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현장에서 취재했던 2008년, 민주당 예비후보 중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서 쓸데없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 후보였던 오바마의 말과 글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지만, 내심 클린턴의 당선을 기대했다. 그해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가 대선후보 지명을 받기 전까지의 일이다. 양쪽 선거캠프에 이메일을 등록해 놓고 후보의 말과 글을 챙겨보면서 약간 과몰입한 때도 있었다. 클린턴 진영의 후원금 제안을 계속 접하면서 내고 싶은 충동이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미국 연방선거법이 외국인의 선거자금 기부를 막지 않았으면 소액일지언정 결행했을 것 같다.
오바마와 힐러리의 대결은 세계의 관심을 받았지만, 공약 차이는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최대 쟁점이었던 보건의료개혁의 경우 아이디어만 다소 달랐다. 변화와 희망을 열쇠말로 내놓은 오바마의 메시지는 신선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Changes, We Can Believe In)' '우리에 필요한 변화(Changes, We need) '담대한 희망(Audacity of Hope)'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존 케리가 대선후보였던 2004년 민주당 정강을 읽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2008년 정강과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케리가 팔던 상품과 오바마가 내놓은 상품이 거의 같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국 유권자들은 왜 오바마에게 더 환호했을까.
후보의 메시지 전달력과 홍보전략의 차이였다. 오바마는 거의 모든 연설을 프롬프터에 의존하는 정치인이다. 그러나 표정과 제스처, 청중의 반응을 끌어내는 기술이 효과적이다. 대선 본선에서 후보가 내놓는 말은 대부분 정강에 적힌 말이다. 유세지역과 청중의 관심에 따라 변용할 뿐이다. 오바마의 성장 배경은 미증유의 효과를 냈다. 그와 클린턴의 차이이자, 해리스와 차이다.
하와이라는 배경에서 이뤄진 케냐인 남학생과 캔사스 출신의 자유분방한 백인 여학생의 결합, 인도네시아에서 보낸 유년 시절, 의부와 이복형제들과 얽힌 이야기, 세일즈맨으로 사립고에 손자를 입학시킨 백인 할아버지, 매달 각종 공과금을 납부하느라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야 했던 싱글맘 엄마. 자서전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에 담긴 서사다. 일리노이 출신의 초선 연방상원의원을 일약 대선후보로 띄운 건 사춘기 시절 오바마가 적은 일기의 힘이었다. 자서전의 상당 부분은 하버드 로리뷰 편집장 시절 펴낸 일기장 묶음의 증보판.
클린턴은 공화당의 집요한 '마녀사냥'에 당당히 대응한 것은 물론 거의 모든 현안에 똑 부러진 답을 갖고 있었다. 해결사로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오바마는 드러난 경력과 확인된 자질에서 같은 반열에 놓을 수 없는 초보 정치인. 흑인들조차 처음엔 "충분히 검지 않다(not black enough)"는 이유로 오바마가 아닌, 클린턴을 지지했었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엘리트가 평범한 흑인들의 삶을 알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당당함과 탁월함은 선거판에서 오히려 독이 됐다. 사람들은 클린턴이 콕콕 짚어내는 사실보다 오바마가 발산하는 감동에 더 크게 호응했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사상 첫 여성·흑인·아시아계 대통령을 노리는 해리스가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이 맞붙었던 2008년 대선을 돌아보게 한다. 자연스레 후보 비교도 하게 된다. 피부색과 젠더, 핏줄을 걷어내면 해리스는 주목받을 구석이 많지 않은 정치인이다. 자질과 능력 면에서 클린턴과 비교하기엔 족탈불급이고, 인종과 성장 배경에선 오바마의 감동이 없다.
