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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조국, 짧았지만 행복했다 -쿠바 한인청년의 고국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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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o's 2017. 3. 2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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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쿠바 한인후예 청년’ 넬슨의 4개월 한국 나들이

"논문만 쓰면 되는데…. 6개월 남은 대학 졸업을 포기해야 하나.” 

쿠바 청년 넬슨 임 로살레스(30)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구 반대편 한국을 4개월 동안 방문할 수 있다는 제안에 선뜻 응했다. 증조할아버지가 코흘리개 시절 떠나온 땅이자,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그 ‘조국’이 아니던가. 

넬슨은 임씨라는 성이 말해주듯 한인 후예다. 쿠바에선 마지막 이름이 모계 성이고, 중간 이름이 부계 성이다. 5세 때 한국을 떠나온 증조부 임천택과 몇해 전 타계한 할아버지 헤로니모 임 김(임은조·1926년생)은 쿠바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다. 넬슨은 지난해 11월 초 재외동포재단 초청으로 다른 한인 후예 청년 5명과 함께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3월3일 오후 5시 지하철 홍대역 4번 출구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중고 컴퓨터 부품을 사고파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만난 누군가로부터 하드 드라이브를 사기로 한 약속장소다. 뉴저지 출신의 코케이전(백인) 청년이었다. 서로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미 인터넷 채팅으로 가격(3만5000원)도 정해놓은 터. 돈과 물건을 주고받은 뒤 서로 “좋은 여행(Bon Voyage)”이라는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쿨한 거래였다. 아바나에선 5배는 줘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다. 물품이 부족한 쿠바에서 온 넬슨에게 한국의 인터넷은 이처럼 횡재할 기회를 종종 주었다. 스마트폰도 헐값에 득템했다. 내일이면 쿠바로 돌아간다. 꿈 같은 4개월이었다.

 

2001년 12월 쿠바 아바나에서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에 탄 헤로니모 선생과 손자 넬슨. 넬슨은 당시 14세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1년 12월 쿠바 아바나에서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에 탄 헤로니모 선생과 손자 넬슨.
넬슨은 당시 14세였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자가 넬슨을 처음 보았던 것은 2001년 12월이었다. 구한말 한국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땅에 정착한 ‘마지막 한인’ 시리즈의 취재차 쿠바의 아바나를 찾았을 때였다. 당시 14세 소년이었던 넬슨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혼한 아버지가 지방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를 부모 집에 맡겼기 때문이다. 

넬슨이 아바나의 5년제 정보과학대학(USI) 4학년 1학기를 마친 뒤 한국행을 택하게 된 이유는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다. 헤로니모 할아버지는 강건한 분이었다. 러시아제 라다 승용차를 몰고 아바나 시내를 다니며 파르티쿨라르(개인) 택시영업을 하시곤 했다. 쿠바 혁명의 영웅이지만, 1980년대 말부터 불어 닥친 경제난 속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증조부에서부터 내려온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쿠바이민 4세대인 넬슨에게까지 스며들었다.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한국을 몇차례 방문했던 헤로니모는 넬슨에게 늘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인천에 첫 여장을 풀었다. 인하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에서 한글 기초교육을 3주 받았다. 이후 서울로 옮겨 한글과 한국 전통요리 강습 및 문화와 역사 현장 탐방을 했다. 일정 하나 하나가 흥미롭고 유익했다. 하지만 ‘조국’과의 뜨거운 만남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쿠바 한인들이 살던 엘 볼로 에네켄 농장의 쪽방건물

지난해 11월26일 인천 이민사 박물관  

아무도 귀띔해주지 않았다. 무심코 박물관 내부를 둘러보다가 그만, 할아버지 헤로니모와 증조부 임천택의 사진을 발견했다. 아니 사진 속의 그들을 만났다. 얼마나 놀랍고, 행복했는지…. 쿠바 한인사회의 역사와 그들의 활동내용이 담긴 자료들도 접했다. 살아오면서 만난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다.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난겨울 첫눈이자, 내 인생의 첫눈이었다. 아주 흥분되고 특별한 날이었다. 

