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말쑥한 정장을 입는 자리에 누군가 평상복을 입으면 눈에 띈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공식 행사에서 복장 규칙을 정하는 이유일 것이다. 제76회 국군의 날이던 지난 1일, 서울 세종로 시가행진에 참가한 주한미군 병사들이 유독 눈에 띈 이유다.
소총도 지참하지 않은 미군
국군은 대부분 늠름한 위용을 보였지만, 미군은 단출한 군복 차림으로 행진에 임했다. 소총도 휴대하지 않았다. 발맞춤을 의식하지 않는 병사도 종종 보였다. 미군은 원래 그런가? 미군 군사행진 매뉴얼이 궁금해졌다. 한국군 참가 병사들은 지난여름 온통 국군의 날 기념식과 시가행진 연습에 몰두했다.
전두환 군사정권 이후 처음으로 연 2년 실시된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었다. 일각에서 79억 원의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군의 전력 손실이다. 올림픽을 앞둔 국가대표 운동선수와 군인의 공통점은 7~9월 석 달이 가장 중요한 훈련기간이라는 점이다. 불볕더위 시간만 피하면 부상할 확률이 가장 낮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육해공, 해병대를 비롯해 많은 군부대가 영향을 받았다. 참가 부대는 1개 대대이더라도 평균 신장(175㎝?)을 맞추려면 다른 부대에서도 차출이 불가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육, 해, 공 사관학교의 경우 전체가 참가했다. 군 전력의 일정 부분과 미래 국방의 간성이 죄다 중요한 훈련 시기를 놓친 것이다. 대부분의 준비는 열병과 분열 연습에 집중됐을 터. 열병, 분열은 일렬로 늘어서 일제사격을 하는 '전열보병전법'이 중심이었던 19세기의 유산이다. 정부는 군의 사기 진작을 기념행사의 가장 큰 의미로 내세웠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념식 모두발언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의 빈틈 없이 나라와 국민을 지키고 있는 국군 장병 여러분께" 감사를 표했다. 주한미군과 유엔사 장병들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았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지난 30일 정례 브리핑에서 "국민들께서 국군의 위용을 보시고 장병들에게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시면 사기 진작에 큰 영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력과 위용, 군사력을 과시함으로써 대북 억제력도 제공한다"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우리의 무기체계를 내보임으로써 방위산업 수출을 촉진할 것이라는 바람도 내비쳤다. 세 마리 토끼잡이라는 것.
대북 억제? 되레 자극
국민의 감동을 측정한 여론조사는 아직 보지 못했다. 대북 억제력 효과는 미지수다. 되레 자극했다. 김강일 북한 국방성 부상이 1일 발표한 담화는 국군의 날 행사 자체에 어떠한 의미도 두지 않았다. 다만 이날 미국 전략폭격기 B-1B의 배치에 대해 "미국의 허세성 무력시위 놀음"이라며 "철저히 상응한 행동을 취할 것"을 다짐했다. 방산 수출 촉진 효과는 당장 측정이 어렵다. 어찌 됐든 국군의 날의 주인공은 국군이다.
지난여름 열병, 분열 연습에 몰두했을 병사들은 행복했을까? 제식훈련은 절대 즐겁지 않다. 군 미필자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집단 경험칙이다. 두 명의 병사가 연습 과정에 다쳐 병원 치료 뒤 행진에서 열외됐다. "1년 365일 분열, 열병 훈련을 해도 군 전력 강화에는 도움이 안 된다" "군의 사기 진작보다 국민에 대한 군기 잡기 성격이 짙다"는 등의 냉소적 반응이 나온 이유다. 미군의 행진은 보기에도 편했지만, 준비 과정도 편했을 것. 어차피 한국군 행사였기에 자체 군사행진 관련 매뉴얼을 따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군사행진을 사랑한 '군 미필 대통령'
군사행진을 유독 좋아했던 '군 미필 대통령'은 미국에도 있었다. 오는 11월 대선에 다시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2018년 11월 11일 재향군인의 날, 워싱턴에서 대대적인 퍼레이드를 계획했다. 1991년 걸프전 승리 기념 군사행진 이후 처음이기에 반발이 상당했다. 트럼프는 미국 5대군(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해안경비대) 부대와 각종 군사장비를 총동원할 작정이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냐" "북한식 행렬을 하자는 건가"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트럼프도 최소 5000만 달러(약 66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행사를 전격 취소했다. 이듬해 독립기념일(7.4.) 기념행사에 군사 행진을 얹었다.
