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태산이다. "(취임 뒤)우크라이나 전쟁을 24시간 안에 해결하겠다"고 다짐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됐음에도 윤석열 정부는 여전히 '바이든의 과거'에 머물러 있다. 상황 변화 속에 어떠한 적응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7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우크라 지원 계획과 관련, "북한군의 (전쟁) 관여 정도에 따라서 단계별로 지원방식을 바꿔 갈 것"이라면서 "상황을 봐야겠지만, 만약 무기 지원을 하면 방어무기부터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방어용 무기 제공 용의를 직접 밝힌 건 처음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입장이 트럼프 당선자와 첫 통화를 한 뒤에 나왔다는 점이다. 미국 대선 전 정부 입장에서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지난 1일 아직 우크라 측과 무기 지원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북한군이 참전한다면) 1차적으로 방어무기 지원을 이야기하는 게 상식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방어무기에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비롯해 요격미사일과 방공시스템 등이 포함된다. 대통령의 발언은 '트럼프의 귀환'이 몰고 올 외교·안보 지각 변동에 어떠한 준비도 하지 못했음을 고백한 꼴이다.
전장에서 공격무기와 방어무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방어무기는 러시아의 공격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공격한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방어용 무기일지언정 한국의 직접 무기 지원이 실행되면 이를 레드라인(금지선)으로 그어 놓은 러시아의 반발과 이에 따른 북러 간 군사협력의 심화 및 한러 관계 파탄의 '이중 파고'를 맞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관점과도 어긋난다.
트럼프가 내년 1월 20일 취임 뒤 거듭 밝힌 대로 우크라 전을 조기에 종전시킨다면 한국 무기가 우크라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윤석열 정부와 달리 트럼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간접 대화를 통해 '케미'를 확인하고 있다.
트럼프는 7일 NBC 뉴스 인터뷰에서 "당선 뒤 각국 지도자와 가진 70번의 통화에는 빠졌지만, 곧 푸틴 대통령과 대화를 나눌 계획"이라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같은 날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1차 발다이 클럽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축하하면서 "그와 함께 우크라 전쟁에 관해 이야기 나눌 준비가 돼 있다"고 화답했다. 트럼프는 지난 10월 14일 펜실베이니아주 타운홀 행사에서도 "대선에서 이기면 백악관을 인수하기 전에라도 당선인 자격으로 우크라전을 끝내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푸틴은 열흘 뒤 브릭스(BRICS)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전을 끝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는 트럼프씨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진지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24시간 내 종전안'의 세부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시나리오가 흘러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영국 텔레그래프의 8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주변에서 거론되는 해법은 △러시아의 점령지 인정 △비무장지대(DMZ) 설치와 △우크라의 나토 가입 최소 20년 보류 등이 골자다. 트럼프 측은 이러한 조건으로 우크라에 대한 지원을 해줄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1290㎞에 달하는 전선에 들어설 DMZ 관리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폴란드군에 맡김으로써 미국은 손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복안이다.
이번 전쟁의 피점령지는 물론 러시아가 2014년 병합한 크림반도까지 반환하라는 '젤렌스키 평화공식'과 배치된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공약을 지키려 할 트럼프에 맞서 젤렌스키의 대처방안은 마땅치 않다. 어떤 방식이든 2022년 9월 이후 2년 넘게 진지전, 소모전을 반복해 온 전쟁 양상은 바뀔 수밖에 없다.
정부가 북한군의 참전을 무기 지원의 출발점으로 삼는 건 명분도, 실리도 없다. 되레 안보 위기를 자초한다. 한국은 교전 당사국인 우크라 및 러시아와 동시 수교국이다. 두 나라 중 한반도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는 단연 러시아다. 우크라가 아니다. 한미는 아직 러시아가 북한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정찰위성 등 첨단 군사기술을 이전했다는 증거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설령 결정을 내리지 않더라도 대통령이 이런 방침을 공개한 것 자체가 북러 관계의 심화를 촉진한 꼴이다.
한국의 대우크라 무기 직접 지원은 조 바이든 행정부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꾸준하게 요구해 온 것이다. 대통령은 방어용 무기 제공의 조건으로 북한군 참전을 들지만, 기실 임기 3달을 남긴 바이든 행정부의 막바지 무기 지원 노력과 보조를 맞춘 움직임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취임 전까지 NASAMS 대공방어 시스템을 보강하기 위해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포함, 500기 이상의 요격미사일 지원을 서두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정확하게 윤 대통령이 언급한 방어용 무기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윤 대통령이 10월부터 대외적으로 북한군 파병의 심각성을 강조한 일련의 통화를 하면서도 정작 바이든 대통령과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는 점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21일, 28일),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28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29일),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30일)와 잇달아 통화했지만, 한미 정상 간에는 어떠한 접촉도 없었다. 바이든조차 직접 챙기지 않는 한국의 무기 지원을 우크라전 조기 종전 의지가 확고한 트럼프가 관심을 가질 이유는 더더욱 없다.
트럼프 특유의 거래주의 셈법에서 한국의 자발적인 무기 지원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미국으로선 손해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이든의 대외전력과 트럼프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동맹을 줄 세우면서, 중국과 장기적인 전략적 경쟁을 해온 게 바이든의 4년이었다. 우크라전은 그 핵심 포석이었다.
트럼프도 중국을 겨냥한다. 하지만 최소한 러시아를 약화시킬 의향은 내보인 적이 없다. 그 반대다. 바이든과 달리 동맹과 우방에게 제값을 요구하는 반면, 러시아나 북한 등 잠재적 적국과의 거래(deal)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관점의 트럼프가 북한은 물론, 러시아와 대적하려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보겠는가?
'남의 전쟁'에 개입한 대가로 한국이 감당해야 할 북한과 러시아발 안보 위협에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태세를 보일지도 미지수다. 지원은 한국 맘대로 하되 그 책임도 한국이 지라고 할 수 있는 이가 트럼프다. 국민 여론 역시 나토-우크라와의 방산 협력이나, 우크라 재건사업에서 이득을 챙기는 대가로 닥쳐올 안보 위기를 환영할 리 만무하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가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위기 타파를 위해 전쟁 여론을 부추긴다는 의혹이 깊어지는 판이다.
이래저래 지난 10월 18일 국가정보원이 '북한군 우크라전 참전 확인' 발표 뒤 안팎으로 숨 가쁘게 내달려 온 윤석열 정부의 여론몰이는 갈림길에 서게 됐다. 바이든 행정부와 나토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트럼프 행정부의 관점에 반하거나, '찻잔 속 태풍'으로 소멸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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