵 없는 핵 게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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