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30여년 동안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남북 간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미·중·러가 내놓는 반응은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미국과 서방은 주로 북한의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을 비난하며 한국을 지지하고, 러·중은 중간자 입장에서 당사국의 자제를 당부했지만, 결론은 같았다. 큰 틀에서 대화와 외교를 통한 문제 해결을 촉구, 최소한 긴장 완화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패러다임의 한 축이 무너졌다.
미증유의 사태
러시아가 북한의 '평양 무인기 침범'을 주장하면서 불거진 긴장 국면에 한국의 '호전적 태세'를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이 침략당하면 군사지원할 것을 명시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북·러 신조약)'의 이행도 강조했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 차관은 15일 "한국의 최근 행동이 한반도 안정을 해치고, 긴장을 더 높이는 도발 행동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루덴코 차관은 파키스탄 방문 중 언론 접촉에서 이같이 밝히면서 "이는 위험한 전개이며 이제 멈춰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고 연합뉴스가 타스통신을 인용, 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북한에 대한 침략행위가 발생하면 러시아가 군사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아직 발효되지도 않은 조약안을 언급한 것이다. 레오니트 슬루츠키 하원(두마) 국제문제위원장은 11월 초·중순쯤 조약 비준 절차가 진행될 거라고 밝혔다. 조약안 제4조는 유사시 유엔헌장 51조(개별·집단 자위권 인정)와 북·러 국내법에 따라 지체없이 상호 군사지원을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정리된 입장은 14일 마리야 자하로바 외교부 대변인이 발표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한국이 무인기로 평양 상공을 침범, 삐라를 뿌렸다"는 북한의 발표를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이어 "(한국의) 그러한 행동은 북한 주권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인 동시에 독립국가의 합법적 정치·정부 시스템을 흔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내정 간섭"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한국 당국은 북한의 경고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무모하고 도발적인 군사작전 등 추가 상황 악화를 중단해야 한다"면서 "긴장을 악화하고 실제적인 군사적 대치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하로바는 윤석열 정부의 '8·15 통일 독트린'도 저격했다. "한국은 유사 자유(liberty)의 가치를 적용하고, 자유(freedoms)를 확산함으로써 북한을 합병하겠다는 선전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라면서 "이는 주로 한국 국민을 위험하게 한다"고 말했다. "불가분의 안보(Indivisible security) 원칙에 근거한 정치적, 외교적 조치만이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담보할 것"이라면서 "한국과 한국의 상위 동맹인 미국이 군사적 침략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면, 다른 대안은 없다"고 단언했다.
"흡수통합 선전 중단하라"
러시아 입장은 특히 한국의 북침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6월 평양에서 체결한 북·러 신조약의 '상호 군사지원'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자 "내가 알기로 한국이 북침할 계획이 없기 때문에 우리(북·러)의 이러한 협력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었다. 이번엔 당시 배제했던 한국의 북침을 전제로 했다.
북한으로선 북핵 문제가 불거진 1990년대 초 이후 처음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확실히 벗어났다. 러시아와 중국은 2019년 이전까지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의 핵·탄도미사일 시험 때마다 제재 결의에 찬성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 대북 제재위원회를 무력화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2019년 말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버전의 '러중 공동입장'을 관련국에 전달, 적극적이고 건설적 역할을 자임해 왔다. 자하로바 성명에서도 한반도가 위험한 전개를 피하면서, 긍정적인 궤도로 복귀하도록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를 구현할 통로의 하나로 '러·북 신조약'을 언급, 기존의 중간자에서 북한에 경도된 노선 변경을 분명히 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뒤 악화 일로를 걸어 온 한·러 관계의 현주소를 반영한 것으로 단순히 윤석열 정부에 대한 통렬한 비난에 그치지 않는다. 양국의 미래 관계에도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그은 것으로 평가된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 주도 집단서방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는 한편, 네 차례에 걸친 독자 제재를 단행, 수출통제(상황허가) 물품을 총 1402개로 늘렸다. 러시아는 그동안 한국의 '비우호적 조치'에 항의하면서 '비대칭적 조치'를 경고했었다. 그 끝에 성사된 것이 북·러 신조약의 체결이다.
러시아는 한편으로 "한국은 비우호국 중 가장 우호국(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이라면서 우크라 전쟁 뒤 한·러 관계 복원에 대한 희망을 표현해 왔다. 한국의 잇따른 대러 제재에도 러시아가 어떠한 보복 제재도 하지 않은 것도 이를 반영한다. 우리 측도 장호진 대통령 외교안보특보가 국가안보실장 시절인 지난 6월 "한·러 관계는 언젠가 제자리로 가야 할 관계"라고 표방하는 등 미래 관계 복원 의사를 비쳐왔다. 14~15일 러시아의 공개적인 비난은 한국의 '반 러시아, 친 우크라' 입장 표명과 우크라 지원에 대해 누적된 불만의 표출로 읽힌다.
