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을 기점으로 '평양 무인기 침범'을 경고한 북한 대남 메시지의 말이 짧아졌다. 특유의 현란한 어투를 걷어냈다. 조선중앙통신은 1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전날 "국방-안전 분야 협의회를 개최해 강경한 정치군사적 입장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13일 20시까지 전시정원편제대로 완전무장한 8개 포병 여단이 완전사격준비 태세로 전환하라"는 인민군 총참모부의 '작전예비지시'를 추인한 회의였다.
며칠새 말이 짧아진 북한
사흘째 담화를 내놓은 김여정 당중앙위 부부장은 14일 무인기 침범의 주체가 한국 군부라면서 핵보유국(미국)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두 문장의 짧은 담화를 발표했다. 재발 시 '끔찍한 참변'을 경고한 12일 담화와 확 달라진 어조다. 말이 줄면 '행동'이 가까워졌다는 징후일 터.
이제 무인기 침범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덜 중요해졌다. 남의 태세가 북을 더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현 사태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한다면 불똥이 남쪽으로 튈 가능성이 갈수록 농후해진다. 13일 자 김여정 담화는 '경고'가 아닌 '촉구'로 끝을 맺었다. 그는 "속히 타국의 영공을 침범하는 도발행위의 재발 방지를 담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일부 탈북자 단체의 삐라풍선 부양 중단을 촉구했던 지난 5월 말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 끝에 '표현의 자유'를 빈정대며 보내기 시작한 게 오물풍선이었다. 이번엔 자위권 발동을 말한다. 삐라풍선과 오물풍선 교환이 악취를 풍기는 '더러운 대결'이었다면, 이번엔 '위험한 대결'이다.
남은 북의 경고만 깡그리 무시하는 게 아니다. 14일 우리 합동참모본부 정례브리핑에 "전쟁 나는 거 아니냐"는 세간의 우려가 전달됐지만, 뭉개고 있다.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다?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1일 저녁 한국 무인기가 이달 들어 세 차례나 평양 중구역 상공에 침투, 삐라를 뿌렸다면서 군사 공격 최후통첩에 대해 "오랫동안 경험에 의하면 무시하는 것이 최고의 정답"이라고 말했다. 그가 13일 한국방송 일요진단에서 요약한 우리의 입장은 세 가지다. "확인해 줄 수 없고, 모든 책임은 쓰레기 풍선을 내려보낸 북한에 있으며, (북의 조치가) 우리 국민의 안전에 위해가 되면 강력하게 응징하겠다"는 것.
풍선에 실렸건, 무인기에 실렸건 북한 정권은 삐라를 치명적 위협으로 인식한다. 체제 전복의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어떠한 고성능 폭탄보다 위협적이다. 대남 메시지에 절박한 인식이 읽히는 까닭이다. 탈북자 단체들이 보내는 K-Pop과 드라마는 또 다른 위협이자 고도의 심리전이다. 북한은 젊은이들의 서울 말씨 사용을 금지하는 평양문화어보호법과 남쪽의 문화적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삐라풍선을 방치하는 건 간접적으로 체제전복을 도모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신 실장은 북한의 '평양 무인기' 주장 역시 "북한 내부가 흔들린다는 방증"인 동시에 남남갈등을 부추기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우리 합동참모본부는 북한의 오물-쓰레기 풍선이 삐라풍선 부양 때문이 아니라며 프레임 전환을 시작했다. 14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의 오물-쓰레기 풍선 부양이 대북 삐라풍선에 대한 답이 아니라, 우주발사체 발사 실패 때문이라고 우겼다. 지난 5월 27일 발사에 실패하자 하루 뒤 28일부터 오물풍선을 날리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탈북자 단체의 대북 삐라풍선을 아예 악화된 사태와 분리했다.
북한 체제 흔드는 '종이폭탄'
북한은 일관되게 삐라풍선을 이유로 지목해 왔다. 삐라풍선 부양 통제를 촉구하며 오물풍선 부양을 일시 중단한 적도 있다. 김강일 국방성 부상은 6월 2일 오물풍선이 삐라풍선에 대한 '대응조치'였다면서 만약 삐라살포가 계속되면 재개할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삐라풍선이 계속 마파람을 타고 올라간 탓에 쓰레기 풍선이 된바람에 실려 28차례나 내려왔다. 이제는 '평양 무인기 삐라'가 등장했다.
5개월째 북한 심장부 위협을 방관해 온 국가안보실과 국방부는 우리가 받을 위협을 지나치게 가볍게 인식하고 있다. 신 실장은 북한의 경고에 대해 대한민국이나 미국이 북한의 어떤 도발에 크게 부담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북한이 알 것"이라며 "(노동신문 보도로 일반 주민에 알린 건) 내부통제용"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천안함, 연평도 도발 등 직접적인 군사 도발은 그들도 승산이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쓰레기 풍선이나 GPS교란 등 저강도 도발은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합참은 전쟁발발을 우려하는 질문에 북한의 다음 행동으로 △우주발사체 발사 △경의선, 동해선의 보여주기식 폭파 △작은 도발 등으로 답했다. 북은 합참의 예상대로 15일 경의선, 동해선 도로를 폭파했다.
신 실장은 "북한 주장은 무조건 무시하는 게 경험칙"이라고 주장했지만, 북한을 마주하고 분석해온 경험이 많은 이들의 생각은 다르다.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의 생각을 들어보자. 그 역시 "북한이 무모한 정권이지만, 자살 정권은 아니다"라면서 "먼저 공격받기 전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대통령(국군의 날 기념사)이나 신 실장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에 없는 2차, 3차 분석을 한다. 페리는 북한이 "(핵보유 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특히 남한을 상대로 숱한 도발을 해왔다. 핵무기는 더욱 무모한 도발을 하도록 힘을 실어줄 것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페리는 한미가 북한의 재래식 도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결국 핵전쟁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누차 경고하고 있다.
북한의 종말? 되새겨야 할 '페리의 경고'
김정은의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시대와 달리 체제 경쟁은 물론 통일도 포기했다. 오죽하면 "솔직히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라며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말했겠나. (7일 국방종합대 연설) 경제 회복과 홍수 피해 복구에만도 바쁘다. 삐라를 통한 체제 위협과 남한 문화 유입도 만만찮은 존재론적 위협이다. 그러나 위협 인식이 한도를 넘어서면 행동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취하고 있는 대북 태세는 일종의 도박이다. 아무리 대북삐라가 평양 노동당사에 떨어져도 북이 '작은 도발'을 할 것으로 간주한다. 서울 광화문에 떨어진 건 휴지조각이었지만, 평양에 떨어진 건 체제를 위협하는 '종이폭탄'이다. 신원식 국가안보실과 김용현 국방부가 주도하는 대북 강경 태도는 국민 안전을 인질로 하고 있다. 국민 안전은커녕 내놓고 국민 불안을 조성한다. 북한의 다음 행보도 우려되지만, "제발 따로 살자"는 북한을 자극하는 의도가 대단히 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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