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읽는 입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주제의 하나가 팔레스타인 문제다. 통상 국제분쟁을 읽는 수순은 일단 현상을 짚고, 그 배경을 뒤져본 뒤 향후를 전망하는 3단계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는 어떠한 정치학적 분석도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학자의 견해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국제정치라기보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 빚은 세계사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휴지통에 들어간 안보리 결의 187개
섣부르게 덤볐다가는 "그래서 뭘, 어쩌자고?"라는 비아냥에 봄 눈 녹듯 의미 없는 작업이 되기 십상이다. 아무리 성토, 규탄하고 정치적 해결을 촉구해도 허망한 외침이 되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의 분석과 진단, 전망이 늘 허망하게 귀결됐다. 장장 76년 동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비하면 한반도 문제는 쉬운 문제"라는 헨리 키신저의 말이 이점에선 맞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엔이 무력화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1947년 11월 29일 자 유엔 총회 결의 181호는 영국의 위임통치령(Mandate of Palestine, 1927~1948) 하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 및 유대인 국가 분할 계획 및 예루살렘의 국제적 지위를 제시했다. 이듬해 5월 4일 이스라엘의 건국을 전후해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자기 땅에서 추방당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거론한 4월 1일 자 안보리 결의 43호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심각한 폭력과 혼란에 우려를 표하며 유대인 기구와 아랍 고위급 위원회 구성을 결의했다. 6개월 뒤인 11월 19일 자 총회 결의 212호는 팔레스타인 난민 지원을 촉구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중단을 촉구한 2016년 12월 23일 자 2334호를 끝으로 안보리 결의만 187개가 나왔다. 총회 결의도 얼추 그 정도 된다.
미국이 지난 7일 하마스의 공격 뒤 안보리에서 하마스 규탄 결의안 채택을 시도했던 것도 16일 러시아가 민간인에 대한 폭력 및 테러 규탄 결의안을 상정했다가 부결된 것도 안보리 무능의 긴 역사에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절규와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권고·통보·규탄도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만큼 나왔다. 1963년 베이루트에서 시작한 팔레스타인연구소(IPS)가 출간한 책만 600여 권이라고 한다. 수천, 수만 권의 책이 현상을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했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방치할 수도 없는 게 팔레스타인 문제의 딜레마다.
'세계정부'의 부재
국제사회가 합의와 양보로 문제 해결에 큰 발걸음을 내딛은 것은 크게 두 번이다. 1978년 미국·이스라엘·이집트 정상의 캠프 데이비드 협약 및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이 그것이다. 두 번의 시도 역시 순교자만 남긴 채 미완성으로 끝났다.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오슬로 협정 2년 뒤에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유대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됐다. 현재 벌어지는 가자지구 비극의 씨앗은 2006년 뿌려졌다. 아이러니하게 민주적 선거의 결과였다.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하마스가 집권 파타당을 누르고 승리하자 분열이 시작됐다. 하마스는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타당과의 유혈 충돌 끝에 이듬해 가자지구 실권을 장악했다.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 파타당)이 통치하는 요르단강 서안 및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 등 3개의 실체가 들어서게 됐다. 팔레스타인의 분열은 이스라엘 우파에 '기회'였다.
하마스의 무기 수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군의 가자 봉쇄가 시작됐다. 수시로 전기와 수도는 물론 식량과 의약품을 비롯한 생필품과 구호품 공급이 끊은 것도 이때부터다. 한편으로 유대인 정착촌은 아메바처럼 증식했다. 230만 명의 가자지구 주민이 '지붕 없는 감옥'에 갇힌 채 '인간 짐승(Human-Animal)' 취급을 당하며 살아 왔지만, 세계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되레 안주했다. 이번 사태 직전 이스라엘 당국자들은 아이언돔의 효능을 믿으며, 하마스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은 사태 열흘 전 "중동이 매우 조용해 온 덕분에 미국이 세계 다른 지역을 챙길 수 있게 됐다"고 떠벌였다. 지난 7일 하마스의 선제공격은 가자지구 '인간짐승'들의 고난을 기정사실로 여겼던 세계에 사이렌을 울렸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전시내각 회의를 열고 있다. 최신 장비로 무장한 15만 명의 정규군과 30만 명의 예비군이 상대할 하마스는 고작 1만 5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전쟁은커녕 가자 주민 전체를 집단징벌하겠다는 선언이다.
