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페루 검찰도 심야 대통령 집 압수수색, 디올백은 언제 찾나?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4. 3. 13:20

본문

페루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디나 볼루아르테(61)가 토요일이던 지난 29일 새벽 관저와 집무실을 털렸다. 수사관들이 관저에서 찾으려던 것은 명품 롤렉스 시계들이었다.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재산공개에서 롤렉스 시계를 빠뜨렸다는 의혹과 불법 재산 증식 의혹을 받아왔다. 지난 3월 페루를 달군 '롤렉스 게이트'의 정점이었다.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이 지난 2월 22일 수도 리마에서 열린 노년층 지원 프로그램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팔에 찬 시계가 눈에 띈다. 2024.2.22. 로이터 연합뉴스

이날 수도 리마 수르키요 구의 관저에 들이닥친 검찰 수사관과 경찰은 모두 40여 명이었다. 지난 29일 자정쯤 관저 앞에 도착했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부수고 진입했다. 그들이 기다린 시간은 불과 몇 분이었다. 늦은 시간에 가족들이 옷을 입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검·경은 양탄자 밑까지 뒤진 끝에 10개의 시계를 발견했지만, 이 중 몇 개가 롤렉스 제품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검·경은 곧이어 몇㎞ 떨어진 대통령 집무실도 습격했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수색할 수 있었다. 구스타보 아드리안센 총리는 이날 압색 뒤 자신의 X계정에 "이러한 정치적 잡음은 (외국자본의)투자 및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비난했다.

영국 BBC와 미국 NPR에 따르면 페루에서는 전직 대통령의 집과 현직 대통령 집무실이 압색을 당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의 관저를 심야에 기습한 것은 처음이다. 그것도 공식 수사 착수 5일 만에 단행했다. 

더욱 놀라운 건 현직 대통령 관저에 대한 심야 기습 작전의 출발점이 한 온라인 매체 '라 엔세로나'의 폭로기사였다는 사실이다. 라 엔세로나는 볼루아르테가 2022년 12월 대통령 취임 이후 최소한 한 개의 롤렉스 시계를 공개행사에서 차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최소 3개의 롤렉스 시계가 있고, 5만 달러 상당 카르티에 팔찌도 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이날 압색은 라티나 TV의 생중계로 전국에 방영됐다. 아드리안센 총리는 그러나 RPP라디오에 "대통령은 사임할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페루 검찰 수사관과 경찰이 30일 새벽 수도 리마의 수르키요 구에 위치한 대통령 관저를 급습,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다. 2024.3.30. AP 연합뉴스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30일 TV 연설에서 "나는 깨끗한 손으로 대통령궁에 들어왔고, 2026년 떠날 때도 그럴 것"이라면서 의혹을 부인했다. 라 엔세로나가 보도한 롤렉스 시계는 자신이 18세부터 일해서 번 돈으로 오래전에 구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검찰에 시계 구매 근거를 찾아 전달할 때까지 소환 시기를 2주 늦춰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후안 비예나 검찰총장은 관저 수색 거부는 수사 협력 의무를 방기한 '반역의 분명한 지표'라고 공개 비난했다.

볼루아르테는 부통령이 되기 전까지 지방공무원과 변호사 생활을 했었다. 부통령 월급은 8136달러(약 1100만 원)였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오히려 줄어 4200달러(약 560만 원)를 받았다. 라 엔세로나에 따르면 그가 찼던 롤렉스 시계는 가격이 1만 4000달러(약 1900만 원)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대통령과 정부가 검·경·언론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는 피해자로 비치게 한다. 하지만 대통령의 명품 시계와 이에 대한 언론의 의혹 제기에 사법당국이 법적 절차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문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에게 생소한 장면일 뿐이다.

볼로아르테는 산악지방의 시골 마을 출신으로 14남매의 막내로 극심한 가난 속에 성장했다. 그가 태어난 아푸리막 지방은 원주민 인구가 다수를 이루는 곳이다. 변호사가 된 뒤에야 가난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그가 좌파 '자유 페루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자신을 부통령에 지명한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54)이 2022년 12월 탄핵된 덕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일단 권좌에 앉은 뒤 볼로아르테는 카스티요 전 대통령과 자유 페루 당을 모두 비난하며 보수우파와 손을 잡았다. 군과 보수언론도 방패막이가 됐다.

30일 새벽 검경의 압수수색이 벌어진 페루 수도 리마의 대통령 관저 밖에서 경찰이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다. 2024.3.30. AP 연합뉴스

페루는 지난 6년 동안 대통령이 5번 바뀌는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카스티요는 2021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 게이코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게이코의 '인민의 힘' 등 의회를 장악한 보수우파로부터 3번째 탄핵 발의를 당한 끝에 퇴임했다.

볼루아르테가 여론의 질타를 받는 것은 정치적 배반과 '롤렉스 게이트' 때문만이 아니다. 취임 직후부터 시위군중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학살극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다. 2022년 말부터 2023년 초까지 벌어졌던 시위 진압 과정에서 49명이 경찰과 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롤렉스 게이트'는 물가고와 경제난 속에 군·경의 강경 진압에 신음하던 민심의 불만에 휘발유를 부은 격이다. 볼로아르테는 아메리카 소사이어티(AS)와 아메리카협회(COA)의 지난해 12월 7일 여론조사 결과 라틴아메리카 15개국 정상 가운데 가장 낮은 9%의 지지를 받았다. 

총선을 앞둔 한국에 페루 대통령 관저 압색 사건은 주목할 만한 키워드를 두 개 제공한다. '명품 시계'와 '대통령 관저 압색'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실체로 드러났지만 규명되지 않고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상상의 영역에 머문다.

페루의 비정규직 광부들이 12일 수도 리마의 에너지광업부 청사 앞에서 자신들의 정규직화를 금지한 법안의 폐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4.3.12. 로이터 연합뉴스

페루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작년 11월 사법당국에 의해 압수수색을 받았다. 부통령 시절 머물던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집과 워싱턴의 개인 사무실이 수색 대상이었다. 부통령 시절 소지했던 국가 기밀서류를 반환하지 않았다는 혐의였다. 그 한 달 전에는 한국계 로버트 허 특검에게 5시간에 걸쳐 신문을 받았다. 허 특검은 바이든이 다수의 기밀서류를 불법 보관했던 혐의를 입증했지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노인의 실수"로 규정하고 기소를 안 하는 것으로 수사를 결론지었다.

대통령 부인이 명품 디올 가방을 선물로 받고, 주가조작과 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숱한 의혹에 싸여 있어도 사법당국이 어떠한 수사도 진행하지 않는 한국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주로 야당 정치인과 언론, 노조가 압수·수색을 당하는 나라에 살다 보니 주목된 사건이다. 페루의 경우엔 가족이 아닌, 대통령 본인이 명품 시계를 착용한 것 자체가 언론의 의혹을 낳았고, 곧바로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됐다. 페루 대통령도 면책특권의 보호를 받지만, 재임 중이라도 수사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 볼로아르테는 5일 검찰에 출두한다.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나라일지언정 '민주주의의 얼굴'을 보여준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