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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걸려 있는 한반도 평화, 위태로운 '위협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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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4일 유엔사무총장 대변인은 우리에게 '수사의 수위를 낮추길 바란다'는 요청을 해왔다. 이같은 요청이 서울에도 전달됐는지 불분명하나 (…) 나는 분명히 일관하게 군사력 사용에 관한 우리의 입장을 천명할 때마다 '만약'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개교 60주년을 맞이한 '김정은국방종합대학'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2024.10.8.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말은 내뱉는 순간 허공에서 사라지기도 하지만, 자칫 큰 싸움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 저잣거리의 흔한 싸움과 마찬가지로 말과 말이 부딪히면서 긴장이 높아지면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헤즈볼라-이란 전쟁의 와중에서 유엔의 존재는 갈수록 추레해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에서 건설적 역할을 한 기억도 까마득하다. 그나마 '말의 전쟁'을 막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엉뚱하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7일 김정은국방종합대학 개교 60주년 기념연설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김 위원장은 '유엔의 당부'를 들머리로 군사력 사용에 관한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적들이 우리 국가를 반대하는 무력 사용을 기도한다면 공화국 무력은 모든 공격력을 주저없이 사용할 것이며, 여기에는 핵무기 사용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전 시기에 우리가 그 무슨 남녘해방이라는 소리도 많이 했고, 무력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두 국가를 선언한) 지금은 전혀 관심이 없다"라면서 "솔직히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의식하는 것조차 소름이 끼치고 그 인간들과는 마주 서고 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유엔 누리집에 따르면 지난 4일 한반도 관련 일정은 없었다. 어떤 계제에서 북한에 '말조심'을 요청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이러한 당부를 한 건 처음이 아니다. "(북한의) 고립이 아닌, 외교로 한반도에서의 '부정적 궤적'을 뒤집어야 한다"는 게 구테흐스 총장의 지론. 작년 4월 13일 북한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관련국 장관급 회의에서 북한과 한미동맹이 무한 대치하는 상황을 개탄하며 한 말이다. 구테흐스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거론하면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하고, 대화 재개를 촉구했다.

최고인민회의 개최를 앞두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군부대 시찰이 잦다. 김 위원장이 2일 서부지구 특수작전부대 훈련기지를 현지시찰하며 장병들을 만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4일 보도한 사진. 2024.10.4. 연합뉴스

더불어 "적대적 레토릭(수사)을 줄인다면 정치적 긴장을 낮추고 외교적 접근을 탐사할 공간을 만들어낼 것"이라며 말조심을 당부했다. 북한이 화성-12형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2022년 2월 1일 안보리 긴급회의에서도 대변인을 통해 강조한 말이다. 안보리 제재 결의를 위반한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면서 지속가능한 평화의 방안으로 대화와 외교를 역설했다. 북한과 한미동맹이 정확히 거꾸로 가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메시지를 되풀이 내놓고 있다.

김 위원장은 북한 국방과학과 방위산업의 미래 일꾼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힘의 균형'을 강조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며, 한미동맹이 '핵동맹'이라는 사실도 인정했다. "조선반도에서 전략적 힘의 균형의 파괴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라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밝힌 '군사력의 압도적 대응'을 거론했다. "현명한 정치가라면 국가와 인민의 안전을 놓고 무모한 객기를 부릴 것이 아니라 핵국가와 대결과 대립보다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 상황관리 쪽으로 더 힘을 넣고 고민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요약하면, '만약'을 전제로 핵무기를 포함한 공격 의지를 강조하는 한편 상황관리의 중요성을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물잔에 비유하면 위협의 절반을 채우고, 절반을 남겨 놓은 셈. 윤 대통령 역시 '만약'을 전제로 물잔의 절반을 채운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 사용을 기도한다면 우리 군과 한미동맹의 결연하고 압도적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면서 "그날이 바로 북한 정권의 종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이 물잔의 중간선을 지키면서 '위협의 균형'을 이룬다면 적어도 물이 흘러넘치는 파탄은 없을 것임을 윤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역설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구테흐스가 강조한 말조심 당부 역시 같은 맥락에서 대화와 외교를 역설한 것이다. 남북 지도자와 유엔 수장이 한줄기 입장이라면 한반도 안보 전망이 긍정적일까? 그렇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제76주년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열린 1일 서울 광화문 월대 무대에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2024.10.1. 연합뉴스

말에 관한 한 북은 늘 앞서 나간다. 김 위원장은 미국을 '반공과 전쟁에 명줄을 걸고 있는 침략의 원흉'으로, 대한민국을 '그 사환군(꾼)'으로 지칭했다. "더러운 명줄이 끊기는 시간을 감득할수록 더더욱 발광적으로 나오기 마련이며 마지막 힘이 깡그리 소모될 때까지 전쟁에로 줄달음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거론한 '정권 종말의 날'에 대해 "천박하고 상스러운 망발"이라면서 "상전의 '힘'에 대한 '맹신'에 완전히 깊숙이 빠져 있다"고 비꼬았다. 윤 대통령에 대해 "좀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는 의혹을 사기가 쉽다"라는 등 상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수사가 상궤를 벗어나지 않더라도 상대를 자극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흡수통일을 암시하는 '자유의 북진'이나 '힘에 의한 평화' 등 남측이 내놓은 말 역시 북한을 자극했을 터. 윤 대통령은 북한을 상대로 "핵무기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가 '변곡점'에 처했다"는 말이 종종 나오지만, 한반도는 그리 한가하지 않다. 점은 선이 됐고, 선은 면이 됐으며, 면이 불온한 전략공간이 된 지 오래다. 남북은 전쟁준비, 전쟁연습, 무력시위에 각각 열을 올리면서 갈수록 말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표현 수준이 어떠하든 서로에 대한 위협의 끝은 남과 북의 공멸이다. 자기 핵이든, 남의 핵이든 모두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으로 쌓는 성에는 철근도, 콘크리트도 없다. 

북한은 7일 개막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1차 회의에서 헌법에 '영토조항'을 신설하고, 남북이 '교전 중인 두 국가'임을 명시하겠다고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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