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울릉도 인근 해상으로 북한 탄도미사일이 발사됐을 때 공습경보 후 대피 조치가 다소 미흡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한 국민행동요령과 대응 체계를 재점검해 필요한 부분은 조속히 개선해 달라."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해 11월 8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제49회 국무회의에서 지시한 내용이다. 그로부터 7개월이 다 되어 가는 지난 31일 오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다시 '안보 싱크홀'에 빠져 허우적댔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계경보' 탓에 942만 서울 시민은 꼭두새벽부터 불안에 떨어야 했다.
울릉군은 작년 11월 2일 오전 8시 55분 행정안전부 중앙민방위경보 통제센터가 '공습경보'를 발령하자 2분 정도 경보 사이렌을 울린 뒤 정확히 9시 5분, 군청 공무원들부터 대피했다.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린 것은 14분 뒤인 오전 9시 19분이었다. '울릉 알리미'를 통해 주민들에게 무작정 대피할 것을 공지했다. 사이렌만 들은 주민들은 10여 분 동안 공포에 떨다가 이번에는 대피소를 찾느라 우왕좌왕해야 했다. 실제 상황이라면 군민 9056명의 생사가 엇갈렸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당시 북한의 순항미사일은 울릉도는 물론 원전이 집중된 울산 근해에 떨어져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공습경보는 북한이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한 2016년 2월 7일 이후 처음이었다.
그로부터 7개월. 총리의 다짐이 무색하게 서울 시민들은 더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합동참모본부가 북한 우주 발사체가 평안북도 동창리에서 남쪽방향으로 발사됐다고 알린 것은 오전 6시 29분쯤. 1분 뒤 행안부 중앙 민방위 경계 통제센터가 백령면, 대청면에 실제 경계경보를 내리면서 "경보 미수신 지역은 자체적으로 실제 경계경보를 발령하라"고 전했다. 서울시는 행안부 통제센터 발표 2분 뒤 '국민 여러분께' 무작정 대피를 권고했다.
중앙통제센터는 오전 7시 3분, '06:41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이라고 다시 위급재난문자를 보냈다. 통제센터와 서울시의 혼동이 그렇지 않아도 새벽잠을 깬 시민들을 더욱 당황케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긴급 브리핑을 하고 "북한의 발사체 발사 방향이 남쪽이었기 때문에 즉각 조치가 필요했다"고 둘러댔다. 통제센터는 "'경보 미수신 지역'은 백령·대청면 내 경보 미수신 지역을 말한다"고 해명했다.
총리가 직접 나서 국민의 안전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발표한 지 7개월이 지나도록 경보의 문구 해석을 둘러싸고 왈가왈부하는 꼴을 연출한 것이다. 오 시장은 전국 17개 시도 중 하필 서울시만 과잉 대응을 한 것을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적극 행정으로 포장했다. 실제 상황이었다면 서울시와 행안부가 책임 회피를 하는 동안 932만 서울 시민의 생명이 경각에 달리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국가 방위를 책임진 군과 행안부, 서울시가 모두 관계된 일을 단순 웃음거리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으려 한다.
북한의 군사위성 발사는 올해 1월 1일 신년사 격이었던 노동당 중앙위 제8기 제6차 전원회의 보도문에서 이미 예고됐던 일이다. △또 다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체계 개발 △전술핵무기 및 핵탄두 보유량 대규모 확대 △최단 시일 내 군사위성 발사 등 3가지를 예고했다. 북한은 29일 국제해사기구(IMO) 항행구역 조정국인 일본에 군사정찰위성 1호기 발사 예정을 통보했고 30일 IMO에 "31일 0시부터 다음 달(6월) 11일 0시 사이에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통보했다. 이걸 두고 합참은 '우주 발사체'로, 대통령이 불참한 긴급 국가안보회의(NSC)는 '장거리 탄도미사일'이라고 각각 다르게 해석했다. 위협의 실체조차 오락가락했던 것이다. 어찌 됐건 서울 시민이 22분 동안 불안에 떠는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대통령은 특별한 이유 없이 NSC 긴급회의에 불참했다.
NSC 긴급회의는 그야말로 국가 안보와 국민의 안전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는 상황을 논의하는 자리다. 대통령실은 관련 내용을 대통령에게 "실시간 보고했다"라면서도 대통령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NSC 회의 시작 시간도 밝히지 않았다.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기껏 모인 NSC 회의에서 상임위원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한 일이다. 이들은 "이번 발사가 심각한 도발임을 강조했고 이를 규탄했다." 또 "추가 발사 가능성에 대해서도 계속 예의주시하면서 동맹 및 우방국들과 공조 태세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국가안보실장 국방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 외교안보 수장들이 모여 규탄하고, 주시할 것이며, 동맹과 우방국과 공조 태세를 유지하겠다는 게 발표내용의 골자인 꼴이다.
'대통령 빠진' NSC 긴급회의와 규탄을 앞세운 상임위원들, 서울시와 행안부, 이들이 이날 오전 보여준 것은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책임 방기였다. 대체 국민은 누구를 믿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인지 갑갑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허둥거림을 극명하게 보여준 지난해 울릉군 사건에서부터 7개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돌아보면 더욱 갑갑해진다.
한·미 군당국은 거의 상시적으로 한반도를 일거에 석기시대로 돌릴 수 있는 전략자산을 총동원해 온갖 종류의 합동훈련을 했고,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비롯한 다양한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은 물론 동해와 서해 해상 완충구역에서 수백 발의 포사격을 했다. 한·미와 북한 모두 핵폭탄을 적재하지 않았을 뿐 보유하고 있는 모든 첨단무기를 동원해 훈련 또는 도발을 하고 있다. 2017년 한반도 전쟁 위기 이후 처음으로 지난해 9월 미 해군 항공모함(로널드 레이건함)이 부산항에 입항하더니, 올해 2월엔 핵추진잠수함(SSN)) 스프링필드 호와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함이 잇달아 부산에 입항했다. 지난 4월 26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탄도미사일이 적재된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SSBN)의 정례적인 모습 드러내기와 '조만간 부산 입항(upcoming visit)'이 거론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전선'을 확장해왔다. 작년 12월 발표한 인도태평양전략보고서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의 안정이 한반도의 평화, 안정에 중요함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하더니,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을 자극했다. 미국 방문은 앞둔 지난 4월 19일 대통령의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는 대만해협 문제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모두 개입할 것을 시사하는 오지랖을 내보였다. 대만해협에서 긴장이 높아지는 것과 관련해 "(중국이)힘에 의한 현상 변경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과감하게 정의했다.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과 대량 학살, 전쟁법의 심각한 위반의 경우"를 전제로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중국과 러시아 정부의 강한 반발을 일으킨 것은 물론이다. 대통령이 '세계 평화의 수호천사'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선택이 될 수 없다. 그로 인해 야기할 국가적 긴장지수의 고조를 면밀하게 고려했어야 했다.
공공기관·학교 민방위 훈련 무색
정부는 지난 5월 16일 전국적인 민방위 훈련을 6년 만에 실시하기로 했다가 대통령이 같은 달 9일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부터 시작해 다음 단계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지난 9일 관공서와 공공기관 5,707개소와 전국 초·중·고 1만 2,151개소가 민방위 훈련을 한 결과가 31일 아침의 ‘대국민 블랙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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