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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전쟁 걱정하는데...북에 돈 갚으라는 통일부, 저작권 따진 합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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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난 15일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폭파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반응이 가관이다. 통일부는 이날 언론에 배포한 입장문에서 "4년 전 대북전단을 이유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이어 퇴행적 행태를 반복하는 모습에 개탄스러울 뿐"이라고 밝혔다. 당연히 내놓아야 할 입장이었다. 어찌 됐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해 20여 년 동안 이어졌던 길을 북한이 '폭파 이벤트'로 난폭하게 끊은 건 비판받아 마땅하다. 두 말이 필요 없이 글러 먹은 작태였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7일 이틀 전 있었던 경의선·동해선 남북연결 도로·철도 폭파 소식을 전했다. 통신은"이는 대한민국을 철저한 적대국가로 규제한 공화국헌법의 요구와 적대세력들의 엄중한 정치군사적 도발책동으로 말미암아 예측불능의 전쟁접경에로 치닫고 있는 심각한 안보환경으로부터 출발한 필연적이며 합법적인 조치"라고 밝혔다.2024.10.17

그런데 15일 통일부 입장문은 생뚱맞게 돈 이야기를 꺼내 준엄한 입장을 스스로 허물었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공사 당시 자재-장비 지원 명목으로 북한에 건넨 총 1억3290억 달러(현재 환율 1822억 원)을 언급하며 "차관에 대한 상환 의무가 여전히 북한에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고 밝혔다. 차관은 상환을 전제로 제공한 것이기에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상환 요구도 할 계제가 있다. 북한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평양 무인기 침범' 사태에 대응하고 있는 마당에 상환 문제를 꺼내서 무슨 실효가 있겠나.

기회 될 때마다 북한에 '돈 갚으라'는 말은 어디선가 많이 접해본 논리. 바로 보수 유튜버들이 해 온 말이다. 경협 차관으로 건넨 쌀값을 갚으라는 말과 연장선에 있다. 보수 유튜버 출신 장관을 모셔서 그런지, 통일부 존재의 의미가 갈수록 퇴색하는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평화의 북진'을 시도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자유의 북진'을 진두지휘하겠다는 '이념 전담부처'로 전락했다. 새로운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히겠다는 의욕은 이해하나, 공무원은 법령이 정한 업무를 하는 대가로 봉급을 받는다. '이념 전쟁'도, 차관 상환도, 통일부의 주 임무가 아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까지 거든 걸 보면 이러한 사고가 어느새 정부·여당의 '노멀(표준)'이 된 게 분명하다.

합동참모본부의 17일 정례 브리핑은 더 가관이었다. 경의선-동해선 폭파가 주는 의미는 심대하다. 그런데 언론의 첫 질문이 우리 군이 촬영한 사진의 도용 문제였다. 군사분계선(MDL) 남쪽에서 찍은 각도로 보이는 사진을 두고 물었다. 이성준 합참 실장은 이에 대해 "아직 초기 분석 중이지만, 합참이 공개한 영상을 북한이 무단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저작권 침해 문제를 지적했다. 저작권 문제가 궁금하다는 언론의 '깨알 관심'도 뜬금없지만, 이를 진지하게 받은 답변도 기가 막힌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 지난해 9월 13일 러시아 극동 아무르 지역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에 앞서 보스토치니 우주 비행장에 도착하고 있다. 2023.9.13. 로이터 연합뉴스

불과 사흘 전 합참 브리핑에서 "이러다가 전쟁하는 거 아닌가"하는 세간의 우려가 전달됐었다.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는 데 저작권 타령을 하는 장면이 경이롭다. 집이 불타는데 집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는 격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5일 우리의 국가안보회의(NSC)에 준하는 국방-안전 분야 협의회를 처음 소집하고, 17일엔 인민군 제2군단 지휘부를 방문해 서울 지도를 놓고 임전 태세를 점검했다. 이 자리에서 경의선-동해선 폭파와 관련, "한국으로부터 우리 주권이 침해당할 때 물리력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음을 알리는 마지막 선고"라고 강조했다. "한미동맹의 성격 변이(핵 동맹화)와 적들의 침략적 성격의 군사행동 때문에 핵 억제력 강화가 중요하다"라고도 했다. 통일부와 합참의 '뜻밖의 관심'은 진행되는 사안을 한없이 가벼이 보고 있지 않다면 내놓을 수 없는 반응이다.

한 편의 블랙 코미디에 북한까지 뛰어들었다. 김여정 북한 당중앙위 부부장은 18일 '몰상식한 소리는 그만 줴치라(중단하라)'는 제목의 담화를 내놓고 저작권 위반 의혹에 관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북한 외무성 중대성명을 통해 '무인기 평양 침범'을 공개한 뒤 12~15일 연나흘 경고 담화를 냈던 그가 내놓은 말의 주제라고 하기에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는 "미국 NBC방송, 폭스뉴스, 영국 로이터 통신과 같은 세계 언론이 보도한 동영상 중 한 장면을 사진으로 썼다"라면서 "우리 쪽에서 찍을 수 없는 각도였고, 구도상으로나 직관적으로 보기에 좋고 우리 의도에도 썩 맞더라니 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언론도 조선중앙통신이 제공한 사진과 동영상을 쓰지 않았냐"라고 되받았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 10월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의 북한 정책을 설명하고 있다. 2023.10.18 연합뉴스

물론 방점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장사말 하는 데 혼사말 한다고 우리가 단행한 폭파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섭(썹)에 얼마나 엄중한 안보 위기가 매달렸는지 본질은 간데없고 '사진 론란'을 불구는(제기하는) 형태가 진짜 멍청하기 그지 없다"고 비꼬았다. 합참에 대해 "나라의 안보를 지킨다는 직분에도 맞지 않게 사진 따위나 만지작거리지 말고 우리 공화국 주권과 안전에 엄중한 위해를 끼친 중대 도발사건에 대해 제대로 조사, 규명하라"고 촉구했다.

한미 군수뇌부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김명수 합참의장은 18일 찰스 브라운 미국 합참의장, 사무엘 파파로 미 인도태평양사령관, 폴 러캐머라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제49차 군사위원회 회의(MCM)를 화상으로 열고 긴박한 한반도 상황을 논의했다. 한미 양국군의 별 16개가 긴급하게 머리를 맞댄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위중하더라도 통일부는 차관 꼭 돌려받고, 합참은 북한과의 저작권 시비를 가려 역시 제값을 받기 바란다. 김 부부장은 남측 언론의 저작권 도용 실례를 더 찾아 꼭 국제적 정당성을 찾기 바란다. 한반도 거주민이 불안해하고 세계가 불안한 시선으로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점, 남북이 꾸민 기상천외한 소극(笑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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