'미국에 대한 경례(Salute to America)'로 명명된 행진은 군사력 시위라기보다 축제에 가까웠다. 미 육군 브래들리 전차가 등장하고 공군기 비행이 뜨고 5대 군의 대표부대가 참가했다. 트럼프는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링컨 기념관에서 축하 연설을 했다. 전략적 경쟁국을 겨냥한 무력시위 성격은 없었다. 만사를 돈으로 환산하는 거래주의자도 방산 수출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의 국가로 모였다.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국민, 우리의 국기를 자랑스럽게 지켜낸 영웅들을 축하하기 위해서다"라며 243년 역사에서 군의 업적을 칭송했다. 청중은 "USA, USA, USA"를 외치며 환호했다. 트럼프의 기획 의도는 애국주의 환기였다. "5대 군에 우주군이 더해질 것"이라고도 밝혔다. 트럼프는 2002년 해체된 '우주 사령부(사령관 4성 장군)'를 행사 한 달 뒤(8.29.) 재창설했다.
'전략'이라 적고 전략적 수단이 없는 전략사
트럼프가 우주 사령부 창설에 의미를 부여했듯이, 윤 대통령은 전략사령부 창설을 각별하게 전했다.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든든하게 지키는 핵심부대가 될 것"이라고. 진영승 초대 사령관(공군 중장)에게 부대기도 전달했다. 전략사 창설은 국정과제의 하나로 작년 4월 26일 한미 '워싱턴 선언'에도 담겼다. "윤 대통령은 한국이 동맹의 연합 국방 태세에 모든 분야의 능력을 적용할 것"이라며 "여기에는 새로 창설될 한국 전략사와 한미연합사의 능력과 계획 활동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적시했다. 자체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한 문장과 함께 '두 대통령'이 아닌 '윤 대통령'만을 주어로 쓴 문장이다.
전략사는 북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킬 체인-한국형 미사일방어-대량응징보복 등 '3축 체계'와 우주 전략을 맡는다. 그런데 현실과 목표가 일치하지 않는다. 전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가 전략사를 창설하는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 독일은 핵무기 배치 국가이지만 전략사가 없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핵계획그룹(NPG)에 따라 국내 배치된 미군 B61중력탄 운반용 항공기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내년 3월까지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통합군사령부(JFHQ)를 창설하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확장억제력을 포함해 유사시 한미 양국군의 전력을 통합, 운영할 시스템이 이미 있다. JFHQ이 이상적 모델로 삼고 있는 한미연합사(CFC)가 그것이다.
차라리 '트럼프식 축제'는 어떨까
한국군 전략사는 '전략'이라고 적었지만, 전략적 수단(핵무기)과 기능이 없다. '3축 체계'는 전술적 수단으로 전술적 기능을 한다. 우주공간에도 독자 방위 수단이 없다. '전략사'가 옥상옥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더욱이 전략사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순간, 즉 '전쟁준비상황(데프콘3)'이 되면 3축 체계는 합참 예하 다른 기능사령부와 함께 한미 연합사에 흡수된다. 전시작전통제권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단과 기능이 없이 창설돼 유사시 한미 연합사에 흡수될 사령부를 왜 창설했을까? 군사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행사가 끝나고, 부대는 복귀했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 안전해졌을까? 아니다. '자유의 북진' '힘에 의한 평화' 등 구호만 텅 빈 거리를 맴돈다. 군사적 긴장은 여전하다. 그래도 대대적 행사를 계속하려면 '트럼프의 선례'를 좇는 것도 방법이다. 공연히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고 국민과 국군이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을 마련하는 게 어떨까 싶다. 시가행진은 전시나, 전쟁이 끝났을 때나 유용하다. 국방은 군통수권자가 합목적성에 이탈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분야다.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전력 약화, 예산 낭비로 이어진다. 군이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고, 국민이 편할 때 국군의 위용은 더 커진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미8군 공보관실에 미군의 군사행진 매뉴얼 등을 문의했지만 답신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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