대통령 잦은 대러 강경발언
15일 "한국의 도발적 행동 중단"을 촉구한 루덴코 차관은 바로 지난 2월 4일 방한, 8개월 만에 복원된 한·러 차관급 대화의 주역이다. 그러나 당시 그의 방한도 우리 외교부가 윤석열 대통령의 북한 비난에 대해 자하로바가 "노골적인 왜곡"이라고 꼬집은 데 항의, 같은 날 주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해 빛이 바랬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서도 우크라에 대한 안보·인도적 지원·재건 지원 프로그램 확대를 다짐했다.
북한의 '평양 무인기 침범' 주장은 아직 실체적 진실이 규명된 게 아니다. 북한 역시 우리 군이 주범 또는 공범이라고 주장, 무인기를 보낸 주체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두고 댓바람에 한국을 비난한 건 아무리 우크라 전쟁 이후 한국에 대한 감정이 쌓였다고 해도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 외교부가 15일 발표한 '러시아 외교부 성명에 대한 입장'에도 명시했듯이 지난해 12월 말 북한 무인기의 서울 상공 침범 당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에 비교해도 형평성을 잃었다.
1990년 한·소(러) 수교 이후 러시아가 한국의 특정 정권을 상대로 전방위적 비난전을 펼친 것은 처음이다. 수교국에 대한 외교적 공세에 정부가 공식성명이 아니라, 보도참고자료(PG) 형식으로 입장문을 낸 것도 이례적이다. 최대한 강경 대응을 자제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입장문은 "러시아 외교부가 사실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은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을 두둔하며 북한의 주권 침해 및 내정 간섭을 운운한 데 깊은 유감"을 표했다. 이어 "모든 책임은 동족을 핵무기로 위협하며 공격적 언행을 서슴지 않는 북한에 있다"고 지적했다.
급속히 악화된 한·러 관계 관리 실패
그러나 러시아의 한반도 태세 전환이 우리 입장에서 아무리 합리성을 잃었다고 해도 한국 외교의 중대한 실책마저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점진적인 친북, 반한 움직임을 간파하는 데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 변화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작년 9·13 북·러 보스토치니 정상회담에 이어 올해 우리 정부의 대러 3차 제재(2월)→안보리 대북 제재위 전문가 패널 활동 종료(5월)→푸틴의 방북 및 북·러 신조약 체결(6월) 등 점진적으로 악화한 한·러 관계의 관리도 실패했다. "러 측이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한반도 평화, 안정을 위해 건설적 역할을 하려 한다면 북한의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긴장 고조 행위를 자제시키고 대화·외교의 길로 복귀토록 설득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조한 우리 외교부 '입장'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다.
러시아의 한반도 태세 전환은 한·러 및 북·러 관계의 동학을 벗어난다. 미·러 갈등이 저변에 깔려 있다. 러시아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미 동맹과 한미일 연합훈련 및 군사협력 강화를 안보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작년 말부터 올해 전쟁이 발생할 지역의 하나로 한반도를 지목(12.28. 타스통신 인터뷰)했다. 동아시아에서 군사주의를 강화한 미국을 한반도 '현상변경 세력'으로 지목한 것. 라브로프 장관은 지난 5월 21일에도 "미국과 동맹국들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상황을 자극해 분쟁국면(hot phase)으로 몰아간다"고 비난했다.
다층적 역학 관계에서 나온 러시아의 변화는 남북 간의 긴장 고조와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자하로바 성명에 포함된 '불가분의 안보' 원칙이다. 1975년 유럽안보협력 회의(CSCE)가 채택한 '헬싱키 선언'의 토대로 한 나라의 안보가 다른 나라의 안보를 해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미국은 냉전 해체 뒤 '불가분의 안보'를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외교개념 문서에서 이를 명시하고 있다. 우크라 전쟁의 명분으로 활용해 온 불가분의 안보 원칙을 한반도에 적용한 것은 북한의 안보적 우려를 먼저 인정한 것으로 중국의 입장과도 겹친다.
북한 경고 뭉갠 윤 정부에 최대 악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이처럼 복잡하게 꼬이고 있다. 남한 무인기의 영공 침범 불용을 경고한 북한에 대해 "경험으로 보면, 북한 주장은 무시하는 게 상책(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이라는 식의 1차원적 사고를 크게 벗어난다.
우크라 전쟁 발발을 방관하고 이를 가상의 대만전쟁으로 연결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군사주의에서 비롯된 상황 전개다. 여기에 무작정 편승해 중국과 러시아를 최대한 배제하고 한미 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의 '외줄타기'를 해 온 윤석열 정부의 무모한 선택이 더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 2년 8개월, 윤석열 정부 출범 2년 5개월 만에 벌어진 외교 실패이자, 우리 안보상 미증유의 악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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