해리스는 지난 22일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때 샌프란시스코 이스트 베이의 노동자 동네에 산 기억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성장기에 딱히 어려움을 겪은 흔적은 찾기 어렵다. 고학력 부모 밑에서 주로 대학이나 연구소 부근에서 자랐다. 같은 싱글맘이라도 닥치는 대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오바마의 엄마와 평생 유방암 연구에 종사한 해리스의 엄마는 다르다. 선거 때 어렵게 자랐다고 한껏 떠들지만, 엘리트 의식에 포획된 정치인은 동아시아 분단국에도 흔하다. '극우 포퓰리즘의 마술'에 걸린 유권자들은 예외없이 기득권 엘리트를 혐오한다. 살아온 내력도 오바마와 판이하다.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건너와 LA의 한 대학 캠퍼스에서 본토 생활을 시작했지만, 방황의 연속이었다. 오바마의 일기는 LA 옥시덴탈 칼리지에서 뉴욕 컬럼비아대로 옮겨가기까지 자신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는 내용이 하이라이트다. 대학 졸업 뒤 시카고 빈민가에서 몇 년간 사회운동을 했다. 다시 돌아간 학교가 하버드 로스쿨이었다. 해리스는 몬트리올 버니어대와 워싱턴 하워드대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졸업 뒤 곧바로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에 입학했다. 2000년 초임 검사로 사회생활을 시작, 정치인이 되기 전까지 16년 동안 검사로 밥을 벌었다. 카운티(郡) 검사-카운티 검사장-주 법무부 장관-연방 상원의원-부통령의 탄탄대로였다. "충분히 검지 않다"는 잣대로 보았을 때 해리스는 오바마보다 더 검지 않다.
해리스에게 바이든은 인생의 로또였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을 불과 100일 정도 남겨놓고 뒤늦게 후보 사퇴를 하지 않았다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쉽지 않았다. 당내 후보 경선에서 승리를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영웅은 시대가 만들고 정치적 성공도 기회에 잘 올라타면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비전이나 감동도 없이 주로 반트럼프를 외치는 후보를 70여 일 동안 지켜보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다. '대북 대화'와 '비핵화의 장기 목표'를 삭제한 2024 민주당 정강과 적성국과 어떠한 대화나 타협 의지도 내비치지 않은 그의 후보 수락 연설을 한 줄로 읽으면 더욱 상서롭지 않다.
16년 전, 투표권도 없는 처지에 클린턴의 당선을 희망했던 건 흑인 대통령보다 여성 대통령의 탄생을 먼저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모두 의미 있는 데다가 무엇이 먼저 건 어차피 그들의 선택일 터. 빌 클린턴 행정부가 임기를 한 달 정도 남기고 접었던 북미관계 개선의 '속편'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북미 정상회담은 18년 일찍 성사될 수 있었다. 그 사이 북한의 핵, 미사일 능력이 완숙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 12월 말 예정했던 방북을 전격 취소했다. 한반도 대신 중동 문제 진전을 마지막 과제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진 조지 부시의 시대란.
힐러리는 대통령의 평범한 아내가 아니었다. 정치적 동지이자, 누구보다 비범한 민주당 핵심 일꾼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백악관 특별팀장을 맡아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건강보험 개혁을 놓고 의회 공화당과 전쟁을 벌였다. 부통령으로 해리스가 맡은 일보다 대통령 부인으로 클린턴이 맡은 일이 더 진지하고 더 무게가 있었다고 본다. 그 클린턴도 상원의원(뉴욕)과 국무장관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을 두고 "중동 민주주의의 횃불"이라고 우기는, 고만고만한 미국 정치인의 본색을 드러냈다.
오바마는 번드레한 말로 대북 대화 의지를 피력하더니 '전략적 인내' 또는 '비전략적 무시'로 8년 임기를 꽉 채웠다. 후임 트럼프에게 정권을 인계하면서 '가장 절박하고 시급한 외교안보 현안'으로 북핵을 지목한 게 그나마 기억 나는 행적이다.
한반도 위기가 깊어지는 와중에 중동이 11개월째 소란스럽다. 기시감이 든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의 가상 전쟁 연습도 끝이 안 보인다. 미국은 정치적 내전 상태다.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와 일제히 '해리스 찬가'를 부른 클린턴, 오바마 부부를 보며 한반도와 미국 대선에 얽힌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 한 주였다.
한반도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나쁘다. 남이건, 북이건 정권 차원에서 어떠한 동력도 없거나, 아예 찾을 생각조차 없다. 오죽하면 트럼프라도 돌아와 '평지풍파'를 일으켰으면 하고 바라는 이들이 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한반도 평화의 관점에서 2024 미국 대선은 강 건너 구경거리에 그칠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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