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쿠바가 14일 밤 전격적으로 국교를 정상화했다. 양국은 이날 미국 뉴욕의 유엔 대표부에서 외교 공한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국 관계를 유지해 온 쿠바가 한국과 수교를 결정한 것은 격심해진 경제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49년 첫 수교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15일 정례브리핑에서 수교를 공식 발표한 뒤 "양국 간 경제협력 확대와 우리 기업의 진출을 지원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쿠바 방문 우리 국민에 대한 체계적인 영사 조력도 제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국교 수립 전 영사 관계를 먼저 맺지만, 한국과 쿠바는 중간단계를 생략했다. 쿠바는 한국의 193번째 수교국이다.
양국은 앞으로 상호 상주공관 개설을 비롯해 우호 증진을 위한 후속 조치를 협의해 나갈 예정이다. 그동안 쿠바와 외교 교섭은 주멕시코 한국 대사관이 관장했고, 2005년 개관한 대한무역공사(KOTRA) 아바나 무역관이 방문사증(비자) 발급을 비롯한 영사 업무를 대행해 왔다.
한국·쿠바 수교는 외교적으로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우리로선 1949년 상호 국가승인을 했지만, 한국전쟁 탓에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중단됐던 양국 관계를 65년 만에 정상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중남미 33개국 가운데 마지막 미수교국이었던 쿠바와 정상화를 함으로써 중남미 외교를 완성했다는 의미도 있다. 쿠바가 북한과 오랜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쿠바는 혁명 이듬해인 1960년 8월 29일 북한과 국교를 수립하고, 구소련 해체 이전에도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강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다. 북한 역시 쿠바를 사회주의 대의명분을 함께 하는 '동지 국가'로 대해 왔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은 2018년 11월 평양을 국빈 방문,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나란히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는 입장에서 상호 전략적 관계를 확대하기로 다짐했다. 혁명 이후 세대의 첫 지도자인 디아스카넬 의장의 방북은 3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북한-쿠바-베트남의 연대
쿠바 혁명 지도자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 자격으로 1960년 평양을 방문, "'김일성 체제'는 쿠바가 따라야 할 모델"이라고 강조했었다.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도 1986년 평양을 방문해 양국 간 유대를 거듭 확인했다. 평양엔 쿠바산 설탕이 뿌려졌다. 김일성 주석은 1980년대 쿠바에 AK-47 소총 10만 자루를 무상 지원했고, 쿠바는 북한의 요구에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불참했다.
미국과 전쟁 또는 혁명을 경험한 북한과 쿠바, 베트남은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소련과 중국에 휘둘리지 않고 자주적인 노선을 걸어왔다. 쿠바는 1992년 한·베트남 수교 뒤에도 북한의 반발을 우려해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거부해 왔다. 쿠바는 베트남의 전례를 따라 한국과 수교 뒤에도 북한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 2002년 대한무역공사(KOTRA)가 쿠바와 무역투자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3년 뒤 아바나에 무역관을 열었다. 이즈음부터 쿠바와 국교 정상화를 시도해 왔지만, 쿠바가 북한과의 이념적 연대를 중시함에 따라 성사되지 않았다. 한국 드라마와 K-팝이 쿠바 주민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지만, 제한적인 경제협력과 문화·스포츠 교류에 그쳤다.
서정인 전 주멕시코 대사는 "역대 멕시코 대사들이 쿠바와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문을 열지 않았던 쿠바가 수교를 결심한 것은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극심해진 경제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결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 전 대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2022년 말 이임할 즈음 연료비가 2~5배 오른 데다가 관세까지 60%가 인상돼 물가상승률이 30%를 웃돌았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쿠바의 경제는 미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와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 3가지 악 가 겹치면서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쿠바의 주 수입원은 관광산업. 2015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쿠바 여행 자유화' 조치로 숨통이 트였지만, 2년 뒤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 첫 해 쿠바를 다시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고 미국인의 개인여행 금지 등 200여 개의 제재를 복원했다. 2020년 초 코로나19의 대확산은 쿠바 관광산업에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쿠바 한인회' 숙원 이룰듯
코로나19가 풀릴 무렵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또 다른 악재였다. 서서히 복원되던 러시아의 지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에너지 수요의 상당 부분을 채우지 못해 급격한 휘발유 가격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의 쿠바 정책은 트럼프 행정부와 도긴개긴이다. 항공기 운항 재개 등 제재 일부를 완화했지만, 트럼프가 내린 제재를 대부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에는 구한말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다가 쿠바로 재이주한 1세대 한국인(코레아노)의 후손 1000여 명이 살고 있다. 한·쿠바 수교는 이들에게도 희소식이다. 쿠바 정부가 쿠바 거주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교민회 설립을 불허해 왔기 때문이다. 현재 '한인회'가 한-쿠바 문화교류 단체로 등록된 연유다. 북한은 쿠바와의 유대관계에도 불구하고 코레아노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아 왔다. 수교를 계기로 민·관 차원에서 체계적인 지원이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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