대전국립묘지의 증조부 묘소를 참배한 것은 또 하나의 특별한 순간이었다. 함께 온 이넷과 한국에 있는 아사리아 등 여자사촌들과 찾았다. 다른 비석들에는 앞에 망자의 이름을 적고, 뒷면에 자손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증조부 묘비의 뒷면엔 생년월일과 돌아가신 날만 쓰여 있었다. 아바나에 있는 이르마 고모에게 가계도를 받아 전달해주었다. 

쿠바 한인들에게 조국은 무엇일까. 이민자들은 떠나올 때의 조국에 시계가 맞춰져 있다고 하던가. 세대를 이어가며 가슴 깊은 곳에 ‘흉터’처럼 조국을 간직해왔다. 넬슨이 정리한 쿠바 이민사는 간단명료하다. “모두가 다른 삶을 꿈꾸었을 것이다. 멕시코에서 돈을 벌어 (계약 기간) 4년 뒤 한국에 돌아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가난과 노동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노예노동이 끝나고도 몇 해가 지난 1920년 한인 288명이 배를 타고 쿠바로 넘어갔던 이유다. 

날카로운 에네켄 가시에 찔리지 않기 위해 카리브해의 뜨거운 햇볕 아래서도 두꺼운 가죽옷을 입어야 했다. 온종일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독한 노동에서 벗어나 쿠바의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겠다는 것이 그들이 꿈꾼, 또 다른 삶이었다. 하지만 막상 쿠바 동쪽 끝의 마나티항에 도착해 보니 사탕수수밭에선 더 이상 일손이 필요치 않았다. 결국 한인들이 돌고 돌아 다시 흘러들어간 곳은 지긋지긋한 에네켄 농장이었다.

한인들은 그 악조건하에서도 조국을 열망했다. “증조부 임천택은 농부이자 교사였다. 농장 한 귀퉁이에 만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국의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중경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한국을 늘 조국으로 생각해온 이유다.” 성금은 천도교 식이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끼니마다 식구수대로 한 숟가락씩 성미(誠米)를 모아 마련한 돈을 임정에 보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 기록을 남긴 것이 임천택이 시신으로나마 돌아와 2005년 국립묘지에 안치될 수 있었던 연유다. 

12월10일 신촌역 2번 출구 

넬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세대 인근의 쿠바 카페 ‘리틀 쿠바’로 함께 갔다. 얼마 전(11월25일) 피델 카스트로가 타계했다. 피델은 임씨 집안과도 무관한 사람이 아니다. 헤로니모 할아버지는 피델과 같은 해 아바나 법대에 입학했지만, 5년 중 4년만 수료하고 도시 게릴라로 쿠바 혁명에 투신했다. 혁명 후에는 체 게바라가 장관이었던 산업부에서 스페시알리스타(국장)로 함께 일하며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피델과 체는 넬슨이 어린 시절부터 헤로니모 할아버지에게서 숱하게 들어온 이야기의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10일 서울 연세대 인근의 카페 ‘리틀 쿠바’ 앞에서. 김진호 선임기자

지난해 12월10일 서울 연세대 인근의 카페 ‘리틀 쿠바’ 앞에서. 김진호 선임기자

“무엇보다 슬펐다. 태어나서 처음 본 쿠바 지도자였다. 엇갈린 평가도 있겠지만 피델은 쿠바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이론상으로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이 안 좋은 면도 있다. 하지만 그가 구축해 놓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시스템은 이전에 없던 것들이었다. 피델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혁명 이전과 비교한다면 지금의 쿠바가 좋다고 본다.” 

넬슨은 본인이 무상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된 것도 “피델의 덕”이라고 강조했다. 헤로니모는 바티스타 정권 시절 학비 부담 탓에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남기고 포기해야 했다. 

