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과 헤즈볼라가 하마스를 지지하고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이번 사태가 국제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이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면서 전한 말이다. 지난 7일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5차 중동전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등 양대 거대 이슈에 한동안 파묻힌 국제정세에 새로운 악재가 되고 있다.
취임 이후 분쟁의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다른 쪽을 배제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입지를 줄여온 대통령의 그간 언행에 비하면 그나마 부정적인 요소가 적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한 꺼풀 들어가면, 여전히 국제문제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눠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치우침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의 반발을 야기할 터. 불필요하게 우리의 전쟁, 우리의 분쟁이 아닌 사안을 일도양단하는 것은 단순히 국가의 대외 전략을 꼬이게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로에선 한·러 관계에서 보듯 국가 차원의 경제적, 안보적 비용 지출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란과 헤즈볼라가 하마스를 지지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은 이란과 헤즈볼라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상 전 이슬람권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 지난 세기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은 이집트는 물론, 2020년 9월 아브라함 협정에 의해 관계 정상화를 했거나, 추진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팔레스타인의 절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슬람권뿐만도 아니다. 유엔 안보리로 대표되는 국제사회도 75년 동안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해 왔다. 팔레스타인 난민에 관련된 안보리 결의안만 187개다. 이스라엘이야말로 유엔 헌장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도 미국의 비호 아래 건재해 왔다.
이스라엘의 국경봉쇄, 구호물품 차단,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돼온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은 상당한 반향을 얻어왔다. 정당하기 때문이다. 무장정파의 폭력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스라엘의 국가폭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대통령이 언급한 '영국·프랑스·독일'에 더해 미국과 이탈리아 등 서방 5개국이 9일 내놓은 '이스라엘에 관한 공동성명'은 하마스의 공격을 테러 행위로 규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란'과 '헤즈볼라'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서울시의 절반을 약간 넘는 면적(365㎢)에 230만 명이 몰려 사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중동 전반의 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이란 관계는 대통령이 지난 1월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해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는 발언을 내놓아 감정이 악화된 상태다. 이란과 UAE의 관계 개선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물론, 졸지에 한국을 이란의 '비우호국'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한국이 이란에 돌려줘야 할 원유 대금 70억 달러를 지난 8월 상환해 개선 여지를 확보한 양국 관계를 다시 험악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하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세계관을 탓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국가의 운명을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란이 팔레스타인과 하마스를 지원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상식이다. 이란 혁명정부는 이스라엘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fabricated entity)'이기에 "지도상에서 지워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 역시 일관되게 표명해 왔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8일 이스마일 하니예 하마스 지도자 및 지아드 알나카라 이슬람 지하드 운동 대표와 잇달아 통화를 하고 지지를 확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지지'와 '지원'은 다르다. 이란의 하마스 지원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언급하지 않는 게 맞다. 대통령의 이란·헤즈볼라 언급은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에 제기한 '이란 배후설' 탓에 뒤숭숭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이란 배후설'은 길라드 에르단 주유엔 이스라엘 대사가 8일 공개적으로 제기한 주장이다. 에르단 대사는 "우리는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 주변 '테러 군대' 지도자들의 회의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면서 이란을 지목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같은 날 이란 혁명수비대가 지난 2일 베이루트에서 하마스(가자지구, 수니파)와 헤즈볼라(레바논, 시아파) 등 4개 무장정파 지도자들과 회의를 갖고 하마스의 공격작전을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유엔 주재 이란 대표부는 8일 성명을 통해 이란 배후설은 이스라엘이 유포한 가짜뉴스라면서 선을 그었다. 이란 외교부 대변인도 같은 날 하마스의 '알-아크사 홍수' 작전은 "저항그룹들과 피압박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빼앗길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벌인 자발적인 움직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11일 현재까지 이란 배후설을 인정한 나라는 없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CNN 인터뷰에서 "이란이 이번 공격을 지휘했거나 배후라는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확인했다. 찰스 브라운 미 합참의장은 이란 개입설과 관련, 아예 "이란은 개입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란이 문제"라는 인식을 밝히고 있는 유명 정치인은 선거판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정도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 아니듯, 이·팔 분쟁 또한 우리의 분쟁이 아니다.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평화적 해법을 찾도록 촉구하는 정도가 한국 정부가 표명할 수 있는 입장이다. 유엔 안보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안보리 15개 이사국을 상대로 하마스의 테러 공격을 비난하는 결의안 채택을 주장했지만,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세계는 미·러, 미·중 갈등 속에 아무런 거버넌스가 없이 무질서로 치닫고 있다. 우리 코가 석 자다. 한반도 안팎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만도 벅찬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대통령의 '위험 발언'은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대체 팔레스타인 문제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어온 서방 주요국들도 넘지 않는 '선'을 왜 동아시아 분단국 대통령이 넘으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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