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이슈와 한반도 분단 구조가 겹치면 시야가 더 복잡해진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렇다. 북한은 탈냉전 이후 미국과 서방이 지원 또는 주도하는 전쟁에 일관되게 반대 입장을 보여왔다. 보스니아전쟁의 경우 세르비아를 지지했고, 걸프전과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해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선 지난해 2월 24일 개전 이후 러시아를 일방적으로 지지해왔다. 작년 9월 30일 러시아에 합병되기 전까지 돈바스 지방의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공화국을 가장 먼저 국가로 승인한 나라도 북한이었다. 한국이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고 우크라이나에 막대한 경제적,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과 대비된다. 머나먼 우크라이나에서 남북 간 제2의 분계선이 생긴 셈이다. 1990년 6월 12일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출범을 기념하는 지난 12일 '러시아의 날', 서울과 평양에서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남북에 주재하는 러시아 대사관이 각각 다른 역할을 맡고 나섰기 때문이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국경일을 맞아 예년 수준의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소개하는 데 그쳤지만, 주북 러시아 대사관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적극적인 선전의 장으로 활용했다.
주북 대사관은 이날 페이스북에 '로동과 전투 속에 맞는 로씨야(러시아) 국경절'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렸다. "순탄치 않은 정세 속에 국가 명절을 경축한다"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전하고 러시아의 입장을 소개했다. "서방과 맞서 싸우면서 우호적 나라들과의 련계(연계)를 강화하고 있다"면서 "그 나라 중에는 우리의 ‘전우’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다"고 밝혔다. 몇 달 동안 진행된 포위 작전 후 최근 바흐무트를 점령한 소식을 앞세웠다. 전쟁과 민족성, 언어, 종교의 특성에 따른 박해로부터 벗어난 300만 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받아들였다고도 강조했다. 러시아가 지난해 9월 30일 병합한 루한스크·도네츠크·헤르손·자포리자 주 점령지 또는 러시아 본토에 난민을 받아들였다는 말로 읽힌다.
주북 대사관은 러시아 국경절 게시글에 23장의 지도와 사진을 덧붙였다. 단연 시선을 끈 사진은 국산 155㎜ 곡사포용 포탄이었다. 러시아어와 조선어 설명에는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우회적으로 무기·포탄을 제공하고 있음을 적시했다. 사진에는 제조업체 '풍산(금속)'과 함께 '항력감소 고폭탄'이라고 쓰여 있다. 첫 단락은 사진과 곁들인 설명을 다소 줄여 소개한 것이다.
문구 내용을 뜯어보면 새로운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폴란드에 K2 흑표 전차와 K-9 자주포 등을 수출하고 폴란드가 낡은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사실이나, 지난해 말 155㎜ 포탄을 미국에 보내 미국이 비축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내용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조건부 살상무기 지원 가능성을 흘린 뒤 숱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적어도 아직은 현상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폴란드를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과 미국을 우회해 간접적인 무기·포탄 지원은 있지만, 명시적인 직접 지원은 이뤄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한국의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과 관련한 러시아 측의 반응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대폴란드 무기 수출과, 대미국 포탄 수출이 진행되던 지난해 10월 27일 모스크바 발다이 회의에서 경고한 내용을 아직까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19일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나 대량학살 또는 전쟁법의 심각한 위반과 같이 국제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재정적 지원만 제공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며 살상무기의 직접 지원 가능성을 시사한 뒤 "반러시아 적대행위로 간주할 것(러시아 외교부)"이라며 표현 강도를 다소 높였지만 기본 입장은 유지했다.
대한민국 국가안보실 고위 관계자가 지난 7일 '윤석열 정부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한 언론브리핑에서 한 말과 일치한다. 그는 "정부가 현재 우크라이나가 지원을 희망해온 내용과 품목을 추리고 있다"면서도 "직접적인 살상무기 지원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주북 러시아 대사관이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전하면서 굳이 한국산 포탄 사진을 집어넣은 의도는 무엇일까. 대사관 측은 지난 5월 3일에도 페이스북에서 러시아산 자주포의 위력을 전하면서 "남조선 당국도 조만간 포탄 공급을 시작할 수 있다고 수시로 떠벌리고 있다"는 설명을 우정 포함했다. 모종의 상황 변화가 진행 중이거나 최소한 임박했다는 신호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페이스북 게시글은 "콩 심은 데 콩나오고 팥 심은 데 팥 나온다"는 우리 속담과 함께 "심은 대로 수확하게 된다"는 러시아 속담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무기 지원을 주시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이 지난 4월 20일 텔레그램 계정에 적은 라틴어 '퀴드 프로 쿠오(Quid Pro Quo·대가)'와 같이 무기 지원이라는 행위에 후과가 따를 것을 경고하는 메시지다.
러시아 측은 한국의 포탄 지원 가능성을 계속 언급하는 것과 달리 북한의 대러시아 무기·포탄 지원 사실은 단호하게 부인해왔다.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는 5월 24일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통신 인터뷰에서 북한의 포탄 공급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북한이 처한)복잡한 전쟁 전야의 상황 속에서 축적한 무장 장비들은 바로 이 나라에서 이용될 것"이라며 "러시아는 자체 무기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한 <시민언론 민들레>의 질의에 "주북 대사관의 콘텐츠(게시 내용)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권한 밖이라 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주북 러시아 대사관이 페이스북 게시글에 한국산 포탄 사진을 게재한 이유는 13일 현재, 확인하지 못했다. 단순한 프로파간다의 연장인지, 모종의 변화를 반영한 것인지 추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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