피델은 미국의 선전처럼 전형적인 독재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많은 쿠바인들에게 여전히 존경받는 지도자다. 기자가 아바나에서 한인들이 처음 도착했던 마나티까지 왕복 700㎞를 여행했을 때 농가 곳곳의 담벼락에 누군가 써놓은 ‘비바 피델(Viva Fidel)’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낙서와도 비슷한 글씨들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써놓은 것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김치, 장조림, 콩장, 갈비… 

조국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던 쿠바 한인들에게 한국 음식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조국’이었다. 넬슨의 할머니는 자주 한국음식을 내어주셨다. 덕분에 매운 음식에도 익숙하다. 하지만 아바나에선 제대로 된 재료를 구할 수 없기에 진짜 한국음식과는 많이 다르다. 

서울에서 전통음식 63가지를 배웠다. 참기름과 당면, 고추장 등도 사놓았다. 가족들에게 몇번 해줄 수 있는 분량이다. 광복절이나 삼일절에 열리는 한인공동체 행사 때 음식을 장만하고 싶지만,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뚝배기와 만두 삶는 용기도 아쉽다. 함께 온 일행 중 넬슨과 사촌 이넷을 제외하곤 모두 쿠바에서 요식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다. 이넷은 기념품 제조업체 매니저다.

아바나에서 함께 온 친구들과 재래시장을 찾은 넬슨(맨앞). 왼쪽부터 아릭, 클라우디아, 이넷, 프랑크, 마누엘. 모두 한인 후예 청년들이다. 재외동포재단 제공

아바나에서 함께 온 친구들과 재래시장을 찾은 넬슨(맨앞).
왼쪽부터 아릭, 클라우디아, 이넷, 프랑크, 마누엘.
모두 한인 후예 청년들이다. 재외동포재단 제공

이들과 함께 아바나에 한국 음식점을 차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2~3년 돈을 모아 혼자 푸드트럭을 운영해볼까 한다. 식당을 경영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생각해봐도 요리사는 아닌 것 같다. 전공을 살려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되고 싶다. 경제학도 공부했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회계와 소프트웨어 개발 일을 해왔다. 여행사의 상품예약 시스템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바나엔 아직 인터넷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용료가 시간당 2달러로 비싸기도 하다. 하지만 좋아지지 않겠나.

나이 30세, ‘출구’가 안 보인다  

쿠바 젊은이들에게도 기회는 많지 않다. 미국의 경제 제재가 언제 풀릴지도 모른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이상한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된 것도 불길하다. 대학교수나 과학자, 고급공무원보다 레스토랑 지배인이 몇배나 되는 돈을 번다. 그래도 직업으로는 컴퓨터공학과 경제학을 활용하고 싶다. 

만사 제쳐두고 한국에 왔지만, 돌아가면 어떻게 하든지 대학을 졸업하는 길을 찾아보려고 한다. 많은 서류를 제출해야 될 것 같다. 장학금만 탈 수 있다면, 한국에 돌아와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전공은 컴퓨터공학이지만, 한국에서는 한글과 한국 역사,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싶다. 쿠바 한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기 때문이다. “한인 공동체에 도움이 되고 싶다. 생활 자체만 보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 춥긴 하지만 나이트라이프가 있고, 서울은 현대적인 도시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살면 그들을 도울 수 없지 않나.”

짧지 않은 여정 가운데 판문점을 끝내 가보지 못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한국 역사의 중요한 현장이 아닌가. 사진으로만 보았는데 회의탁자 중간에 경계선이 있고 남과 북이 마주 앉아 휴전협정을 체결했다는 회의장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이번엔 여의치 않았다. 다시 한국에 온다면 증조부의 고향인 경기도 광주도 가보고 싶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외손자 산더(13)의 한국 이름을 ‘광주’라고 지었다. 조국에서의 4개월, 짧았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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