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중앙아시아 순방 출발일이던 지난 10일 아침, 차질이 빚어졌다. 애초 8시 50분에 이륙할 예정이던 공군 1호기는 65분 뒤에나 뜬 것. 전용기에 탑승하고 있던 출입기자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나온 건 당연한 일. 대통령실 안팎에서 나온 몇 가지 지연 사유 중에는 "방문국 주한 대사관이 해킹당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포함됐다.
출국 당일의 소동
특명전권대사는 통상 주재국 정상이 자국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에 일정을 꿰고 있을 터. 누군가 해킹했다면 관련 정보를 캐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이 방문하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북한 및 러시아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첫 순방국 투르크는 '중앙아시아의 북한'으로 불리는 권위주의 국가이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의 세력권'이다. 공교롭게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줄곧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며 백안시해 온 북·러와 간단치 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이다.
투르크는 1991년 소련 해체 뒤 독립국이 된 이후 2006년까지 소련 공산당 간부 출신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가 종신대통령의 지위를 누렸다. 2006년부터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집권한 뒤 2022년 3월부터 현 대통령인 아들 세르다르와 권력을 공유하고 있다. 공식직함은 '국가 최고지도자'. 투르크는 1995년 유엔으로부터 영세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러시아와 국방 협력을 하고 있다.
세르다르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인 2022년 6월 10일 당선 뒤 첫 외국으로 러시아를 방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올해 러시아 전승일인 지난 5월 9일에도 모스크바를 방문, 정상회담을 가졌다.
카자흐스탄은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과 함께 러시아 주도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이다. CSTO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마찬가지로 조약상 집단방위 조항을 두고 있다. 러시아와 함께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회원국이기도 하다. 우크라 전쟁 뒤 여론조사에서 원심력이 커지고 있지만, 대러시아 우회 교역로 역할을 하면서 특수를 누리고 있다.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 대통령이 2022년 8월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푸틴 대통령은 작년 11월 답방했다. 우즈베크 역시 푸틴이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발부에도 자유롭게 오가는 나라다. 푸틴은 집권 5기를 시작한 지난달 중국과 벨라루스에 이어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남북한 동시 수교국
중앙아 3국 모두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지만, 북한보다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투르크·카자흐·우즈베크는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방문했던 나라들이기도 하다. 문제는 당시와 달리 남북 관계와 한·러 관계가 모두 악화됐다는 점이다. 공교롭게도 푸틴의 방북 일정이 대통령 순방 첫날 보도됐다. 연합뉴스는 러시아 매체 베도모스티를 인용해 푸틴이 이달 중 북한과 베트남을 순방할 가능성이 높다고 10일 전했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과 러시아와 남북한의 지정학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푸틴은 지난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 개막을 앞두고 연합뉴스를 포함한 각국 주요 뉴스 통신사 대표 간담회 자리에서 "우리는 한러 관계가 악화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한반도 전체와 관련해 양국 관계 발전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한·러 관계 개선을 위해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멀리 투르크와 카자흐를 돌면서 효력 없는 대북정책을 널리 알리고 있다. 출국 전 9·19 남북군사합의 전면 파기와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를 결정, 대한민국을 북한의 오물풍선 아래 놓고서 시작한 순방 길의 생뚱맞은 장면들이다.
대통령실은 투르크가 윤석열 정부의 '비핵·평화·번영의 한반도를 위한 담대한 구상'에 지지를 표명했다고 강조했지만, 투르크가 영세중립국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또 11일 카자흐 국영 일간지 '예게멘 카자흐스탄'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 개발은 한국과 카자흐 같은 나라들이 그동안 굳건하게 수호하며 발전시켜 온 국제 비확산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지난 1월 31일 중앙통합방위회의 모두 발언에서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비난한 걸 연상시킨다. 당시 러시아 외교부가 "노골적으로 왜곡된 말"이라고 말해서 한·러 간 외교 분쟁을 자초했다. 북한과 무한대치하다가 외국에 나가 돌연 북한을 비난하는 것을 두고 동아시아 분단국에서는 '정상외교'라고 우긴다.
러시아-카자흐-우즈베크 고려인 공동체
대통령의 순방 일정 중 가장 주목되는 행사는 13일 우즈베크에서 고려인 동포들과의 회동이다. 우즈베크가 고려인 밀집지역인 것은 분명하지만, 러시아, 카자흐의 고려인과 사실상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러시아 고려인만 20만 명에 달하지만, 우즈베크와 카자흐에 흩어져 사는 친인척이 많아서 한 분파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우즈베크-카자흐를 통틀어 약 50만 명이다.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 조 바실리 러시아 고려인 연합회 회장을 만난 전 모스크바대 박종효 교수(87)는 "러시아 고려인뿐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고려인의 불만도 많다"라면서 정부가 우크라 전쟁 뒤 단절한 서울~모스크바 직항만이라도 재개통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대통령이 고려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지 궁금하다.
한·투르크는 10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 에너지·건설·인프라 분야 협력을 다짐했지만 경제 효과는 두고 봐야 한다. 양국 간 교역규모는 1700만 달러에 불과하다. 현대엔지니어링이 2009년부터 참여하고 있는 투르크 갈키니쉬 가스전의 3차 탈황설비 기본합의서(60억 달러 규모) 사업 수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새삼 강조했다. 대통령의 '1호 영업사원' 시절부터 익숙한 홍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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