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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70년] 미국은 종일 추념, 우리는 짧은 묵념 뒤 시장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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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1950~1953년 한국전쟁에서 함께 싸운 한·미 양국군의 노고를 기억한다. 3만 6000여 명의 미군과 미군에 배속됐던 7000여 명의 카투사(KATUSA) 장병들을 포함해 더 큰 자유의 세계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의 희생에 존경을 바친다. (…) 모든 미국민이 이날, 우리 한국전쟁 참전군인들의 힘과 희생, 사명감을 되새기기를 권한다. 모든 미국민이 한국전쟁 참전군인을 기리고 감사하는 추념행사와 활동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기를 바란다."

미국이 2009년 한국전쟁 정전기념일을 '한국전쟁 참전군인 정전협정의 날'로 바꾼 뒤 백악관과 모든 연방건물에 조기를 처음 게양한 장면. 공휴일은 아니지만 국가적인 추념일이다. 2009.7.27.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부산 중구 자갈치시장에서 장어를 손으로 잡으며 활짝 웃고 있다. 미국은 대통령포고령으로 한국전쟁에서 숨진 3만 6천여 명의 미군병사들을 추념하기 위해 백악관에 조기를 게양하는 날, 민간인을 포함해 수백만 명이 산화한 전쟁이 멈춘 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여준 퍼포먼스다. 2023.7.28. 대통령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전쟁 정전협정 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26일 발표한 포고문이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09년 정전기념일의 명칭을 바꿨다. 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참전군인들을 앞세워 '한국전쟁 참전군인의 정전협정의 날(National Korean War Veterans Armistice Day)'로 바꾸었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이날 하루 백악관을 비롯한 모든 연방정부 건물에 조기(弔旗)를 거는 추념일이다. 잊힌 전쟁과 그보다 더 잊힌 참전군인들의 희생을 기린다. 올해는 특히 70주년이라서 그런지 무거운 의미가 담겼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한 동맹 70년을 맞이하는 올해'라는 말로 포고문을 시작했다.

나라마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역사적, 문화적 내력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상시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미국은 참전군인(veterans)에 초점을 맞춘다. 현충일이 따로 있건만 한국전쟁 전사자를 따로 기리는 기념일을 둔 것은 미군이 치른 어떤 전쟁 못지않게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당황스러운 것은 미국 대통령이 3만 6000여 명의 미군 전몰장병을 기리는 포고문에 엄숙하게 서명을 한 이날 을 대한민국 대통령실은 아무런 공식 언급이 없이 맞았다는 점이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일(73주년)이 아니라, 정전협정 기념일이 꺾어지는 해, 정주년이기에 의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은 이날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과 함께 부산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기념행사장에서 연설을 했지만 정전협정이 아닌, 유엔군 참전의 날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장에서 스러진 국군과 민간인 희생자들은 거론하지 않았다. 유엔사 참전국 전사자 위령탑에서 짧은 묵념을 했을 뿐이다.  기념사에서는 2030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세일즈를 강조하기도 했다.  

국가보훈부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주최하는 '유엔군참전의 날' 기념행사 안내가 인천공항에 걸려 있다. 2023. 7.21. 김진호 에디터

대통령은 앞서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 "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가지도자의 메시지로 보기엔 바이든의 포고문에 비해 한없이 가벼웠다. '한미동맹 70주년 특별전시회 관람 인사말'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결단, 피눈물 나는 노력, 따뜻한 우정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인사말 제목이 말해주듯 초점은 '사람'이 아닌, 한미동맹이었다.

국가지도자의 말이 갑남을녀의 말과 다른 것은 형식과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인사말에서 국군 전사자 16만 명을 포함해 62만 명이, 미군 전사자 3만 7000여 명을 포함해 13만여 명이 전사·부상·포로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언급했다. 국군 12만여 명과 미군 7500여 명의 실종자도 말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가 많은 분께 동맹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는 결구가 말해주듯 그야말로 인사말에 불과했다. '7월 23일, 주(our Lord)의 해로 2023년, 미합중국 건국 248년, (이 문서에) 서명한다. 조지프 R. 바이든'라는 포고문의 결구와 차원이 다르다.

우리 대통령도 정전협정에 즈음해 전사자에 예우를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26일 서울공항에서 6·25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7위의 봉환 행사를 주관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국가는 미래가 없다"면서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와 평안남도 금화 전투에서 숨진 국군 유해 7위를 정중히 맞았다. 그런데 한국전쟁에서 사망하신 유해를 왜 하와이에서 모셔 올까. 이는 대한민국이 정전 이후 북한 지역에서 국군 유해를 단 한 구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찾으려는 노력조차 기울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1996~2005년 북한과 함께 유해 공동 발굴을 통해 1995년 208상자, 2018년 55상자의 유해를 하와이 법의학센터로 모셔 와 신원 확인 작업을 벌여왔다. 미군 유해인 줄 알고 모셔 왔다가 유전자 분석 결과 '우연히' 한국군 또는 카투사 장병의 유해로 확인된 것을 건네줄 뿐이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인 27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한반도 평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철책에 평화를 기원하는 리본을 달고 있다. 2023.7.27. 연합뉴스

형식과 격에서 차원이 달랐지만 한·미 대통령의 말에서 유일하게 일치하는 점은 '군인'만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민과 미국민에게 한국전쟁은 결코 같은 무게로 기억되지 않는다. 수만 명의 죽음과 수백만 명의 죽음의 무게는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수만 명의 전사를 언급하는 데 그쳤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수백만 명이 스러졌다. 민간인 희생을 간과한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 국회 연단에서 섰던 역대 미국 대통령조차 한국민의 희생을 종종 언급한다. '대략 200만 명의 한국인'이 숨졌음을 상기시킨 린든 존슨 대통령(1966년 태평로 국회 연설)이 대표적이다.

나라마다 전쟁을 기리는 방식은 다르다. 그 문화도 다르다. 하지만 무슨 자유니, 민주주의니, 동맹이니 하는 번지레한 말보다 죽음을 기리는 마음이 중심이 돼야 한다. 평화협정으로 종결되지 않았기에 미래에 더 큰 희생이 발생할 수도 있는, 진행 중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고작' 3만 6000여 명의 자국군이 희생된 미국이 국가적인 추념일로 정전협정 기념일을 기린다. 우리는 이날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바이든의 포고문을 읽으며 새삼 객관적으로 보게 된 대한민국의 이상한 정전협정일 기념 문화다.

정부 부처로 승격된 국가보훈부가 연 기념행사는 이름부터가 '유엔군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으로 유엔군 참전군인들을 초청해 갖는 감사와 보은의 행사였다. 정전협정의 무거운 의미와 죽음을 기리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북한에서 정전기념일은 '전승절'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가운데)이 전승절 70주년 기념공연을 러시아 군사대표단(왼쪽), 중국 당-정부 대표단과 함께 관람하고 있다. 2023.7.27.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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