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화성에서 온 해리스 vs 금성에서 온 트럼프

본문

정치인의 의중을 읽는 텍스트는 연설문과 인터뷰, 상대 후보와의 토론 등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각각 밑줄그을 대목이 다르다. 연설문이 공약과 세계관, 비전을 제시한다면 인터뷰는 후보가 감췄거나, 두루뭉술하게 넘긴 대목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질문이 흥미롭다. 지난 10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컨스티투션 센터에서 열린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첫 TV 토론은 일종의 쇼였다. 대선후보 토론 자체가 상대가 실수한 만큼 자신이 점수를 얻는 네거티브 게임이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 셈. 새로운 시각이나 공약은 거의 없었다. 토론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해리스의 순간'과 '트럼프의 순간'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컨스트튜선 센터에서 ABC방송이 주관한 TV토론을 하고 있다. 방청객 없이 진행됐고, 상대 발언시간에는 다른쪽 마이크를 껐다. 2024.9.10. UPI 연합뉴스

해리스의 순간1 "트럼프 말은 죄다 거짓말"

"여러분은 오늘밤 토론에서 (트럼프로부터) 똑같고 신물 나는 수법(playbook), 무더기 거짓말, 증오와 중상을 듣게 될 것이다. 또 '프로젝트 2025'라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이행할 구체적이고 위험한 계획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해리스)

"나는 프로젝트 2025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읽어보지도 않았다. 해리스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건 일단의 사람들이 제기한 아이디어다.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나쁠 거다. 내가 비밀이 없는 사람(open book)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트럼프)

첫 번째 주제는 경제와 생활물가였지만, 옆길로 샜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엉뚱하게 이민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자, 시청자들에게 예고하는 방식으로 트럼프의 거짓말을 부각했다. '프로젝트 2025'는 공화당의 정책공약집이 아니라, 민간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엮은 정책제안집이다. 어떠한 공식 성격이 없다. 해리스는 공화당 정강과 헤리티지의 정책제안집을 뭉뚱그려 트럼프가 불러올 끔찍한 미래상인 양 호도했다. 그러나 해리스가 입은 피해보다, 트럼프에게 입힌 피해가 컸다. 해리스는 이후에도 몇 차례 제기된 트럼프의 황당한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거짓말" "사실 아님" 등의 혼잣말로 트럼프를 자극했다.

2020년 대선 부통령 후보 TV토론에서 자신의 발언 중 끼어드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미스터 부통령, 내가 말하고 있잖아요"라며 무기력하게 항변하던 해리스가 토론의 전사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투표를 56일 남긴 상황에서 많은 미국민이 우려하는 트럼프의 선거 불복 및 2021년 1.6 의사당 폭동의 재연 가능성도 주제의 하나였다. 트럼프는 당시 "그들(폭도들)이 요구해서 연설했을 뿐"이라면서 "의사당 폭동은 내가 한 게 아니다"라고 빠져나갔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이번 대선에서도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피바다(bloodbath, 대량학살)가 될 것"이라고 말했음을 파고들었다. 트럼프는 "나는 블러드 배스(blood bath, 대량학살, 대량해고)라고 말했다. 그건 뜻이 다르다. 에너지산업과 관련한 말이었다"라고 둘러댔다. "그들(바이든-해리스 행정부)이 미국의 에너지산업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게 피바다다"라고 비켜나갔지만, 해리스에 밀리는 인상을 주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나는 거의 7500만 표를 얻었다. 이는 현직 대통령으로 최다 득표였다. 내가 질 수 없는 선거였다"고 강변하면서 우리에게는 국경장벽과 좋은 선거,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해리스는 "도널드 트럼프는 8100만명의 사람들로부터 해고당했다. 이건 분명하다. 그는 (대선 패배 후) 아주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비꼬았다. '당신은 해고야! (You’re fired!)'라는 트럼프의 트레이드 마크를 역이용한 공세였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ABC방송의 대선후보 TV토론 도중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상대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2024.9.10. EPA 연합뉴스

해리스의 순간2 '검사와 피고인' 프레임 설정

"사상 최대의 불법체류자 추방을 위해 주 방위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트럼프 발언의 진위를 확인하는 진행 앵커 데이비드 무이르의 질문에 트럼프는 "(동원하는 건) 지역 경찰"이라고 짧게 답했다. 이 대목은 진행자와 트럼프의 문답이었다. 트럼프가 토론 뒤 "1 대 3(해리스와 두 명의 진행자)으로 싸웠다"라고 말한 배경이다. 무이르는 트럼프가 재차 "수백만 명의 이민자는 범죄자이자 테러리스트"라고 말하자,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폭력 범죄 발생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트럼프는 "FBI 발표는 사기다. 그들은 범죄율이 최악인 도시들을 포함하지 않았다"다고 재반박했다.

