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는 1분 동안 정지한다. 핵폭탄이 떨어진 시간에 맞춰 원폭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는 묵념을 하는 시간이어서다. 전범국가의 과거를 삭제하고 세계를 상대로 일본이 평화 국가라고 우기는 '피해자 코스프레(흉내)'의 정점이다. 그런데 올해는 시작도 하기 전에 논란에 휩싸였다.
"이스라엘은 '히로시마'에 어울리지 않는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히로시마 시정부가 이스라엘 대표를 초청한 게 화근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초청 대상에서 제외했다. 작년 10월 7일 하마스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가자 전쟁' 와중에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초청하는 게 행사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평화 행동가들과 원폭 생존자 단체의 반발 때문이다.
'히로시마 A·H 폭탄 피해자 기구'는 지난 6월 이스라엘을 초청 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시 당국은 묵살하고 있다 이 단체의 구마다 테수지 사무국장은 CNN 방송에 "(시 정부가) 우리의 요청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게 매우 실망스럽다"라면서 "러시아와 벨라루스처럼 제노사이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왜 초대하는가"라고 반문했다. 또 다른 시민단체 '히로시마-팔레스타인 촛불 공동체'는 아예 지난 5월부터 이스라엘 대표의 제외를 촉구하는 온라인 청원을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글로벌 항의는 규모와 빈도에서 러시아에 대한 항의를 능가하고 있다"라는 이유에서다. 지난 현재까지 청원 서명자는 3만여 명.
8월 9일 오전 역시 비슷한 취지의 평화 행사를 주최하는 나가사키시 당국은 아직 이스라엘 대표의 초청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나가사키에는 11시 2분 핵폭탄이 떨어졌다. 두 행사 가운데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행사는 단연 히로시마 평화 행사다. 올해는 115개국과 유럽연합(EU) 대표가 참석한다.
희생자 팔레스타인 3만 8798명, 유대인 1478명
스라엘은 가자 전쟁의 상대는 하마스일 뿐, 팔레스타인 주민과 싸우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손가락질하고 있는 위선이다. 지난 17일 현재 가자 전쟁의 희생자는 약 4만 명. 3만 8798명의 팔레스타인인과 1478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108명의 기자(팔레스타인 103명, 이스라엘 2명, 레바논 3명)와 인도주의 구호 활동가 224명이 포함된다. 이중 179명이 유엔 인도주의 조정국(OCHA) 직원들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보건부(GHM)은 지난 4월 30일 병원으로 이송된 가족 희생자 2만 4686명 가운데 여성과 미성년자가 52%였고, 18세 이상 남성이 18%였다. 5%는 나이와 성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질병이나 영양실조 사망자를 제외하고, 전쟁행위 속에 사망한 숫자다. 200만 명에 달하는 가자지구 주민 전체가 난민 신세로 전락, 거처와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FJ)조차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규정한 전범 정부 이스라엘을 히로시마 평화 행사에 배제해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은 합당하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히로시마 시 정부는 이스라엘에 보낸 초청장에 "많은 사람의 생명과 일상이 빼앗기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면서 이스라엘 군의 공세 중단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 정부는 이스라엘 대표 제외 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물론 이견도 있다.
일제 군국주의-이스라엘 인종주의 '국화빵'
또 다른 원폭 생존자 단체인 '히로시마 히단코'의 사쿠마 쿠니히코 회장은 CNN에 "국제 평화의 도시답게 히로시마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막론하고 모든 나라 대표를 초청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나라'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포함되지 않는다. 도쿄 주재 자치정부 대표부는 소셜미디어 X 계정에 히로시마시의 초청을 받지 못했다고 항변하며 "(이스라엘 초청, 팔레스타인 배제)결정은 이중 잣대"라고 비난했다. 시 정부는 CNN에 초청 대상은 도쿄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 나라 대표들이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표는 초청한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히로시마시 대변인은 이에 대해 "이중 잣대가 아니다"라고 부인하며 "우리 정책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를 초청하는 게 우리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1945년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핵폭탄 투하는 인류가 함께 기리고 되돌아봐야 할 기념일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한반도 거주민의 시선은 한없이 불편하다. 두 도시에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하는 한편, 태평양 전쟁 중 일제가 자행한 숱한 전쟁범죄를 어둠 속에 두는 행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을 같이 보는 게 아니라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을 인종적으로 분리하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극우 정권과 일제 군국주의의 인종주의는 '국화빵'이다. '모든 나라'에서 국제사회가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제외하는 히로시마시 당국의 사고는 선대의 편견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동시에 1970년 4월 10일 건립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를 "평화공원 안에 이미 위령비와 기념비가 너무 많아서 허가할 수 없다"는 이유(한민족문화백과사전)로 공원 밖에 세우라고 한 히로시마시 당국의 '사고'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한국인 위령비는 1999년에나 평화 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히로시마 평화 행사 이스라엘 대표 초청 문제가 일본이 한사코 어둠 속에 방치해 온 역사의 일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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