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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 미국 무인기-러시아 전투기 충돌, 세계는 왜 놀랐나

by gino's 2023. 3. 17.

기어코 미·러 간 충돌이 발생했다. 14일(현지시간) 크림반도 인근 흑해 상공에서 비행 중이던 미국 무인 정찰기가 러시아 전투기와 충돌해 공해상에 추락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러가 물리적으로 부딪친 것은 처음이다.

러시아 공군기지 인근 상공서 감식돼

미국은 러시아 수호이(SU-27s) 전투기 2대가 미국 MQ-9 리퍼 무인 정찰기를 요격했다고 주장했다. 리퍼는 공격으로도 쓰이지만, 다행히 추락기는 비무장이었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주미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국제법의 심각한 위반을 따지고 러시아 외교부에 강한 항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리퍼 무인기는 미 공군의 정찰자산 중 주요 수단으로 평상적인 비행을 하고 있었다는 게 미군 유럽 사령부의 주장이다. 미군은 성명을 통해 "충돌하기 전까지 수호이 전투기가 몇 차례 리퍼 앞에 연료를 떨어뜨렸다. 러시아 전투기(조종사)의 자질 부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지적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은 최근 몇 주 동안 유사한 요격 사건이 있었다며 이번 사건을 '에피소드'라고 표현했다.

러시아 국방부의 주장은 달랐다. 러시아 전투기에 식별 당하자 리퍼 무인기가 갑자기 고도를 잃으면서 추락했다는 설명이다. 리퍼 무인기는 사고 당시 무전기를 끈 상태에서 러시아 국경을 향했었다고도 덧붙였다. 사건 발생 상공은 우크라이나에 출격하는 러시아 공군기지가 있는 크림반도 남쪽 120㎞ 지점이었다.

미국은 일단 러시아 측이 의도적으로 충돌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복수의 미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해 미국 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정찰기에 대해 광범위한 공격 전략의 일환은 아니었다고 전했다. 미·러는 이번 사건을 키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러시아 측의 공격 의도가 분명치 않은 데다가 미국 역시 타격을 입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군 전문가들은 러시아 측이 리퍼 잔해를 회수한다고 해도 중대한 기밀의 누출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우발성을 놓고 보면, 해프닝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2013년 7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제 해양방위쇼(IMDS)에서 비행묘기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 SU-27 전투기. 14일 흑해 인근 상공에서 미군 리퍼 무인기와 충돌한 기종이다. EPA 연합뉴스

14일 러시아 수호이 전투기와 충돌, 흑해에 추락한 미국 MQ-9 리퍼 무인 정찰기. 공격기로도 사용되지만 사고 당시 비무장이었다. 지난 1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에어쇼에 참석, 비행장에 전시되는 모습.  2023.1.23  AP 연합뉴스

무인기 비무장, 양측 피해 없어 

리퍼가 비무장 상태의 무인기였다는 사실은 우연이다. 무장 상태였고, 인명 피해가 있었다면 미·러 모두에 심각한 안보 현안이 될 수 있었다. 어찌보면 지극히 사소한 사건이 각국 언론의 높은 주목을 받은 사실 자체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러가 한사코 피하려는 전면전으로의 확전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미국은 무기 지원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MQ-9 리퍼는 수많은 정보획득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물론 독일 비스바덴의 미군 유럽 사령부와 러시아군은 핫라인(Hotline)을 상시 개설해 놓고 있다. 주로 간첩 혐의로 러시아에서 복역 중인 미국인의 석방 문제를 논의하고 있지만, 상호 오인에 따른 확전을 예방하기 위한 창구다.

미국의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15일 MQ-9 리퍼의 충돌, 추락 사건과 관련해 각각 러시아 측 상대인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장군과 통화를 가졌다고 밝혔다. 합참의장 간 통화는 지난해 10월 이후 처음이다. 공교롭게 이번 사건이 고위급 대화를 촉진시킨 셈이다. 오스틴 장관은 국방부 브리핑에서 "내가 거듭 강조해왔듯이 강대국들이 투명성과 소통의 본보기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국제법이 허용하는 한 미국은 계속 (정찰)비행과 작전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쇼이구 장관은 "미군이 러시아가 선포해놓은 비행금지구역에 따르지 않았다면서 "(무인기의 정찰이)본질적으로 도발적이었다"고 말했다고 러시아 국방부가 밝혔다. 이처럼 각각 자국민을 상대로 상대를 악마화하더라도, 정작 전면전으로 치달을 상황을 관리하는 게 '핫라인의 강대국 정치'이다.

