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A hungry child knows no politics)"라고? 미국 대통령은 종종 멋있는 말을 내놓는다. 일단 '출시'되면 각국 언론과 정치인이 이를 다투어 인용하면서 국제사회의 기준(normal)이 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로널드 레이건이 냉전의 정점이던 1983년, 공산당 정권의 에티오피아에 인도적 지원을 결정하면서 내놓은 명언이다. 1990년대 미국이 대북 식량 지원의 당위를 설명할 때도 자주 인용됐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하는 명언은 더 많다. 2차대전 이후 미국 주도 국제질서의 대표 브랜드였던 '가치'들이다. 조 바이든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바이든은 지난 8일 국정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가자지구의 비극에 통탄하고, 안타까워하며, 해결을 다짐했다. "지난 5개월간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너무 많은 사람이 속이 뒤틀리고 있다"고 개탄한 뒤 가자지구의 참상을 덤덤하게 전했다. 미국인 인질의 가족들에게 각별한 위로를 표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6주간의 즉각적인 휴전'을 성립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마스의 인질 석방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수감자 석방을 교환하는 내용도 담겼다면서 "인질을 집에 보내고 견딜 수 없는 인도적 위기를 완화하며, 더 지속적인 상황을 구축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백주 대낮에 워싱턴의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제노사이드에 공범은 될 수 없다"라고 외치며 군복 차림으로 분신한 현역 미 공군 사병(애런 부시넬)의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지만, 입장 전환의 신호로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가자지구에서는 거악(巨惡)과 소악(小惡)이 맞물려 지옥의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작년 10.7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민간인 1139명이 사망하고, 외국인을 포함해 253명이 인질로 잡혀갔다.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 포함됐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200만 명이 밀집해 있는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지금까지 3만 2000여 명이 희생됐다. 여성과 어린이, 노인 등 무고한 민간인이 대부분이다. 이스라엘군의 봉쇄로 인구의 절반이 극심한 굶주림에 처해 있다. 인명은 민족에 따라 다르지 않다. 유대인 한 명의 생명과 팔레스타인인 한 명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피해 규모로 나누면 거악과 소악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성을 들어온 미국은 하마스 소탕이라는 이스라엘의 안보적 필요를 인정하며, 민간인 학살극에 눈을 감아왔다. 각국의 비난이 쏟아지면 가끔 거악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비극을 잊지 않고 있다는 제스처를 내보일 뿐이다. 재앙의 본질에 메스를 댈 의지는 보이지 않으면서 식량과 의약품 등 인도적인 지원을 강조한다.
바이든의 장엄한 연설 뒤 그동안 가자 전쟁의 즉각적인 휴전을 강제하는 결의안에 연거푸 거부권을 행사했던 미국은 안보리에 문제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20일 중동 방문 중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지만, 동시에 끔찍한 고통을 겪는 민간인들을 반드시 우선순위로 다뤄야 한다"면서 결의를 내보였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자위권과 민간인의 고통을 등가로 말했다. 그런데 막상 내용이 공개된 미국의 결의안은 온통 '소악'과의 전쟁 또는 학살을 벌이는 이스라엘을 두둔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22일 안보리 표결에서 러시아와 중국, 알제리가 반대하고 가이아나가 기권표를 던진 까닭이다.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안보리 결의안의 핵심은 강제권이다. 이행하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거나, 한국전쟁 때처럼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미국의 초안은 휴전을 '지지'하고, 인도적 구호를 '요구'하며, 민간인 피해를 '우려'하는 데 그쳤다. 이스라엘군의 비인도적인 공격을 중단토록 강제하는 핵심이 빠졌다. '요구(demand)'는 이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바이든의 국정연설 이후 온갖 생색을 내더니 결국 이스라엘의 '거악'을 외면하고, 하마스의 '소악'에만 주의를 환기시켰다. 민간인 제노사이드에 대해 책임을 묻는 대목도 없었다. 그러고는 거부권을 행사한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비난에 집중했다. 오죽하면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사가 "거짓된 휴전 요구로 미국 유권자들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는 연극일 뿐"이라고 일축했겠나. 결의안 제출이 도널드 트럼프에 지지도가 밀리는 상황에서 부시넬의 분신과 일부 민주당 지지층의 분노를 다독이기 위해 내놓은 정치적 제스처임을 꼬집었다.
미국이 제출한 결의안은 그동안 유지해 온 입장이 변하지 않았음을 입증했을 뿐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가자 주민 강제 소개령을 취소하고,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한 지난해 10월 16일 러시아 제출 결의안에 반대했고, 아랍에미리트(UAE)가 12월 제출한 '인도주의적 즉각 휴전 결의안'에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미국이 유일하게 제동을 걸었다. 하긴 바이든 행정부의 예외적인 결정도 아니다. 미국은 1945년 이후 팔레스타인 영토 강점과 군사행동, 팔레스타인 국가 불인정 등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내용의 결의안 36개 중 34개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바이든은 국정연설에서 미국 하원에 계류된 600억 달러 상당의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무기 지원 예산안의 통과를 촉구했다. 그러면서 예산안 통과를 반대하는 공화당 의원들을 "미국이 세계 리더십에서 떨어져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의 국제적 통솔력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는 현장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다. 바로 가자지구다.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서도 참극을 이어가는 이스라엘의을 두둔하면서 글로벌 리더로서의 지위는 형편 없이 추락하고 있다. 맞다.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 지금도 유효한 명제다. 그러나 굶어 죽고, 폭탄에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더 더욱 정치를 모른다. 미국이 글로벌 리더라는 주장이 갈수록 ‘농담’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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