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아 소피아(Holy Sophia). 비잔틴 제국이 6세기에 건립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1000년 가까이 정교회의 본산으로 여겨졌다. 오토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점령한 1453년 이후 500년 가까이 이슬람권을 대표하는 모스크의 하나로 개종했다. 기독교 성화 대신 이슬람 모자이크 문양으로 장식됐다. 1923년 서구식 민주공화국이 건립된 뒤 다시 기능이 바뀌었다. 케말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이 1935년 모스크가 아닌, 박물관으로 사용토록 했기 때문이다.
성당→모스크→박물관→모스크
이후 80여 년 동안 하기아 소피아는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의 하나가 됐다. 2019년 한 해에만 370만 명이 찾았다. 회칠한 벽면 속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던 기독교 성화는 종종 관광객들에게 무슬림을 에둘러 비난하는 소재로 활용됐다. 건물의 기능이 다시 바뀐 것은 2020년 7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모스크로 되돌려 이슬람 예배를 보도록 했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과 유네스코는 아쉬움을 표했지만 8527만 인구의 92%를 차지하는 무슬림 대중은 반겼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8일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에서 52.18%를 득표해 재선에 성공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서방 언론은 이번 대선을 보도하면서 하기아 소피아와 오토만 제국의 역사를 되새김질했다. 바로 서방이 튀르키예를 바라보는 시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네스코의 비난은 유럽과 아시아, 기독교와 이슬람을 아우르는 인류 공통의 유산을 특정 종교에 돌렸다는 논리에 집중됐다. 무슬림 대중의 마음을 사는 것은 에르도안 정치의 출발점이자, 지난 20년 집권의 기반이었다. 하기아 소피아의 '개종'은 에르도안의 정의개발당(AKP)이 히잡 착용 금지 조치를 폐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케말의 세속주의는 학교와 공공기관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을 거부했고 이는 많은 무슬림 사이에서 불만의 씨앗이었다. 또 다른 불만의 씨앗은 에르도안 이전 튀르키예 정부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구했지만, 서방으로부터 거부된 굴욕의 현대사가 잉태했다. 서방을 향한 짝사랑은 에르도안 이전부터 시효가 끝나가고 있었다.
세속주의를 일부 훼손했다고 해도 튀르키예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과 같이 정교일치의 국가가 아니다.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관광객의 하기아 소피아 방문도 여전하다. 에르도안의 탈세속주의를 반서방, 반기독교 무슬림 민족주의로 해석할 수 없는 이유다.
"케말이여, 안녕(Bye Bye Kemal)."
지난 28일 튀르키예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에르도안 대통령(69)은 당일 연설에서 케말에게 안녕을 고했다. 이중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읽힌다. '케말'은 47.82%를 득표해 패배한 케말 클르츠다로울루 공화인민당 후보(74)의 이름인 동시에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가 단순한 인물 대결이 아닌, 에르도안 대통령이 추구해온 대통령제 강력한 국가와 클르츠다로울루 후보가 표방했던 서구식 의회주의 민주국가라는 이념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서구식 의회주의는 세속주의와 함께 '튀르키예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아타튀르크가 유훈으로 남겨놓은 국가적 정체성의 핵심이다. 아타튀르크가 설립한 공화인민당(CHP)은 케말주의의 본산이다.
지난 2월 5만여 명이 숨진 대지진으로 드러난 부패한 정권의 엉터리 건축허가 문제와 이후 허술한 사후 대책, 40%를 웃도는 물가상승률 탓으로 어느 때보다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았지만, 에르도안은 임기를 5년 더 확보했다. 에르도안의 승리이자, 서구 짝사랑을 접고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에르도안 노선이 여전히 '아나톨리아 대중'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에르도안은 아나톨리아 내륙의 서민들의 표를, 클르츠다로울루는 해안가 부유층의 표를 더 많이 얻었다.
일각에선 스트롱맨 에르도안의 철권통치가 국내에서 강화될 것을 우려한다. 에르도안의 재선으로 튀르키예의 민주화가 늦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방이 경계하는 것은 선거의 국내적 영향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정학적 중요성이 높아진 튀르키예 대외정책에 집중된다.
에르도안은 당선 일성으로 '균형외교'를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취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노선을 걸을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다. 미국이 확장억제전략에 따라 중력핵폭탄을 배치해놓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서방과 비서방 사이 '균형외교' 계속될 듯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한 유엔 총회 결의안에 찬성했지만,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들이 러시아에 의존했던 에너지 수입원을 다양화하는 것과 달리 여전히 러시아 에너지를 수입하고 있다. 서방 제재 이후 되레 러시아와의 화물 운송량이 3배 늘리면서 실리를 취하고 있다. '편익동맹(Alliance of convenience)'의 대표적인 사례다.
동시에 개전 초기 서방이 지원을 꺼리던 무인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것은 물론, 튀르키예 방산업체 바이라크타르는 내년 완공을 목표로 우크라이나 내에 TB-2 무인기 공장을 짓고 있다. 우크라이나와의 교역을 중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튀르키예가 우크라이나 평화협상과 '흑해 곡물 수출 구상'을 주도한 것은 흑해와 지중해의 통로인 보스포루스 및 다르다넬스 해협의 통제권을 가진 지정학적 배경뿐 아니라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지역강국(Regional Power) 튀르키예는 이슬람권 내에서 이란·사우디아라비아에 필적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2009년 창설한 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 등과의 튀르크어권 국가 기구(OTS)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도 강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
경제난? 한국보다 좋은 전망
서방 언론은 튀르키예의 지역 영향력과 언론 탄압을 비롯한 반민주주의 정책을 묶어 에르도안이 오토만 제국의 술탄 또는 칼리프를 꿈꾸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에르도안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372만 명에 달하는 시리아 난민이다. 기실, 유럽 각국이 튀르키예 대선 이후 가장 긴장하고 있는 튀르키예의 난민정책 변화다.
에르도안이 맞닥뜨릴 가장 큰 문제는 40% 대에 이르는 살인적인 인플레와 리라화의 가치하락 등 경제문제가 꼽힌다. 그러나 급속히 추락하는 동아시아 분단국의 경제에 비하면 전망이 좋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지난 3월 전망에 따르면 튀르키예의 올해 국내총생산 실질 상승 예상률은 2.7%로 한국의 1.5%에 비해 성적이 좋다. 올해 물가반영(PPP) GDP 총액은 3.57조 달러(세계 11위)로 2.92조 달러(14위)에 그친 한국을 추월했다. 1인당 물가반영 GDP 예상치는 4만 1412달러로 한국(5만 6706달러)이 앞선다.
하기아 소피아 vs 코르도바 대성당
하기아 소피아가 건물이 온전한 채 용도만 바뀌었던 것은 오토만 제국이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아 소피아와 함께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오랜 반목과 화합의 역사를 상징하는 건물로 꼽히는 게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코르도바 대성당이다. 8세기 후반 건축된 뒤 이베리아반도 최대 모스크로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236년 스페인이 기독교화(레콘키스타)되면서 성당으로 바뀌었다. 미나레트는 종탑으로 바뀌었고 건물 내부는 도저히 '개종'이 불가능할 정도로 개조됐다. 유네스코는 코르도바 대성당의 박물관화 또는 중립화를 언급조차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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