핫라인의 존재 및 작동 방식에 대한 몰이해로 최근 빚어진 촌극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지난달 말 이뤄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키이우 방문이었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미국 언론을 인용해 극비리에 추진된 '007 작전'이라고 소개했다. 정치적 조작에 넘어간 결과였다. 백악관은 출입기자단에 알리지 않았고 바이든 대통령은 폴란드를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했었다. 하지만 극비리에 키이우를 방문할 이유가 없다. 러시아군 역시 3차대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바이든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무릅쓸 위협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바로 군사 핫라인이 존재하는 이유다. 대통령의 극비방문은 '전장 없는 전쟁'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했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에서나 필요했던 작전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20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함께 성 미카엘 성당 앞을 걷고 있다. 2023.2.20  AP 연합뉴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바이든의 미국 출발 몇 시간 전 '충돌 방지' 목적에서 러시아 측에 키이우 방문을 통보했다고 실토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도 자신의 텔레그램 계정에 모스크바로부터 사전에 '안전보장'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바이든을 '대양을 넘어온 늙은이(old man)'라고 적었다. (러시아 투데이)

바이든의 키이우 방문과 MQ-9리퍼·수호이 전투기의 랑데뷰는 전쟁 와중에 발생한 의도적, 우발적 해프닝에 불과하다.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스파이 풍선이 바람에 날려 미국 상공에 등장한 것을 기회로 '중국의 위협'을 한껏 강조하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오인에 의한 무력 충돌 가능성은 상존한다. 정작 중요한 순간 핫라인도 소통 수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핫라인을 개설한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 뒤인 1963년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20년 뒤 한 해에 두 차례나 핵전쟁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1983년 9월 모스크바 인근 비밀 벙커에 '미국이 (핵)미사일 7기를 발사했다'는 군사위성의 경보가 전달됐다. 소련군이 즉각 핵단추를 눌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벙커 당직장교였던 페트로프 중령이 군사위성 첩보와 달리 육상 레이더에 아무런 공격징후가 없음을 확인, 대응을 보류한 덕에 위기를 넘겼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참호전과 포격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지만, 핵강국 러시아가 참전하고 있어 확전 가능성이 상존한다.  러시아군 점령지에 있는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전 전경. 2023.3.3  타스 연합뉴스

11월에는 서독 람스타인 기지에 근무하던 미 공군 페룻 중장의 판단이 참극을 피하게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 공군기들이 핵탄두를 적재한 것을 확인한 소련군이 헬기로 핵탄두를 실어와 실전 배치하고, 미군이 다시 이를 확인한 상황이었다. 나토군이 적재했던 핵탄두는 가짜였다. 이를 진짜로 착각한 소련군이 진짜 핵무기를 준비했고, 소련군의 이상 동향에 나토군이 다시 진짜 핵무기를 준비해야 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위기는 소련군의 명백한 이상행동에 대처할 규범이 정비되지 않은 덕분에 넘길 수 있었다. 미군 극비문서는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우연할 결정'이었다고 기록했다.

1983년의 두 차례 위기는 미국 대통령의 입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칭하면서 미·소 간 어느 때 보다 긴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범'이라고 칭하면서 몰아붙이고 있다. 핵 강대국 러시아가 포함된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발적인 충돌에 따른 전면전의 위험은 상존한다. '전범'과 '늙은이' 등 미·러 사이에 입이 거칠어지는 게 더 위험한 신호인지도 모른다. MQ-9 리퍼의 흑해 추락을 가볍게 웃어넘기지 못하는 까닭이다. 

지난해 12월 1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군미디어센터 브리핑장에 놓인 러시아 Kh55SM 크루즈 미사일 부품.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미사일이다. 우크라이나 군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러시아군이  핵탄두를 장착하지는 않았지만 이 미사일을 전쟁에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2022.12.1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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