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광복절 제78주년. 이날을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들의 영혼 앞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날 오전 경축사를 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장소였다. 광복은 바닷물도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기쁜 날이다. 그러나 결코 마음껏 웃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하다. 학대받고, 고문을 당하며, 그럼에도 광복의 꿈을 놓을 수 없었기에 죽임을 당한 그분들의 피가 엉 자취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광복절, 올 삼일절 경축사 잇는 메시지
애타게 이날을 기다리다가 먼저 가신 선열들의 혼을 어찌 피 울음 없이 마주할 수 있겠는가.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 수밖에 없는 날인 까닭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길이길이 지켜야 할 대한민국이자, 길이길이 기려야 할 혼백들이 아니겠는가. 대통령 경축사의 첫 마디는 마땅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께" 경의를 표했다. 곧이어 광복, 조국을 되찾은 날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라를 빼앗긴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각오가 뒤따르는 게 광복절 경축사의 '원형'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은 곧바로 전혀 새로운 경축사를 읽기 시작했다. 경악, 그 자체였다.
"일본은 이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라고 규정하더니 한·일 양국을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로 묶었다. 유엔사령부에 제공하는 후방기지 7곳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차단하는 최대 억제 요인"이기 때문이란다.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 아침 경축사에 등장한 '일본'이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으로 규정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자유, 인권, 법치라는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함께 연대할" 대상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논리였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인권을 짓밟았으며, 무법천지의 포악한 식민 지배를 35년 동안 했던 그들과 협력하려면 '자유·인권·법치'를 훼손한 역사를 정리한 뒤에나 가능하다.
자유·인권·법치 짓밟은 일본과 가치 공유?
현실 국제정치에서 일본과 협력할 사안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삼일절과 광복절, 국치일에만은 피압박, 피지배의 설움을 되씹고 함께 울고, 함께 울어야 하는 날이다. 결코 협력이 앞설 수 없다. 이를 부인하면, 헌법 전문에 망토 박힌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나라의 국민이 아니다.
광복 5년 만에 강대국 정치의 소산으로 발생한 한국전쟁과 뒤이은 분단의 징한 세월 탓에 식민지배를 정리할 기회를 잃었다고, 한·일 관계의 새로운 출발의 명분과 원칙까지 없어진 건 아니다. 그런데 '1호 영업사원'은 일본이 닥치고 협력해야 할 대상이라고 집요하게 우겼다.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라면서도 일본이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라고 한껏 강조했던 올해 삼일절 경축사와도 한 줄로 이어지는 막무가내다.
비슷한 동아시아 안보 현실을 공유하는 일본은 올해도 보란 듯이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서 패전일을 추념했다. 오는 18일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 초대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공물을 봉납했고,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 안보 담당상이 직접 참배했다. 현직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2020년 이후 4년째 이어졌고, 기시다 총리는 2021년 10월 취임 이후 같은 해 10월 작년 4월, 8월, 10월, 올 4월에 각각 공물을 봉납했다.
국민을 두 개로 쪼개놓은 경축사
올해 광복절 경축사가 특히 경악스러운 것은 막무가내식 논리 때문만이 아니다. 독립을 희구했던 그분들은 하나였다. 독립운동이 "단순히 빼앗긴 주권을 되찾거나 과거의 왕정국가로 되돌아가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그분들이 바란 것은 단순하건 복잡하건 빼앗긴 주권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힘든 길을 걸었던 분 중에는 왕정국가를 복원하려는 유학자들도 있었다. 전근대 왕정 복구자들에서부터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가 울력으로 저항한 것이 독립운동의 요체다. 실제 그 무슨 '주의'니, 이념이니, 사상이니 하는 추상적인 가치의 신봉자는 적었다. 독립된 나라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은 수많은 일자무식의 아우성이 더 컸다. 그런데 경축사는 그 '하나'마저 쪼갰다.
연설은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면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을 도려냈다. '반국가세력'에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은 국민은 너무 많다.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온" 국민을 포함했다. '1호 사원'이 그토록 강조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추구하는 활동가들까지 '반국가세력'에 쓸어 담았다. 또 민주주의와 인권과 진보주의를 지향하는 게 공산전체주의 세력과 무슨 상관이 있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저항한 국민을 공산주의자라고 덤터기 씌웠던 군사독재정권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공허한 세계시민의 자유·평화·번영
자유·인권·법치를 강조하지만, 정작 그 가치를 내버리는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연설이 강조한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모으는 연대의 정신"은 바로 민주주의·인권·진보주의를 공격하라는, 공격하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하나를 쪼개놓고, 하나의 절반을 공격하라면서 내세우는 "세계시민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위해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기여를 다 하는 글로벌 중추국가의 비전"은 신기루일 뿐이다.
앞에 소개한 노랫말은 <광복절 노래>의 1절이다. 1949년 11월 9일 자 경향신문 2면에는 이승만 정권이 전 국민을 상대로 광복절을 비롯한 6개의 노래를 공모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정인보 선생이 작곡하고 윤용하 선생이 작곡한 노래가 <광복절 노래>로 선정됐다. 1950년 1월 1일부터 전국 관공서, 학교, 기타 식전에서 통일적으로 부르게 한 바로 그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유·인권·법치를 짓밟은 일본을 협력 파트너라고 칭하면서 국민을 쪼깨는 짓은 적어도 광복절에는 하지 말았어야 했을 '망발'이다. 대체 가사의 뜻을 되새기면서 불렀다고 믿을 수 없는 게 78회 광복절 아침에 맞닥드린 현실이다. 2절은 이렇다.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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