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증오도 기억이 키운다. 정치적 의도가 묻으면 기억은 단순한 상징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현재의 이정표가 된다. 김정은의 북한과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특히 '기억의 정치'를 중시한다. '북러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의 비준 절차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라는 외교안보 변수가 동시에 굴러가고 있다. 미국 대선도 코 앞이다.
북러 전략대화의 이면
북한과 러시아는 각각 북한군의 정확한 성격과 임무에 대해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모호성에 기대어 윤석열 정부가 생뚱맞게 국제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북한군 파병의 의미를 최대한 키우고 있다. 국방장관이 워싱턴, 토론토, 브뤼셀을 돌며 그 위험을 널리 알리고, 홍장원 1차장을 비롯한 국정원 간부들과 합참 관계자들이 팀을 이뤄 브뤼셀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본부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를 찾아 브리핑하고 있다. 이들이 과연 북러가 벌이는 기억의 정치를 눈여겨봤을지 의심스럽다.
러시아를 방문한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1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함께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기차역을 찾았다. 역사 벽에 조그만 기념현판 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김일성 주석의 1949년 3월 소련 방문 사실을 적은 현판이다. 최 외무상과 라브로프 장관이 '전략대화'를 한 뒤 가진 행사다. 제막식에서 최 외무상은 "긴밀한 동지적 친분관계와 전략적 인도 밑에 조로(북러) 관계의 전략적 가치와 의의가 엄혹한 국제정치환경 속에서 더욱 중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지난 6월) 푸틴 대통령의 방북이 '커다란 역사적 사변'이라면서 북러 조약은 "두 나라 인민들의 이익에 맞게 이미 실천단계에 들어섰다'고 강조했다, 고 한다. 라브로프는 특히 김일성 주석의 소련 방문이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이정표의 하나"라면서 푸틴-김정은의 영도 아래 양국 간 협조관계가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높은 수준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새삼 평가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75년 전 '스탈린-김일성' 관계와 '푸틴-김정은' 관계를 댓바람에 연결했다. 그런데 라브로프는 자신의 말이 한반도 거주민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이해했을까?
김일성 기념현판과 T-34탱크
공산주의 독재를 청산한 러시아는 더 이상 스탈린을 기념하지 않는다. 요시프 스탈린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흔적은 고향인 조지아 고리의 박물관에나 남아 있다. 볼셰비키 출신 부친을 두었고, 그 자신 오랫동안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로 일했지만, 푸틴은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위대한 러시아에 타격을 입힌 낡은 이념으로 본다. 그러나 나치와 파시스트를 상대로 벌인 2차 세계대전의 전승 기억은 애지중지한다. 특히 우크라 침공 뒤에는 전쟁이 2차 대전과 마찬가지로 반나치 전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당시 사용했던 T-34 탱크를 기억 정치의 매개체로 동원한다. 반러 성향이 강해진 에스토니아 정부가 2022년 8월 국경도시 베르나의 공원에 전시했던 T-34 탱크를 수도 탈린 외곽의 박물관으로 옮기자,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기어코 에스토니아 국경 인근 러시아 지역에 다른 T-34를 2차대전 전승기념물로 전시했다.
지도자가 다녀간 장소에 현판을 거는 건 북한에 여전히 중요한 의식이다. 러시아 정부가 야로슬랍스키역에 현판을 마련한 건 북한식 관행을 존중하려는 외교적 배려로 읽힌다. 현판은 이후 북한 방문자들이 찾아야 할 표식이 된다. 2019년 4월 처음 방러한 김정은 위원장이 귀국길에 굳이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의 고급 레스토랑 레스나야 자임카(사냥꾼의 작은방)에서 점심을 먹은 이유의 하나는 '2002년 8월 24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했다'는 현판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야로슬랍스키역의 현판이 여느 기념현판과 다르다는 점이다.
북·러 관계의 이정표
1949년 3월 5일 김 주석의 방문은 요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에게 남침 안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스탈린은 승낙하지 않았다. 1년 뒤 3월 30일 김 주석을 다시 모스크바를 불러들여 전쟁을 승낙했다. 러시아가 돌연 스탈린-김일성의 역사를 기념하는 건 한반도 거주민 입장에서 대단히 불쾌하다. 푸틴-김정은 관계와 연결한 건 더 불온하다. 라브로프로선 머지않아 이뤄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스크바 방문을 앞두고 '역사적 표식'을 마련해 두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전쟁이 관련된 방문을 기념하나. 물론 한국전쟁이 북러 관계의 중요한 이정표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다.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물론, 방북한 러시아 고위 당국자들이 자주 전쟁을 돌아본다. 평양 중구역 경상동의 소련군 전사자 추모탑(해방탑)과 소련군 열사묘에 화환을 놓는다. 이 역시 한러 관계의 악화 속에 종종 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우크라전 이전에는 러시아 측의 방북 자체가 거의 없었다. 북한과 러시아는 기억 속에서 '반미, 반서방 코드'를 꺼내 확대하고 있다. 세계를 돌며 '북한군 파병'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퍼뜨리고 있는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팀이 간과하고 있는 현실이다.
북러가 돌연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우크라전 이후 세계와 한반도 상황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일어난 현상이다. 그 해소 과정 역시 세계와 한반도가 맞물려 진행돼야 한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2017~2021) 시절 멀어진 동맹과 우방을 묶는 방편의 하나로 우크라전을 방관, 러시아의 약화를 노렸다. 탈냉전 이후 한미동맹을 축으로 하면서 중국, 러시아와 관계를 확대해 온 한국의 선택지는 좁아졌다.
한국은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미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에 몰방한 윤석열 정부의 자발적 참여가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켰다. 한국과 새로운 협력의 역사를 써나가던 러시아가 '평양 무인기 침범'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에 "대북 도발을 중단하라"고 호통치게 된 것은 상당 부분 정부의 업보다. 북러는 그 끝에 상서롭지 못한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미대선 뒤 바뀔 우크라전쟁, 안 바뀔 윤석열 정부
세계정치 차원에서 우크라전은 5일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변화의 계기를 찾을 수 있다. 3차 세계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슨 '힘에 의한 평화'니, '자유의 북진'이니 하는 구호를 계속 외치는 정부가 한반도 남쪽에 있는 한, 한반도 차원에서 변화 동력을 살릴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그럼에도 기억은 기억으로 덮어야 한다.
역사의 기억은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변용된 기억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만큼만 강조된다. 정치적으로 되돌릴 여지가 있다. 국가는 이런 걸 하라고 외교관들에게 봉급을 준다. 러시아가 우크라전과 윤석열 정부 출범 전으로 돌아가 다시 한국과 발전과 협력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아니면 우크라에 평화가 오더라도 우리는 나쁜 기억의 정치를 계속 봐야 한다. 최소한 윤석열 정부 임기 동안에는. 이 정부가 귀담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미래 역사에 미칠 책임은 그들에게 무겁게 물어야 한다. 남북 관계와 한러 관계의 새로운 기억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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