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유독 법률가 출신 대통령이 많은 나라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사회정의와 국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는 주장을 내놓는 이들이 많다. '민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검사도 있다. 하루아침에 신데렐라처럼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경우다.
해리스가 추구하는 가치와 세계관, 목적 달성을 위해 접근하는 방식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의 검사 생활을 돌아봐야 한다. 해리스는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을 졸업한 다음 해(1990) 캘리포니아주 알라메다 카운티의 부 지방검사(D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두 차례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2002~2010)와 두 차례 주 법무장관(2010~2017)을 각각 역임했다. 이후 연방 상원의원(2017~2021)을 거쳐 부통령(2021~현재), 대선후보까지 꽃길을 걷고 있다.
정치인이 되기 전 직업은 검사가 유일하다. 이 대목에서 미국 지방검사나 주 법무부 장관이 상명하복에 투철한 대한민국 검사와 본질적으로 다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DA와 주 법무장관은 4년마다 직선으로 선출된다. 유권자들의 기대에 어긋난다면 소임을 계속 맡을 수 없기에 다음 선거를 염두에 둬야 한다. 해리스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소신을 바꿔온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해리스는 캘리포니아주 역사상 첫 여성-흑인-아시아계 법무장관으로 큰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실용주의자 또는 현실주의자였다. 샌프란시스코 DA 사무실에 2005년 채용됐던 라티파 사이먼(당시 28세)은 마약 초범에게 실형을 면제해 주는 프로그램을 추진했던 급진적인 사회 운동가였다. 사이먼은 해리스가 당시 "지역사회는 내가 4년 동안 모든 인종주의와 모든 잘못을 고칠 것을 요구하겠지만, 현실에서 변화는 조금씩, 조금씩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에 회고했다. 타임스는 바로 이 대목이 지금까지 해리스의 정치적 철학이 됐다고 지적했다. 당선되면 사상 첫 여성-아시아계 대통령이자, 사상 두 번째 흑인 대통령이 된다. 그런데 역사적 아젠다는커녕 자기 아젠다가 없다. "마음속 깊이 신중한 제도주의자(institutionalist)이기에 광범위한 사회적 변동보다 점진적인 충격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게 타임스의 관측이다.
오바마처럼 인종, 지리, 정파적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메시지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처럼 구조적인 변화나 경제 개혁을 주장하지 않는다. 조 바이든 대통령처럼 도널드 트럼프 시대 조각난 미국의 영혼을 복원하겠다는 등의 거대 메시지가 없다. 해리스 상원의원실 정책국장을 지낸 로히니 코소글루는 "해리스는 '늘 가장 짧은 시간에 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엄청난 실용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실용주의자라는 동전의 다른 면은 정치적으로 유리하다면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검사 시절부터 상황에 따라 입장을 자주 바꾼다는 비난을 받은 이유다. 샌프란시스코 DA 취임 직후에는 경찰관을 살해한 범인에 대한 사형 집행에 난색을 보였다가 동료 민주당원들과 경찰 및 피살자의 가족들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다. 6년 뒤 해리스는 주 법무장관에 출마하면서 "법 규정 대로 사형을 집행하겠다"며 입장을 번복했다.
잦은 말 바꿈과 노선 변경은 대선후보가 된 뒤에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CNN과의 첫 인터뷰(8.29.)와 트럼프와의 TV토론에서 인터뷰와 토론 진행자들로부터 지적을 받은 대목이다. 손바닥 뒤집듯 바꿔온 대표적인 입장은 △국경 문제에 대한 비범죄적 접근→범죄적 접근 △셰일가스의 수압파쇄공법 반대→찬성 △오바마 케어(지불가능한 건강보험법)에 사보험 반대→찬성 등이다. 검사 시절부터 총기 규제에 강한 의지를 내보였지만, TV토론에서 "팀 월즈(부통령 후보)와 나는 모두 총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총을 빼앗지 않을 거다"라고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최고위 지도부에서조차 대통령으로서 해리스의 아젠다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타임스는 전했다. '뭘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데 뭔가 할 것 같기는 한' 게 해리스가 주는 '기쁨(joy)의 정치'다. '무엇이 카멀라 해리스를 움직이는가?'라는 제목의 타임스 8월 22일 자 특집은 이러한 특성을 '가능성의 예술(The Art of the Possible)'이라며 우호적으로 표현했다.
미국 민주당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진보주의자들이 해리스에게 희망을 두고 있지만, 답답해하는 이유다. 상원의원 동료로 4년간 해리스를 관찰했던 버니 샌더스는 최근 인터뷰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부의 불평등과 관련해 진보적인 주제들을 다뤘지만, 대통령 해리스의 아젠다가 얼마나 진보적일지를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했다. 타임스는 보좌관들도 해리스가 취임 첫 몇 달 동안 무엇을 할 지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임을 인정한다. 해리스는 지난 8월 29일 CNN과의 첫 언론인터뷰에서 "당선 첫날 중산층을 지지하고 강화하겠다"는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었다.
유세 때마다 해리스가 강조하는 경제적 공정성과 성적 평등, 낙태권 보장의 법제화, 투표권과 총기 규제 등을 관철하려 하겠지만, 이는 의회 공화당의 반대를 극복해야 가능한 일들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ABC 방송 대선후보 토론에서 낙태권 법제화와 관련해 "어차피 해리스는 의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는 사회를 재구조화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밤잠을 설치게 하는 (생활) 문제들을 다룰 생각이다." 해리스가 2019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기 전 타임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대선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현재까지 정치적 염색체(DNA)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미국 주류 언론이 해리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보도를 하는 것은 일견 이해가 된다. 트럼프의 재집권을 막으려는 기성 제도의 반발을 대변한다. 한반도 거주민 관점을 놓치고 덩달아 춤추다보면 오판이 불가피하다. 해리스-트럼프 TV토론을 다룬 르몽드의 지난 12일자 사설은 "해리스가 자신의 대통령 직무 계획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바이든이 경선에서 물러난 뒤 단 한 차례의 인터뷰(CNN)만 허락할 정도로 질문에 답하기를 꺼리는 해리스는 자신의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관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뚜렷한 정치적 색깔이나 아젠다 없이 대선 유세에 나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현재의 미국 대선을 '발본적 거짓 대 위선적 무책임'으로 규정하며 "트럼프는 미국의 근본적 문제들을 지적하지만, 말도 안 되는 과장과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해리스는 (근본적) 문제들을 '정치적 올바름'과 트럼프 비판으로 비껴가면서 해법은 전해 내놓지 못하는 무책임으로 일관한다"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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