이어 마이크를 넘겨받은 해리스는 양당 대선후보 간 대결을 '검사 대 피고인'의 구도로 일거에 규정했다. 트럼프의 모든 말을 '지겨운 거짓말'로 규정한 데 이어 이번 토론의 백미라고 할 순간이었다. 해리스는 "(트럼프는) 국가안보 범죄와 경제 범죄, 선거 개입 혐의로 기소되고 성폭행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11월 자신의 형사재판 선고 법정에 출석할 예정"이라며 트럼프에 걸린 혐의를 지적했다. '트럼프는 범죄자'라는 프레임을 설정한 것.

해리스는 종결발언에서도 자신이 법의 수호자이자, 국민의 수호자임을 거듭 부각시켰다. "나는 검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방검사, 법무장관, 연방 상원의원에 이어 지금 부통령이다. (중략) 나는 검사로서 단 한번도 피해자나 증인에게 '공화당원인가, 민주당원인가'를 묻지 않았다. 유일하게 물은 것은 '괜찮으신가?(Are you okay?)'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대통령은 여러분을 걱정하는 사람이다. 나는 모든 미국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후보 수락 연설에서 한 말이었다.

여운이 오래 갈 트럼프의 대표적 발언은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에서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먹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목에서도 해리스는 나설 필요가 없었다. 진행자 데이비드 무이르가 사실확인에 나섰기 때문이다. 무이르는 스프링필드 시 당국에 확인한 결과 "이민자 공동체에서 애완동물이 다치거나, 학대받았다는 믿을 만한 보고가 없었다"고 반박하자 트럼프는 "TV에 나온 사람이 자기 개가 잡아먹혔다고 말했다"라며 "차차 확인 해보자"라는 말로 논쟁을 닫았다. '트럼프=거짓말쟁이'라는 해리스의 프레임을 입증해 준 격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ABC방송의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말을 하고 있다. 2024.9.10. AP연합뉴스

트럼프의 순간1 "해리스가 내 철학을 따르고 있다"

"그녀(해리스)는 이제 내 철학을 따르고 있다. 그녀에게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트럼프 선거 구호)' 모자를 보내려고 했다. 그녀는 나의 철학 속으로 사라졌다. 혹시라도 당선된다면 그녀는 생각을 바꿀 것이고, 이는 우리나라의 종말이 될 것이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자다!"

해리스의 '사이다 발언'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물론 일부 중도층 유권자들에게 성공적으로 다가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순간'과 겹쳐 봐야 객관적인 관전이 된다. 정치인 대 정치인의 설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양측 모두 거짓말과 억지 주장, 프레임 전쟁을 벌였다.

바이든-해리스 행정부는 지난 3년 반 동안 트럼프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들은 다르다"라고 주장해 왔다. 중국에 대한 관세 부과, 외국기업 공장의 미국 이전, 미국 노동자 우선 정책 등이 그렇다. 해리스는 "바이든 행정부가 많은 트럼프 관세를 유지했다"는 트럼프의 발언에 대한 생각을 물은 진행자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내놓았다. 생뚱맞게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미국 반도체를 중국에 팔아 중국이 군 현대화를 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시진핑 주석이 코로나19의 기원을 흐린 책임이 있음에도 트럼프는 '고맙다. 시 주석'이라고 트위터 메시지를 보냈다"고도 주장했다. 트럼프 특유의 애국주의 선전선동으로 일관한 셈이다. "해리스가 내 철학 속에 사라졌다"는 트럼프의 통렬한 지적은 그 끝에 나왔다.

진행자가 해리스의 변명을 요구하지 않고 다음 주제인 낙태문제로 넘어감으로써 해리스는 결과적으로 트럼프를 벤치마킹했음을 시인한 꼴이 됐다. '해리스=공산주의자'라는 트럼프의 프레이밍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해리스는 트럼프의 이민자 개·고양이 취식 발언이 나온 뒤 "아마 이러한 극단적인 말이 과거 조지 부시 대통령과 밋 롬니, 존 매케인 등 대선후보와 함께 일했던 공화당원 200명이 나를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합참의장과 국가안보보좌관, 국방장관이 등이 모두 트럼프를 비난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트럼프는 역공세로 정리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일을 잘못하면 해고했다. 그들(바이든-해리스)은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인) 13명을 잔인하게 죽였음에도 책임이 있는 장군들을 해고하지 않았다. 경제를, 물가 상승률을 보라. 그런데도 어떠한 이코노미스트도 해고하지 않았다. (나를 비판하는) 책을 쓰는 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역사상 어떤 공화당원(대선후보)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2020년 대선에선) 역사상 어떤 현직 대통령보다 많이 득표했다"는 말로 일축했다.