45만 명과 1만 5000명의 '전쟁'
17일(현지시각) 가자지구 북부 알아흘리 병원에서 발생한 폭발은 그 단면에 불과하다. 병원 마당에서 터진 미사일로 19일(한국시각) 현재 471명이 사망했다. 이 와중에 텔아비브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놓고 이스라엘의 역성을 들었다. 다른 무장정파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가 인근 묘지에서 잘못 발사한 미사일이라는 게 이스라엘 군당국의 주장이다. 그러나 군사작전 중 군인들이 하는 말은 일단 의심하고 듣는 게 안전하다. 바이든의 이스라엘 편들기는 제 발등을 찍은 결정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오슬로 평화협정의 주역들 이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담대한 지도자는 없었다. 각국 지도자들의 방문과 회담, 논의가 이어지겠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할 전망이 안 보인다. 점잖게 한발 물러서 미국을 비난하는 러시아와 중국 지도자나, 이스라엘과 수교를 앞두고 잠시 주춤하게 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자발적으로 단역을 하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과 안보리는 대체 왜 봉급을 받는지 모를 지경이 된 지 오래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오래된 현재'는 정체된 채 이어져 온 게 아니었다. 역사학자 라시드 할리디 컬럼비아대 교수는 그 시간을 끊임없이 '압력을 높여온(pressure cooking)' 기간으로 해석한다. 가자지구에는 그 어떠한 증기 배출구도 없어 왔다. 이번 사태를 터질 게 터진 사건으로 보는 시각은 많다. 할리디의 견해가 눈에 띄는 것은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수백만 명의 피압박 민족이 언제까지 야만적인 환경에 노출되게 할 수 없다. 이번 사태는 그 선언이었다. 국제사회의 노력도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극우 포퓰리즘의 실험실'
할리디가 지난 9일 미국 민간 단체 '지금, 민주주의(Domocracy Now!) 인터뷰에서 내놓은 패러다임 전환은 바이든이 18일 이스라엘 방문길에 계획했던 아랍국 정상들과의 회담이 무산된 것에서 단초를 보였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및 마무드 아바스 PA 수반은 전날 알아흘리 병원 참사를 이유로 일제히 거부했다. 하나 같이 이스라엘과 수교한 것은 물론 미국의 중동정책에 편승했던 지도자들이다. 그들조차 미국 대통령의 회의 제의를 거부한 것은 일대 사건이다.
기실, 변화의 흐름을 먼저 간파한 것은 베냐민 네타냐후의 신파시스트 정권이다. 그는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뒤 미국 주도 대러시아 제재에 불참한 것은 물론, 우크라이나가 요구하는 살상무기 제공을 거부해왔다. 미국 주도 세계질서의 균열을 간파하지 않았으면 취하기 힘든 독자행동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입증된 바 상당한 지역 영향력을 행사하는 러시아에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지정학적 움직임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을 흔들지 못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 될 수밖에 없지만, 이스라엘 민주주의가 유일한 처방이다. 팔레스타인의 항구적인 평화에 앞서 이스라엘의 항구적인 민주주의가 구축돼야 정치적 과정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무력 개입을 제외하고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이스라엘 극우 정부에 대한 경제제재(토마 피케티)가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통산 16년 동안 이스라엘을 '극우 포퓰리즘의 실험실'(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로 만들어 온 네타냐후 정부가 존재하는 한 어떠한 해결 노력도 유효하지 않다. 세계는 다시 중동의 수렁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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