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보기관의 대통령실 도청 의혹이 불거진 뒤 윤석열 정부가 대응하는 방식은 순서가 거꾸로 됐거나 사안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0일 브리핑에서 우선 미국 언론 보도 내용이 확정된 사실이 아니며,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또 유출된 자료 일부가 수정 또는 조작됐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특정 세력의 의도가 개입됐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상황 파악이 끝나면 필요한 경우 미국 측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관건은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언론이 보도한 문건이 과연 미국의 도청 보고서인지 여부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먼저 확인해야 할 사안은 문건에 언급된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 비서관의 논의 내용이 맞는지 아닌지다. 이를 위해선 미국이 지난 3월 1일 이전 155㎜ 포탄 33만 발의 지원을 요청했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한 언급이 없이 미국 언론보도의 사실 여부 등을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말은 앞뒤가 뒤바뀐 추론이다. 미국 언론보도 자체에 대한 사실 확인에 앞서 지난 3월 1일 국가안보실 내에서 오간 대화(통화) 내용의 진위 여부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이지만 이를 무시하고 있다.
"이번 보도가 나온 상황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말 또한 생뚱맞기 그지없다. 그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이번 사건을 과장하거나 혹은 왜곡해서 동맹 관계를 흔드려는 세력이 있다면 많은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사실상 엄포를 놓았다. 기초적인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언론을 동맹 관계에 해를 끼치려는 '세력'을 지목하는 정권 차원의 관행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는 윤 대통령이 지난해 뉴욕 방문 당시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보도한 MBC에 대해 "가짜뉴스로 동맹 관계를 이간질하려는 아주 악의적인 행태"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허위 과장된 보도를 예방하려면 정부의 정보공개부터 투명해야 한다. 정부가 확인할 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언론의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매도하는 행태야말로 올해 미 국무부의 '국가별 인권보고서'에서 지적한 대로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국방부 입장의 변화에 대한 질문에 "기존 입장이 현재까지 변화된 것은 없다"면서 "그렇게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역시 정부가 이미 미국에 포탄을 수출했고, 포탄의 최종 사용자(end-user)를 미국으로 한정했다고 먼저 밝혀야 성립되는 해명이다.
대통령실은 미국 측의 언론보도에 대한 사실관계 파악을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그에 앞서 미국 정보기관이 대통령실에 대한 도·감청을 했는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외교부는 미국 언론의 보도가 처음 전해진 지난 9일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미국과 협의할 사안이 아니라, 미국 측에 설명을 요구해야 할 사안이다. 미국에 설명을 요청하지 않은 채 미국 측과 협의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을뿐더러 사안의 본질을 호도하는 대목이다.
박정희만 못 선 미 의회 연단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앞두고 미국의 도청문건을 보도하는 것 자체가 분위기를 해친다는 판단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번 방미가 국빈 방문이 된 것에 큰 의미를 둘 게 아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외교적으로 예정된 국빈방문일 뿐이다. 오히려 국빈 방문이 아니라면 이상할 일이다.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 역시 특별한 대우가 아니다. 그동안 미국을 국빈 방문한 한국 대통령은 대통령실이 밝힌 대로 이승만(1954), 박정희(1965), 노태우(1989), 김영삼(1995), 김대중(1998), 이명박(2011), 박근혜(2013) 대통령 등 7명이다. 이중 미 의회 합동회의에서 연설하지 못한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유일하다.
지난해를 예를 들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화상 연설(3월 16일)과 대면 연설(12월 21일) 등 두 차례 미 의회 연설을 했고, 그의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는 7월 20일 연설했다. 미 의회가 젤렌스키 부부의 연설을 세 차례나 경청한 것은 전쟁 중인 나라 지도자에 대한 특별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국빈 방미와 미국 의회 합동회의 연설을 엄청난 국가적 경사인 양 홍보하는 것은 대통령실이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이를 위해 주권 침해에 해당하는 대통령실 도청 의혹에 대한 규명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정상적인 독립국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김성한·이문희 갑작스런 경질 배경도 밝혀야
한미 관계가 아무리 수직적 위계의 동맹이라고 해도 정부가 투명하게 정보공개를 하고, 미국에 짚을 것을 짚어야 대통령의 정상외교가 국민적 공감과 지지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1978년 미국 정보기관의 청와대 도청 사실이 밝혀지자 전국적으로 반미 시위를 조직, 강력하게 항의했었다. 당시 관제 시위였을지언정 시위대가 들고나온 푯말에는 '한국 주권 존중하라'는 게 많았다. 물론 박정희 정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 불거지던 당시 상황과 지금 상황이 비슷하지는 않다. 하지만 주권국 국민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정부가 지금이라도 도청의 진위 파악 및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방침 변경 문제를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더불어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 비서관의 갑작스런 경질 배경도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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