"몇 달 전(지난 7월) 대선후보 TV 토론에 나왔던 '허약하고 병든 사람(바이든)'은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1400만 표를 얻었지만, 그녀(해리스)는 얻은 표가 없으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말한다"고 통박했다. 해리스가 예비선거 없이 대선후보가 됐음을 지적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컨스트튜선 센터에서 ABC방송이 주관한 TV토론을 하고 있다. 해리스는 트럼프의 주장에 특유의 웃음을 짓고 있다. 2024.9.10. AP 연합뉴스

트럼프의 순간2 "세계가 왜 폭발하고 있나?"

바이든 시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한 트럼프의 반박도 눈에 띄었다. 그는 '스트롱맨'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자신에게 한 말이라면서 "세계 지도자들은 왜 전 세계가 폭발하고 있나?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3년 전에는 안 그랬는 데 왜 폭발하고 있나.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돌아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그들은(세계 지도자들은) '중국도, 북한도 그(트럼프)를 두려워한다. 지금 북한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돌아봐라. 오르반은 러시아도 그를 두려워한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내가 대통령이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다. 이 전쟁을 끝내는 게 미국에 최상의 국익이라고 생각한다. 타협안을 협상해 이 모든 인명이 파괴되는 걸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해리스는 "트럼프가 '취임하면 24시간 이내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건 우크라이나를 그냥 포기하는 것"이라면서 전쟁 발발 며칠 전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루마니아를 돌면서 방어 대책을 논의했음을 강조했다. 트럼프는 "그들(바이든 행정부)은 해리스를 우크라에 보내 평화를 협상하게 했지만, 사흘 뒤 러시아가 침공했고 전쟁이 시작됐다"라면서 "해리스는 끔찍한 협상가"라고 단언했다. 해리스가 러시아 대통령이 아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을 만났음에도 협상에 실패했다는 점을 한껏 강조했다.

2022년 7월 바이든 행정부의 굴욕적인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트럼프 측의 주요 공격 포인트.

해리스는 "4명의 대통령이 아프간 철수를 다짐했지만 이를 실행한 건 바이든이었다. 그 덕분에 미국민은 끊임없는 전쟁에 하루 3억 달러를 지출하지 않게 됐다"면서 트럼프가 재직 중 아프간 정부가 아닌, 탈레반과 협상했던 점을 비난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보내 탈레반 지도자 압둘과 협상한 덕에 합의안이 도출됐고 18개월 동안 아무도 죽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철군 과정에서 미군 13명이 죽은 것을 거듭 상기시키면서 바이든의 철수 과정에서 850억 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사 장비를 두고 왔음을 지적했다. "러시아가 우크라를 공격한 것 역시 해리스와 그녀의 보스가 무능력하게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지만, 푸틴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 위협을 당하면 사용할 거다"라는 트럼프의 말도 핵전쟁을 싫어하는 미국민에 다가갔을 말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1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컨스트튜선 센터에서 ABC방송 주관 TV토론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2024.9.10. AP 연합뉴스

해리스가 화성에서 온 여자라면, 트럼프는 금성에서 온 남자다. 각기 다른 생각과 철학, 가치관을 갖고 있다. 지지층 역시 도저히 화합하기 어려운 성향이기에 TV토론에서도 듣고 싶은 말과 보고 싶은 장면에만 주목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나리오 준비에선 해리스가 단연 부지런했다. 토론 장소와 비슷한 무대를 마련하고 대역을 내세워 사전 연습을 열심히 한 덕이다. 토론 2시간 전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트럼프는 평소 유세하듯이 임했다. 상대가 칼을 갈고 있는 검투장에 무방비로 나간 셈이다. 해리스를 무시한 만큼 상처를 입었다. 해리스가 던진 미끼를 덜컥 물어 곤욕을 치르는 장면을 몇 차례 노출했다. CNN 여론조사에서는 63% 대 37%로 해리스가 트럼프보다 "잘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선거의 판세를 예견할 만한 근거는 제공하지 못했다.

해리스는 토론 결과가 반영된 4곳의 여론조사 중 로이터/입소스, 모닝컨설트, 뉴욕포스트 등 3곳에서 트럼프에 비해 3~5%P의 우세를 보였다. 트럼프는 라스무센 리포트에서만 49% 대 47%로 2%P 앞섰다. 중요한 건 평균치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가 TV토론을 전후한 기간(8.22일.~9.12.) 실시된 13곳의 여론조사를 집계한 결과 해리스는 1.5%P가 우세했다. 민주당 전당대회(8.19~22) 뒤 최대 1.9%P(9.3.)까지 넓혔던 격차는 회복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우세를 이어가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