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현직 대통령이 5일 검찰에 출두 5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다. 몇억 원 상당의 달러 현찰과 명품 시계와 팔찌에 대한 수사를 받는 과정의 하나였다. 공식적인 혐의는 불법 재산 증식과 재산 신고 누락. 페루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디나 볼루아르테(61)의 이른바 '롤렉스 게이트' 이야기다. 토요일이던 지난 23일 자정을 막 넘긴 꼭두새벽 수사관 40여 명이 대통령 관저의 문을 따고 들어가 압수수색 끝에 10개의 명품시계 증거물을 확보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현직 대통령 부인이 수백만 원 상당의 명품백을 건네받은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대통령은 국영방송 대담에 나와 "아쉬운 일"이라고 말했다. 부인은 단 한마디도 해명하지 않았다. "이걸 자꾸 왜 사 오느냐"는 동영상 속 말에서 처음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명품백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검찰은 침묵한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씨(51)의 이른바 '디올백 스캔들'이다. 구체적인 폭로와 대통령의 해명 아닌 해명, 이어지는 의혹이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명품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추함,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몰상식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거듭 꺼내는 까닭이 있다. 5일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비루한 대국민 해명 기자회견이 추하되 아름다웠고, 비정상적이되 외려 상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수사가 벌어지는 동안 수도 리마의 검찰청 앞에서는 한국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LA타임스의 현장 기사에 따르면 극성 지지자 몇 명이 "디나, 버티세요"라고 쓴 펼침막을 들고 대통령 엄호에 나섰다.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빗자루를 들고나온 주민들이 "그들 모두를 쓸어버려랴!"라며 항의 시위를 하다가 경찰의 최루탄 살포로 흩어졌다.
페루 검찰은 볼루아르테에 대한 조사 결과를 즉각 발표하지 않았다. 조사 뒤 대통령궁에 돌아간 볼루아르테는 이날 TV 회견을 통해 군색했을지언정 나름대로 국민적 의혹에 답했다. 자신이 18세부터 일해 번 돈으로 산 롤렉스시계 1개를 제외하곤 모두 친구에게 빌렸다고 해명했다. "친구에게 빌린 시계들을 이미 다 돌려줬다"면서 명품 팔찌와 목걸이 및 값비싼 장신구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회견 자리에 의혹의 목걸이와 팔찌, 시계, 귀걸이 등을 착용하고 나와 한 해명이다.
그는 또 자신에 대한 수사는 "거짓말"이자 "연막"이라면서 검사들이 더 전문가다워야 할 것이라고 항변했다. 하루 전 의회에서는 진보 성향 의원들이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했지만, "또 다른 정치 위기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보수우파 의원들의 주장으로 탄핵 절차에 돌입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뭐라 하건, 페루 검찰은 두 가지 혐의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게 분명하다. 이미 심야에 대통령 가족들이 옷을 갈아입을 여유조차 주지 않고 대통령궁에 쳐들어가 양탄자 밑까지 뒤지는 철저한 압수수색을 했던 그들이다. 페루라고 대통령궁 경호원들이 없었겠나. 그러나 수사관들이 장비로 문을 따고 들어가 영장에 따라 사법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볼루아르테는 검찰만 탓한 게 아니었다. 의혹의 몸통인 자기만 빼고 깃털들에서 책임을 돌렸다. 지난주 대폭 개각을 단행했다. 개각에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 장관이 포함된 것은 그가 받는 또 다른 의혹 때문으로 보인다. 군, 경이 그의 취임 직후부터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를 강경진압하면서 49명이 숨진 것에 대한 책임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캔들은 어느 나라에서건 아름답지 않다. 페루는 지난 6년 동안 대통령 5명이 교체되는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런데 스캔들이 국민에게 알려지고, 사법당국이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잇달아 민주주의 국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국민은 개, 돼지가 아니기에 단순히 명품 시계나 명품백 한두 개 때문에 분노하지 않는다. 롤렉스 시계는 볼루아르테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자마자 저소득층을 대변해 온 소속 정당을 배반하고, 강경 시위 진압, 물가고와 경제위기 속에서 쌓였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부인은 건국 이래 가장 많은 스캔들에 휩싸여 있다. 대통령 장모가 갖고 있는 양평 땅 주변으로 고속도로 노선이 변경되거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은 그 많은 의혹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페루 대통령도 우리와 비슷하게 면책특권을 갖고 있다. 수사에는 임해야 하지만, 재판은 임기를 끝난 뒤에나 가능하다. 민심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때 동원되는 민주적인 절차가 바로 탄핵인 것도 마찬가지다. 특검은 필요하지 않다. 페루 검찰이 법대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어서다.
페루의 정치 위기는 기실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우파 정당들과 기성언론, 군당국이 한편에서 대통령을 호위하고, 의회 소수당인 야당과 기층 민중이 다른 편에 서서 대치하는 와중에 발생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탓에 연료값과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데 페루의 주요 수입원인 각종 광물자원의 국제가격이 내려간 것은 새로운 위기를 부추기는 변수다. 한국은 페루에 비해 경제적으로 선진국이지만,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볼 때 정치적으론 후진국이다.
대통령 부인의 명품백과 관련한 고발이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서고 있기는 하다. 증거물을 확보하기 위한 압수수색이나 검찰 수사와는 거리가 멀다. 엉뚱하게 명품백을 받은 장본인이 아닌, 건넨 사람을 상대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명품 수수 과정을 담은 몰래카메라와 언론의 함정취재 등이 경찰 수사의 대상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한 보수성향 시민단체 4곳이 고발한 혐의는 △명예훼손 △무고 △주거침입 △국가보안법 위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이다. 영등포 경찰서는 명품백을 건넨 최재영 목사에 대한 소환 조사를 미루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참여연대가 대통령 부부를 청탁금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신고한 사건에 대해서는 친고, 처리 기한 연장을 통보했다. 해서 국민적 의혹이 쏠린 사건임에도 4.10 총선 투표일을 비껴갈 것으로 예상된다.
현지 언론의 의혹 제기에 검찰이 곧바로 수사에 착수, 대통령궁 압수수색과 대면수사를 벌인 페루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페루뿐 아니라 여느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볼루아르테가 언론을 통해 '사적 해명'과 '사적 불만'을 토해냈지만, 페루 검찰이 이를 좌시할 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볼루아르테가 명품 시계를 빌렸다는 친구에 대한 계좌추적, 명품 구매 증빙을 따질 게 예상할 수 있는 다음 수순이다. TV회견에 비친 볼루아르테의 모습은 비루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부러운 게 '대한민국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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